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전쟁에서 십자가의 길로: 가자 지구 참상을 바라보는 기독교적 성찰

살림 J. 무나이어 교수. ©reconciledworld.net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살림 J. 무나이어 교수의 기고글인 '성경·이스라엘·기독교 시온주의와 ‘거룩한 전쟁’의 신화를 바라보는 기독교적 시각'(A Christian perspective on the Bible, Israel, Christian Zionism, and the myth of holy war)을 최근 게재했다.

살림 J. 무나이어 교수는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 그리고 중동 지역의 다른 분열된 공동체들 사이의 화해를 증진하는 데 헌신해 온 단체 ‘무살라하’의 설립자다. 현재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산하 평화와화해네트워크(PRN)의 중동·북아프리카 지역 코디네이터로 섬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 이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인 군사 작전은 전례 없는 수준의 파괴를 낳았다. 유엔 조사위원회와 주요 인권단체들은 이를 제노사이드, 곧 집단학살에 해당한다고 결론 내렸다. 동시에 이 전쟁은 현대 정치와 종교 담론에서 성경적 언어가 놀라울 만큼 강하게 부활하는 계기가 됐다.

군사 작전이 시작된 이후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와 종교 인사, 군 랍비, 여론 주도층은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의 서사를 거듭 인용해왔다. 아말렉과 신적 심판, 거룩한 복수, 원수의 진멸과 같은 표현들이 정치 연설과 설교, 소셜미디어, 공론장에 여과 없이 등장했다.

이러한 언어는 가자지구에 대한 압도적 무력 사용과 철저한 파괴를 촉구하는 목소리와 맞물리며, 이번 전쟁을 형성하고 있는 신학적 상상력에 깊은 질문을 던진다.

국제사회의 관심이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제노사이드 등의 법적 혐의에 집중되는 동안, 이 분쟁의 신학적 차원에 대한 검토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말렉이라는 수사학의 배후에는 더 거대한 성경적 서사, 곧 여호수아서가 자리한다.

아말렉이 진멸해야 할 원수를 상징한다면, 여호수아서는 정복 자체의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 아래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을 기록하며, 도시의 파괴와 원주민의 축출, 땅의 점령을 포함한다.

유대교와 기독교 역사에서 이 본문들은 지속적인 윤리적 불편함과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후대의 성경적 가르침과 심각한 긴장을 이루는 폭력을 승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호수아가 다시 주목받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레이철 하브렐록과 같은 학자들이 보여주었듯, 여호수아서는 초기 시온주의 사상가들의 상상력과 현대 이스라엘의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0월 7일 사건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정복과 정착, 유업, 땅의 구속이라는 주제는 여러 갈래의 시온주의 사상과 이스라엘 교육, 종교적 시온주의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10월 7일의 사건들이 이러한 서사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다만 변방에 머물던 서사들을 공론장의 중심으로 끌어올렸을 뿐이다.

정복의 언어가 부활한 현상은 이스라엘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미국 기독교 시온주의의 많은 지도자들도 언약과 정복, 영토적 약속이라는 성경의 서사를 통해 현대 이스라엘을 해석해왔다.

10월 7일 이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거룩한 전쟁과 신적 심판, 완전한 승리라는 언어를 사용하며 가자지구에서의 군사 행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유대교와 기독교 양쪽에서 폭력은 점차 신성화됐고, 하나님의 목적에 참여하는 행위로 포장됐다.

이러한 배경에서 정당전쟁론의 지속적인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한 교황 레오 14세의 최근 발언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정당전쟁의 전통은 비례성과 구별의 원칙, 민간인 보호를 통해 폭력을 제한하려 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목격되는 현실은 그러한 기준을 넘어 정복의 패러다임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듯 보인다.

오늘날 기독교인이 직면한 핵심적인 신학적 질문은 현대 전쟁이 정당전쟁론의 기준을 충족하느냐는 문제만이 아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여호수아의 정복 패러다임이 오늘날에도 정치적 행동의 모델로 기능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독교인은 현대 정치신학에서 여호수아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이러한 서사가 어떻게 변혁됐는지도 물어야 한다.

여호수아, 국가 정체성, 현대 이스라엘의 형성

여호수아서의 현대적 의미는 이스라엘의 국가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교육과 집단기억이 수행한 역할을 빼놓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시온주의가 태동하던 초기부터 성경의 서사는 국가 건설 프로젝트의 중심에 놓였다.

학교 교육과정과 청년운동, 고고학 프로젝트, 국가 기념일과 공식 행사는 현대 유대인을 고대 이스라엘과 연결했다. 이 과정에서 여호수아는 귀환과 정착, 주권, 땅의 점령을 상징하는 강력한 인물로 부상했다.

히브리 성경은 단순한 종교 문헌을 넘어 국가적 서사로 기능했다. 교육기관과 시민문화를 통해 여러 세대의 이스라엘인은 자신을 성경 시대의 이스라엘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역사적 이야기의 참여자로 이해하도록 배웠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단지 성경 속 인물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상징적 언어의 일부가 됐다.

10월 7일 이후 여호수아와 아말렉의 언어가 다시 등장한 것도 진공 상태에서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이러한 서사는 종교적 시온주의와 민족주의 사상, 이스라엘의 시민종교 안에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달라진 것은 그 존재가 아니라 대중에게 드러나는 정도였다.

10월 7일의 충격은 실존적 투쟁과 거룩한 복수, 국가적 운명에 관한 깊이 뿌리내린 서사를 다시 활성화했다. 아말렉과 정복, 신적 심판에 대한 언급은 정치적 수사와 설교, 군 내부 담론, 소셜미디어에서 급증했다.

이와 함께 거룩한 복수라는 강력한 담론도 등장했다. 두려움과 슬픔, 굴욕과 분노는 성경적 범주를 통해 표현됐고, 분쟁은 절대악과의 투쟁으로 규정됐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압도적 보복이 전략적으로 필요한 조치일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나아가 종교적으로 정당한 행동으로 쉽게 받아들여진다.

가장 위험한 지점은 성경의 서사가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전락할 때다. 고대의 맥락에 뿌리를 둔 본문이 현대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바뀌고, 정의와 복수의 경계가 흐려진다. 군사적 폭력에 대한 비판은 국가에 대한 배신이나 하나님의 목적에 반대하는 행위로 매도된다.

미국 기독교 시온주의와 정복의 신학

정복신학은 이스라엘 안에서만 형성된 것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미국 기독교 시온주의 지도자 상당수는 성경의 정복 서사를 통해 현대 이스라엘을 해석해왔다.

그들은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고대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연장선으로 간주하고, 영토와 주권에 관한 성경의 약속을 역사적 맥락이나 신학적 발전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오늘날의 정치 현실에 적용한다.

10월 7일 이후 이러한 관점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마스는 현대의 아말렉으로 묘사됐고, 이스라엘의 군사 대응은 여호수아의 전쟁이라는 틀 안에서 해석됐다.

하마스의 제거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때로 가자지구 자체의 파괴를 정당화하는 수사로 확대됐다. 정치 지도자와 종교 평론가들은 완전한 승리와 압도적인 무력, 원수의 제거를 강조했다.

많은 기독교인이 민간인 보호와 평화를 촉구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정복과 신적 심판을 앞세우는 서사에 묻히곤 했다.

그 결과 폭력의 신성화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전쟁은 더 이상 정치적 갈등이 아니라 선과 악 사이의 우주적 투쟁에 참여하는 행위로 재구성됐다.

이러한 흐름은 세계 모든 기독교인에게 깊은 우려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폭력이 신성화되면 도덕적 제동 장치는 힘을 잃는다. 적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전락한다. 정복의 언어는 정치적 적을 하나님의 원수로 바꿔버린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기독교인은 이 지점에서 중요한 교정의 관점을 제시해왔다. 식민주의와 점령, 실향의 상처를 지닌 사회 출신의 이들은 정복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정복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여호수아를 읽는다.

그들의 성경 읽기는 인간의 사회적 위치가 성경 해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정복의 서사가 억압받는 이들의 귀에 얼마나 다르게 들리는지도 일깨운다.

예수와 거룩한 전쟁의 변혁

기독교인에게 결정적인 질문은 여호수아서가 성경에 포함돼 있느냐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여호수아를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가 핵심이다.

1세기 당시 많은 유대인은 여호수아나 다윗과 같은 메시아를 기대했다. 이스라엘의 적을 물리치고 국가의 주권을 회복할 강력한 지도자를 기다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단호하게 거부하셨다. 의미심장하게도 예수와 여호수아는 히브리어로 같은 이름인 ‘예호슈아’를 공유하지만, 두 인물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호수아는 정복을 통해 땅에 들어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개와 치유,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다.

여호수아는 원수를 물리쳐 죽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여호수아의 승리는 군사력을 통해 얻어진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완성된다.

이 대조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칼을 뽑았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칼집에 도로 넣으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을 통해 세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거룩한 전쟁의 철저한 변혁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승리는 원수의 파멸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적 사랑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는 정복을 대신하고, 용서는 복수를 대신하며, 평화를 이루는 일은 지배를 밀어낸다.

현대의 적을 향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독교인이 여호수아나 아말렉을 인용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여호수아를 읽는 대신 여호수아를 통해 예수님을 읽는 위험에 빠진다.

신약성경은 이 순서를 완전히 뒤집는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경을 해석하는 중심이자 렌즈가 돼야 한다.

정복을 넘어서는 기독교적 응답

오늘날 교회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정복의 언어를 빌려 폭력을 계속 신성화할 것인가, 아니면 화해의 공동체로서의 소명을 회복할 것인가.

이는 악을 방관하거나 정의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시민을 보호할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부정하라는 의미도 아니다.

성경의 정복 서사가 집단처벌과 비인간화,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신학적 방패로 사용되는 것을 거부하라는 뜻이다.

실천적으로 교회는 공론장에서 성경이 오용되는 일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무차별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성경적 언어가 동원될 때 기독교 지도자들은 분명히 반대해야 한다.

신학교와 신학기관은 여호수아서와 같은 난해한 본문을 책임감 있게 가르쳐야 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이라는 빛 아래서 해석하도록 도와야 한다.

기독교인은 국제법의 준수와 민간인 보호, 인도주의적 지원, 평화적 분쟁 해결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한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가 예언자적 공동체가 될 용기를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전쟁의 시기에 종교기관은 자칫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는 종교적 시녀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자들은 왕들의 불의에 도전했고, 부조리에 맞섰으며, 연약한 자들을 변호했다. 교회는 그 전통을 이어가도록 부름받았다.

가자지구의 참상과 아말렉 수사학의 부활, 여호수아의 정복 서사로의 회귀는 이 논쟁이 단순한 군사전략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과 인간, 폭력을 이해하는 우리의 도덕적·신학적 비전이 놓여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이 마주한 질문은 특정 전쟁이 정당한가에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질문은 정복이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모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대답은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전쟁은 완전히 변혁됐다.

정복의 길은 화해의 길에 자리를 내어준다. 칼은 십자가 앞에 굴복한다.

교회의 부르심은 원수를 진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폭력을 신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시는 하나님을 삶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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