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의 실종으로 불행해지는 공산주의 사회

오피니언·칼럼
기고
안승오 교수(영남신학대학교 선교신학)

1. 사적 유물론의 함정과 보편 윤리의 해체

안승오 영남신대 선교신학 교수

인류의 정신사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인간 존엄성, 정직, 양심 같은 도덕적 보편성을 확립하려는 여정이었다.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문명을 지탱하는 불변의 가치로 숭상받던 윤리는 19세기 중반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앵겔스의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에 의해 전도되었다. 그들에게 도덕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특정 시대의 물질적 생산 양식과 계급 관계(하부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정신적 모사물(상부구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서 '초계급적 인간성'은 허구다. 물질적 토대가 의식을 결정하므로, 사회를 지배하는 규범은 생산수단을 독점한 지배 계급의 이익을 반영할 뿐이다. 따라서 근대 자본주의의 법률, 종교, 윤리는 보편 안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하고 불평등한 소유 질서를 영속화하기 위해 고안한 이데올로기적 가면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전제는 기성 도덕의 해체로 이어졌다. 마르크스와 앵겔스는 역사적 진보가 도덕적 설득이 아닌 격렬한 계급투쟁과 폭력 혁명으로 성취된다고 믿었다. 이 관점에서 기독교적 인도주의나 칸트식 의무론은 피지배 계급의 혁명 동력을 마비시키는 마약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도덕을 타파하겠다는 기획은 인류가 축적한 최소한의 상호 신뢰와 인간 존중이라는 윤리적 둑을 무너뜨렸다. 보편 윤리가 사라진 빈자리는 오직 혁명의 승리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단적인 '도구주의 윤리'가 채우게 되었다.

2. 계급 도덕론과 절대적 가치의 붕괴

마르크스와 앵겔스는 《공산당 선언》(1848)에서 자본주의 내의 '재산권 신성'이나 '계약의 신의' 같은 덕목들이 무산 계급의 노동력을 합법적으로 탈취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폭로했다. 앵겔스는 《반뒤링론》(1878)을 통해 도덕의 계급적 귀속성을 더욱 체계화했다. 그는 불변의 도덕률을 부정하며, 지금까지의 도덕은 언제나 지배 계급의 이익을 정당화하거나 피지배 계급의 반발을 대변한 '계급 도덕'이었다고 단언했다.

이 논리에 따라 계급 사회의 모든 가치는 오염된 것이며, 혁명 세력은 구체제의 윤리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도덕적 해방감이 싹텄다. 그러나 이 이론은 치명적인 맹점을 가졌다. 위선 고발에 치중한 나머지, 혁명 이후 사회를 규율할 새로운 윤리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사적 유물론이 도덕을 경제적 이해관계의 종속물로 환원하면서, 인간은 도덕적 선택을 내리는 자율적 주체성을 상실했다.

양심과 선 자체에 대한 성찰이 배제되자, 프롤레타리아 도덕의 준거점은 '계급적 유용성'으로 귀결되었다. 자본주의 타도에 도움이 되면 '선', 가로막으면 '악'이라는 이분법 하에 사기, 약속 파기, 인명 살상 등 보편적 악행들이 '역사적 필연성'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얻는 파멸적 경로가 열렸다.

3. 레닌주의와 윤리의 수단화: 도덕의 당파성

이 철학적 기초를 현실 정치의 잔혹한 행동 지침으로 변각시킨 인물이 블라디미르 레닌이다. 레닌은 혁명을 권력 쟁취를 위한 물리적 전쟁으로 보았고, 부르주아적 도덕관념을 가장 먼저 척결해야 할 망상으로 취급했다. 1920년 공산청년동맹 연설에서 레닌은 신의 계율에서 도출되는 초계급적 도덕을 사기로 규정하며, "우리의 도덕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 이익에 전적으로 복종한다"고 선언했다.

이 '도덕의 당파성(Partiinost)' 선언은 공산주의 역사에서 윤리의 실종을 공식화한 이정표였다. 당의 목적과 혁명에 부합하면 어떤 반인륜적 행위도 성스러운 의무가 되었고, 방해가 되면 고결한 인도주의도 반혁명 범죄가 되었다. 이 논리는 볼셰비키 체제 하에서 잔혹한 국가 테러를 정당화했다. 비밀경찰 체카(Cheka)의 수장 제르진스키는 "당을 지키기 위한 잔혹함은 가장 높은 수준의 프롤레타리아 도덕성"이라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반대파 숙청, 농민 곡물 수탈, 차르 가문 학살 과정에서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으며, 오히려 혁명을 위해 도덕적 죄책감을 초극해 낸 영웅이라 자찬했다. 적을 기만하기 위한 불법, 은폐, 거짓말은 정권의 생존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4. 카우츠키-트로츠키 논쟁과 도덕적 제어 장치의 상실

윤리가 혁명의 도구로 전락하자 사회주의 내부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제2인터내셔널의 카를 카우츠키는 《테러리즘과 공산주의》(1919)를 통해 볼셰비키의 붉은 테러를 비판했다. 그는 인간 생명의 신성함과 민주적 가치는 혁명 과정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문명적 성취이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야만적 도구주의는 결국 세우려는 사회 자체를 오염시킬 것이라 경고했다.

반면 레온 트로츠키는 동명의 저서(1920)로 카우츠키를 '부르주아적 도덕주의자'라 맹비난했다. 내전이라는 전대미문의 계급전쟁에서 도덕적 순결을 따지는 것은 자살행위이며, 오직 혁명의 승리에 기여하는가만이 수단의 평가 기준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지적 정당화는 부메랑이 되었다. 도덕적 제어 장치가 사라진 권력 투쟁 속에서, 그가 정립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논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그대로 상속되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축출하고 숙청하는 과정에서 그 도구주의적 폭력과 기만술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용했다. 보편적 양심을 부정했던 혁명가들이 자신들이 만든 도덕적 진공지대에서 서로를 도살하는 파국을 맞이한 것이다.

5. 상실된 윤리의 유산과 전체주의적 귀결

부르주아 도덕을 타파하겠다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험은 인간성을 전면 부정하는 윤리적 진공상태를 낳았다. 정직, 신의, 생명 존중은 '부르주아적 잔재'로 낙인찍혀 파괴되었고, 인간의 양심이 당에 종속되면서 이웃을 고발하고 동지를 배신하는 행위가 '혁명적 영웅주의'로 찬양받는 가치 전도가 일어났다.

이러한 '윤리의 실종'은 일시적 부작용이 아니라, 체제 유지를 위해 거짓을 제도화한 모든 전체주의 국가의 핵심 DNA였다. 이 비극적 유산은 소련의 대숙청을 거쳐 오늘날 북한의 수령제 사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북한 정권이 전 인민을 감시체계에 가두고, '자유'와 '인권'의 본뜻을 뒤집어 유통하며, 상호 감시를 애국으로 포장하는 구조적 기만의 뿌리는 "혁명에 이로운 것만이 도덕"이라며 보편적 양심을 내다 버린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닿아 있다. 이 도덕관의 본질을 간과한 채 북한을 순진한 도덕적 관념으로만 바라본다면, 대한민국 역시 역사의 파멸적 기만 뒤에 숨은 거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바라보며, 선거에서 이기고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변칙과 악행도 서슴지 않는 공산주의적 '도구주의 윤리'의 망령이 여전히 우리 곁에 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우려를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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