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캐리 한의 기고글인 '외로움은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How should I deal with loneliness?)를 7월 19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캐리 한은 리고니어 미니스트리와 『테이블토크』 매거진의 부편집장이며, 공인 성경적 상담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외로움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남녀노소, 기혼자와 미혼자, 부자와 빈자,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 모두에게 예고 없이 찾아온다.
어떤 이들에게 외로움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가꾸기 어려운 삶의 환경에서 비롯된다. 반면 늘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뼛속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두 경우 모두 자신이 보이지 않고, 이해받지 못하며, 사랑받지 못하고, 타인과 단절되어 있다는 깊은 상실감이 자리한다. 이는 불안과 수치심, 때로는 우울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이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외로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뤄야 할까. 우리는 외로움을 성경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 외로움은 타락의 결과다
외로움이라는 감각을 이해하려면 창조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영원부터 삼위로 존재하시며 완전한 사랑과 교제를 누리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 이는 인간 역시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뜻이다.
하와가 창조되기 전,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선언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 간에 아무런 깨어짐 없는 온전한 교제를 누렸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관계의 단절과 함께 외로움의 경험도 시작됐다. 그리고 오늘날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 그 쓴 열매를 맛보며 살아간다.
외로움을 논할 때 창조의 시작으로 돌아가는 것은 유익하다. 우리가 겪는 외로움이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실제로 그것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주의 무게 아래 탄식하는 이유도 세상이 원래 이런 모습으로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로움은 역설적으로 본래의 창조 세계가 얼마나 선했는지, 그리고 죄가 세상에 가져온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를 증언하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2. 외로움은 고통의 한 형태다
외로움은 분명한 고통의 한 형태다. 때로는 개인의 죄가 외로움을 불러오거나 더 깊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외로움은 특정한 죄와 직접적인 관련 없이 찾아온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영화롭게 되기 전까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와 이웃과의 진실한 사귐을 갈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는 본래 우리의 마음이 누리도록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하실 때까지,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에는 언제나 한계와 실패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틈마다 외로움이 자리할 수 있다.
외로움을 고통으로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 그 아픔을 억누르거나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142편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이어 그는 외로움의 고통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한다: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시편 142:4)
외로움은 숨겨야 할 감정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탄식으로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고통이다.
3. 외로움은 우리를 죄의 유혹으로 이끌 수 있다
외로움이 주는 고통은 때때로 사람을 죄의 유혹으로 이끈다.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갈망을 하나님께서 금하신 방식으로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은 자기 합리화에 능하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죄라고 말씀하신 것조차 자신의 특별한 상황에서는 허용될 수 있는 것처럼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낸다.
다윗은 신자가 고통받는 존재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했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환난과 고통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시편 25:16-18)
외로움으로 고통받을 때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유혹과 죄에 대해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외로움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외로움이 우리를 잘못된 위로와 관계, 중독과 타협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경계해야 한다.
4. 외로움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게 한다
외로움에 대한 탄식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갈 때, 우리는 인간의 동행만으로는 완전한 안식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과 같이 고백하게 된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시편 142:5)
외로움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철저히 단절된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탄식을 기도로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과 다시 연결된다.
인간적인 위로가 부족한 바로 그 자리에서 신성한 피난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 가운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외로움이 무엇인지 몸소 경험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한복음 16:32)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과 친구들에게 버림받을 것을 아셨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으셨다.
그럼에도 십자가 위에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홀로 짊어지셔야 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와 버림받음의 깊이를 자신의 인성으로 온전히 겪으셨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 철저히 버림받으셨기에,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담대히 고백할 수 있다: “다 나를 버렸으나…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디모데후서 4:16-17)
그리스도인은 외로울 수 있지만 결코 완전히 버려진 존재는 아니다.
5. 외로움은 영원하지 않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온전히 담당하셨고, 하나님께서 언젠가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기에 우리는 외로움이 궁극적으로 일시적인 것임을 믿을 수 있다.
다윗은 시편 142편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시편 142:7)
이 말씀은 이 땅에서 외로움을 겪는 모든 기독교인이 붙들어야 할 궁극적인 소망을 보여준다.
언젠가 우리는 의인들에게 둘러싸여 영원하고도 충만한 기쁨의 교제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도 온전히 의로워지고, 다른 이들도 온전히 의로워질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이 소외됐거나 사랑받지 못하거나 잊혔거나 단절됐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온전히 구속되고 회복된 그 세계에서 외로움은 영원히 지나가 버린 이전 것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