지식을 넘어선 삶의 변혁: 우리에게는 온전히 ‘빚어진’ 제자가 필요하다

존 스톤스트리트 회장.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존 스톤스트리트 회장의 기고글인 ‘교회들은 복음을 축소해 왔다'(Churches have shrunk the Gospel)를 7월 2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스톤스트리트 회장은 콜슨 기독교 세계관 센터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신앙과 문화, 신학, 세계관, 교육 및 변증법 분야에서 인기 있는 작가이자 연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기독교는 거짓되거나 이단적인 것으로 변질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본래 지닌 광대함보다 훨씬 작고 축소된 형태로 전락했다.

심지어 교회의 사명, 곧 그리스도를 높이고 성도들을 세우며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한 이해조차 기독교를 비좁은 틀 안에 가두는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예배는 주일 오전에 교회 안에서 드리는 행위로만 여겨진다. 제자훈련은 성경 지식을 습득하거나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축소된다. 전도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는 한 번의 ‘결단’을 받아내는 일로 제한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선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는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기독교는 교회 건물 안에서는 뚜렷하게 보이면서도, 정작 사람들이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상의 현장에서는 거의 모습을 감추고 만다.

신앙이 일과 분리되고, 예배가 소명과 단절되며, 제자훈련이 문화와 무관해지고, 구원이 더 넓은 세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겨질 때 기독교는 철저히 사유화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았다면 크게 당혹스러워했을 것이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그리스도를 단지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분으로만 선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증언했다.

사도 바울은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됐고, 그분을 위해 창조됐으며, 그분 안에서 함께 유지된다고 선언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의 모든 영역에 미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배는 결코 예배당 안에 갇힐 수 없다.

예배는 우리가 사업을 운영하는 방식과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 이웃을 돌보는 방식에까지 이어진다. 예술을 창조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정치에 참여하고, 창조세계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청지기처럼 돌보는 모든 삶의 방식이 예배와 연결된다.

그리스도를 높인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두신 모든 자리에서 그분의 주권 아래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를 제자로 세운다는 것도 성경 지식을 전달하는 일을 넘어선다. 그것은 삶 전체의 변화에 관한 일이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권면했다. 이러한 빚어짐은 우리가 성경에 대해 무엇을 아는지를 넘어, 현실 자체를 바라보는 방식까지 근본적으로 바꾼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하며,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가장 참된 실재로 인식하도록 가르친다.

오늘날 교회에는 바로 이러한 형태의 빚어짐이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무언가에 의해 제자훈련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는 끊임없이 우리의 사랑과 습관, 가치관과 전제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성경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 빚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를 둘러싼 문화에 의해 빚어질 수밖에 없다.

칭의의 교리를 이해하면서도 성과 정체성, 노동과 기술, 정치와 인간의 번영에 관해서는 본질적으로 세속적인 관점으로 사고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그는 아직 삶 전체가 복음으로 충분히 빚어진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교회의 임무는 사람들의 삶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다”라는 진리를 증언하도록 그들을 세우는 것이다.

전도 역시 한 번으로 끝나는 거래가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지 개종자를 만들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그분이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지상명령은 사람들을 단지 천국에 보내는 일에 관한 명령이 아니다. 삶의 모든 영역을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통치 아래로 이끄는 일에 관한 명령이다.

초대교회가 고대 세계를 변화시킨 방식도 이와 같았다.

기독교인들은 버려진 아기들을 구조했고,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았으며, 여성의 존엄성을 높였다. 불의한 관습에 맞섰고, 희생적인 사랑이 두드러지는 공동체를 세웠다.

그들의 복음은 말로만 선포되지 않았다. 삶의 방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들의 신앙은 인격적이었지만 결코 사적인 것에 머물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교회가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척 콜슨이 자주 강조했듯, 기독교인은 세상에 무언가를 제안하도록 부름받았지 강요하도록 부름받지 않았다.

우리의 목표는 지배가 아니라 신실함이다. 우리의 임무는 통제가 아니라 증언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문화적 권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순종이다.

그러나 신실한 기독교인의 삶은 필연적으로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

성도들이 성경을 통해 깊이 빚어지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으며, 복음이 말과 행동으로 함께 드러날 때 공동체와 가정, 제도와 문화는 변화한다.

이는 문화 변혁 자체가 교회의 궁극적인 사명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때 그러한 변화가 자연스럽게 열매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세상에 참여하기 위한 또 하나의 새로운 전략이 아니다.

교회가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회복하는 일이다.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단지 많은 정보를 지닌 신자가 아니다. 복음으로 온전히 빚어진 신자다.

주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자리가 어디든, 그곳에서 삶 전체로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를 준비가 된 남성과 여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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