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비밀 이야기가 있다. 그 비밀은 은밀한 자부심, 하나님과 나만 아는 은혜의 경험, 남모르는 수고를 한 후 얻은 값진 결과와 같이 긍정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남이 알 까봐 두려운 수치의 이야기, 고통의 이야기, 좌절의 이야기 또한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가능한 한 은폐시키고 드러내지 않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이 부끄러움의 이야기들이 감춰지도록, 보이고 평가되고 드러나는 모습을 강하게 만들고자 혹은 그렇게 보이고자 애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심리적 힘은 외적으로 보이는 그럴듯한 모습에의 과도한 집중에서가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고 숨겨진 부분과의 화해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것은 진정한 마음의 동력은 외적 치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바닥에 있는 갈등과의 직면, 그것과의 화해, 나아가 가능하다면 해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우회도로를 지나는 것 같은 지루함과 굳이 보고 싶지 않은 그림자와 같은 나의 부분을 직면하는 것의 부담이 있지만 진정한 힘은 감춰진 나의 모습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때 가능한 것이다. 마치 속으로 깊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병은 치료하지 않고, 짙은 화장으로 자신의 외적 모습만 꾸미려 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말이다.
내적가족체계(Internal Family System)에서는 이것을 추방된 자아 (Exiled part)와의 만남으로 이야기한다. 스스로 직면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의 지하실에 가두어 놓은 상처, 아픔 등은 틈만 나면 의식의 표면으로 나와 나 자신과 화해하고 치유받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적 자아, 외적인 자아는 가능한 좋은 모습만 보이고자 하므로 이 추방된 자아가 외적으로 등장할 때는 강력하게 무시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때로는 과도한 감정의 표현, 즉 지나치게 어색한 웃음으로 대처하거나, 부적절한 분노로 인간관계를 어렵게 하거나, 때로는 중독으로 자신의 진정한 고통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과도한 성취를 통한 사회의 인정을 통해 이 고통으로부터 회피하고자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추방된 자아는 마음의 바닥에 보낼수록 사라지고 조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기승을 부리며 우리를 괴롭히게 된다. 마치 감옥에 억울하게 갇힌 죄수가 나를 끌어내달라며 울부짖듯이, 추방된 나의 소중한 일부는 내 마음의 바닥에서 근원적인 힘을 점유하며 생산적인 곳에 에너지를 쓰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방해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가 에너지를 건강하게 쓰고 온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은폐를 위한 노력이 아니라, 화해를 위한 노력, 믿을 만한 이와 고통을 나누고 공감하고 수용되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이다.
상담은 그래서 자신의 수고와 노력을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심지어 나 자신도 외면했던 나의 일부와 침착하고 성실하게 만나는 은혜의 자리가 된다. 성경은 이를 예수님의 체휼과 은혜 안의 담대함으로 이야기한다(히브리서 4장 15,16절). 나만 겪었던, 혹은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통이 사실은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님이 이미 경험하셨던 일이며, 그리고 이미 십자가에서 이 고통을 완전하게 해결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담대히 당당하게 믿음으로 이 주님께 나아가 고통을 쏟아낼 수 있는 담력을 얻은 것이다.
교회공동체란 승리의 이야기가 공유되는 복된 경험의 장인 동시에, 고통의 이야기가 공감되고 들리는 치유의 장이 되어야 한다. 자랑거리만이 간증으로 공유되는 것이 아닌, 고통의 이야기가 공유되는 장이 되어야 한다. 비록 고통의 완전한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지금도 아픈 이와 함께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체휼과 은혜가 가장 큰 자랑이 되는 그런 공동체, 그래서 말함으로써 위로받는 공동체가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는 치유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갈수록 심각하게 물질적인 세상이 되는 것 같다. 온통 뉴스들이 외적인 소유를 강조하고 자랑하는 것에 급급한 시대, 자신의 소유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픔도 십자가 앞에서 자랑해 보자. 이것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믿음의 자세인 것이다.
#이경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