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기념사업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선교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후원하는 ‘2026년 장공콜로키움’이 7월 1일 오후 1시 ‘한국교회 회복을 향한 장공의 신학비전’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연속 기획으로 진행되는 이번 콜로키움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온라인으로 실시간 중계됐다.
이날 행사는 목회와신학연구소장인 허석헌 목사의 사회로 막을 올렸으며, 교계 및 학계를 대표하는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장공 사상의 현대적 의의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나눴다.
이날 발표를 맡은 이인배 목사(장공기념사업회 학술출판위원, 한국교회사학 전공)는 국내에서 장공 김재준 목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저술했다.
이 목사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언행일치를 이루고, 손해를 보더라도 소신을 굽히지 않은 채 자신이 쓴 글과 주장을 삶으로 증명해 낸 장공의 일관된 원동력을 추적하기 위해 1940년 이전 청년 김재준의 초기 생애를 다섯 가지 핵심 갈래로 재구성하여 발표했다.
이 목사는 “우리는 흔히 1930년대의 신학 논쟁을 김재준과 박형룡의 논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당시 논쟁은 송창근과 박형룡의 대결이었다”고 분석했다. 김재준과 박형룡의 치열한 논쟁은 그 이후인 1950년대에 본격적으로 전개됐다는 설명이다. 이 목사는 “1930년대 한국 교계의 신학적 수준은 지구의 나이가 6천 년이며 6일 동안 창조됐다는 문자주의적 주장이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통용될 만큼 처참한 실정이었다. 평양신학교 설립 당시 선교사들이 교육 수준을 자신들보다 낮게 책정했던 구조적 한계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어 “이러한 현실에서 『신학지남』의 편집을 맡고 있던 남궁혁 박사는 학문적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새로운 학문을 접하고 돌아온 송창근(교회론), 김재준(구약학), 한경직(신약학) 세 사람에게 지속적인 기고를 요청했다”며 “실제로 송창근과 김재준의 글이 실리면서 『신학지남』의 수준은 크게 업그레이드됐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보수 진영의 박형룡 박사는 선교사들의 전폭적인 대항 요구를 받으며 심혈을 기울여 글을 썼으나, 정작 그의 글 속에는 김재준의 구약학 논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없었다. 송창근의 글을 방어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결국 학문적 논쟁에서 밀린 보수 진영은 편집진을 압박하는 정치적 방법을 동원해 김재준과 송창근의 기고를 강제로 중단시켰다. 이 목사는 이 과정에서 한경직 목사가 단 한 편의 글만 기고하는 데 그친 점에 아쉬움을 표하며, 세 인물의 균형이 맞았다면 한국 신학의 차원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두 학자가 하차한 이후 『신학지남』의 수준은 다시 과거로 회귀했다. 김재준 목사는 『신학지남』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시편을 번역해 소개하고, 『십자군』 잡지에 창세기를 사역하여 소개한 인물이다. 그의 성서 원어 실력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며 “그는 창세기 번역에서 ‘여호와’가 아닌 ‘야훼’라는 용어를 한국 최초로 도입했으며, 히브리어 원어 발음을 대거 적용했다. 예컨대 가인에게 살해당한 ‘아벨’의 원래 히브리어 발음인 ‘하벨’을 그대로 살려 번역했다”고 했다.
이 목사는 “장공의 창세기 번역은 오늘날 성서공회에서도 인정하는 수준이며, 만약 그가 당시 제도권 성서 번역 작업에 공식 참여했더라면 우리나라 성서 번역사에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그동안 김재준 목사의 여정은 늘 든든한 선배이자 길잡이였던 송창근 목사의 행보를 따르는 구조였다. 박사 학위를 가진 박형룡에 맞서 석사 학위였던 김재준에게 송창근은 강력한 방패막이였다”며 “그러나 평양을 떠나야 했던 시점에 장공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송창근 목사를 따라 부산으로 가는 길과, 문재린 목사의 요청을 받아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 교목(성경 교사)으로 가는 길이었다. 장공은 과감히 북간도를 선택했고, 이 목사는 이를 장공 신학의 위대한 ‘홀로서기’이자 자발적 단련의 시작으로 보았다”고 했다.
또한 “이러한 부단한 자기 노력이 있었기에 훗날 박정희 정권 초기 사회 전반을 정리하는 작업에서 종교계 대표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며 “김재준 목사는 한국에 ‘역사비평’을 소개한 선구자로만 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장공이 역사비평을 도입한 것은 성서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도구’로 여겼기 때문일 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장공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영적인 묵상’이 필수적이라 보았고, 그 결과 『십자군』 마지막 편에 역사비평과 정반대 노선에 서 있는 영적 부흥사 무디 선교사를 소개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날카로운 지성과 깊은 영성의 조화를 추구한 것”이라며 “북간도 시절 발행한 『십자군』 잡지에는 1930년대 일반 목회자들 사이에서 매우 드물었던 ‘교회 연합운동(에큐메니컬 운동)’을 강조하는 글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신학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 더불어 1937년 제26회 장로교 총회에 대한 장공의 날카로운 평론 역시 당시 교단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된다”고 했다.
이인배 목사는 성경의 자료비평적 관점을 장공의 글에 흥미롭게 적용시켰다. 이어 “장공의 초기 글들은 1930년대 『신학지남』과 북간도 『십자군』에 실린 후, 1940년 단행본 『낙수(落穗)』, 70세 기념 『김재준 저작전집』(5권), 그리고 1992년 출간된 18권짜리 『장공전집』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필사상의 실수뿐 아니라 ‘의도적인 수정’이 발견됐다. 대표적으로 1938년 『십자군』에 실린 「불멸의 동경」이라는 글은 1940년 『낙수』에도 실렸으나 두 글의 결말이 전혀 다르게 의도적으로 수정되어 있다”며 “이는 북간도 은진중학교 교사 시절과 서울 조선신학교 교수 시절이라는 지리적 상황 및 직위의 변화가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특히 이 목사는 현재 『장공전집』에 북간도 시절 『십자군』 글의 절반 이상(약 70% 이상)이 누락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다. 후대 편집자 그룹이 원출처인 『십자군』 대신 단행본 『낙수』를 저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라고 했다.
이 목사는 “장공의 초기 신학을 온전하게 복원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십자군』 원본 연구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함경북도 아오지라는 외부와 차단된 변방의 자연환경이 장공에게 ‘소외와 변방으로부터의 사유’라는 독특한 신학적 관점을 선물해 주었다고 평했다. 이는 훗날 박정희 정권에 맞선 민주화 저항 정신과 민중신학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부친을 통한 유교 경전 학습은 언어적 감수성과 도덕적 실학 정신을, 모친을 통해서는 신앙적 실천을 체득하게 했다”고 했다.
이 목사는 “이후 송창근 목사의 권유로 상경한 장공은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도서관에서 독서 생활을 하며 지적 토대를 쌓았고,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와 YMCA 강연을 통해 에큐메니컬적 신앙에 눈을 떴다. 프란체스코와 톨스토이의 청빈과 무소유를 몸으로 실천하려 애쓰던 그는, 다시 한 번 송창근 목사의 편지를 받고 100년 전인 1926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 아오야마에서 자유주의의 한계를 보고,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근본주의의 한계를 체험한 장공은 웨스턴 신학교에서 신정통주의를 심화 전개했다. 유학 졸업 무렵 한 선교사가 ‘너는 근본주의자냐 자유주의자냐’라고 던진 질문에 장공은 ‘나는 근본주의자도 아니고 자유주의자도 아니고, 살아계신 그리스도 주의자이다’라고 일갈하며, 교리와 사조에 종속되지 않는 주체적 신학을 선포했다”고 했다.
나아가 “이후 귀국한 장공은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수직을 과감히 사임하며 신앙적 양심을 지켰다”며 장공에 대해선 “역사비평과 영성을 결합하여 ▲성서를 성서답게, 실학적 현실 참여를 통해 ▲인간을 인간답게, 교권주의를 배격하고 연합을 추구하여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고자 한 비전”이라고 평가했다.
이 목사는 발표를 마무리하며 오늘날 즉각적인 성과와 대형화, 세속적 성공만을 다그치는 현대 목회 환경을 향해 강한 경종을 울렸다. 그는 “목회는 성공과 실패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완주와 포기로 구분하는 것이다. 조급함에 쫓겨 설익은 말씀으로 강단에 서거나 타인의 말을 앵무새처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말을 할 수 있는 강단을 지켜야 한다. 중심에 서지 못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를 단련해야 한다”며 “장공 김재준 목사가 추구했던 ‘진리를 파고드는 지성(학문)’과 ‘이웃을 위해 무릎 꿇는 영성(경건)’의 조화야말로 한신대학교의 교육 목표이자 오늘의 목회 현장 위기를 타개할 유일한 대안”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