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로 증명할 수 없는 부르심: 목회자 훈련 지표가 놓치고 있는 것들

비자예시 랄 목사. ©x.com/vijayeshl?lang=hu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비자예시 랄 목사의 기고글인 ‘기독교 지도자 훈련에서 중요한 것은 ‘측정’이 아니라 ‘형성’이다’(When it comes to Christian leader training, measurement must not replace formation)를 6월 1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비자예시 랄 목사는 인도 복음주의 펠로우십(EFI)의 사무총장으로 재직 중이며 인도 내외에서 교육, 사회경제적 발전, 옹호 및 연구 이니셔티브에 깊이 관여해 왔다. 또한, 인도의 EFI 출판사 Trust에서 발행하는 월간 잡지 AIM의 편집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몇 해 전 나누었던 어떤 대화가 아직도 필자의 마음에 깊이 남아 있다. 인도 북부의 한 주에서 20년 넘게 같은 농촌 마을을 섬겨온 어느 원로 목사님은 자신이 받은 훈련에 대해 아주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는 신학교에 다닌 적도 없었고, 벽에 걸어둘 번듯한 수료증 하나 없었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곤 사역의 초기 시절을 함께 걸어준 멘토 한 사람, 극심한 가뭄과 고난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그를 굳게 신뢰해 준 지역 공동체, 그리고 진실한 대가를 치르며 쌓아온 수십 년간의 눈물의 기도가 전부였다.

필자는 수년간 인도 전역의 다양한 지역에서 목회자들과 교회, 사역 네트워크, 신학교들을 지켜봐 왔다. 일반적인 공식 기준표를 들이밀면 이 목사님은 '훈련받은 사람' 축에 끼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중요한' 거의 모든 기준에서, 그는 필자가 만나본 가장 잘 준비된 참된 목자 중 한 명이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불거진 '목회자 훈련의 격차(pastoral training gap)'를 측정하려는 논의들이 활발해지면서, 필자는 다시금 그 목사님을 떠올리게 되었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교회가 성장하는 속도를 리더들이 양육되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의 이면에 있는 염려는 진심이며,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바람 역시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이런 논의들 속에서 무언가 필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지점이 있었고, 그것을 명확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 깊은 위험은 우리가 목회자 훈련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하는' 데 있지 않다. 진짜 위험은 우리가 측정에 성공하게 되고, 그 성공에 취해 은연중에 '측정 자체'가 진정한 '영적 형성(formation)'이라는 본래의 목표를 대체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오늘날 글로벌 목회자 훈련에 관한 논의는 점점 더 숫자로 세고, 분류하고, 보고할 수 있는 것들에 보상을 주는 논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공식적인 자격증은 문서화할 수 있다. 세미나 참석 횟수는 기록할 수 있다. 수료증은 숫자로 셀 수 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중요하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신실한 목자를 빚어내는 요소의 전부는 결코 아니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아마도 전 세계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목회자는 단순한 수치화에 저항하는 삶의 실제적인 현실들을 통해 빚어지기 때문이다. 무거운 책임감이 그들을 빚어낸다. 실패가 그들을 빚어낸다. 고난이 그들을 빚어낸다. 기도가 그들을 빚어낸다. 때로는 핍박이 그들을 빚어내기도 한다.

어떤 목회자는 온갖 훈련 프로그램에 참석하며 화려한 이력을 쌓을지라도 여전히 미성숙하고, 교만하며, 목회적 깊이가 얕거나 도덕적으로 타협할 수 있다. 반면 어떤 목회자는 공식적인 기관의 자격증 하나 없어도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 안에서 깊은 신뢰를 받고, 성경에 굳게 뿌리내리며,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

이 둘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이 둘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모든 평가 프레임워크는 이미 본질적인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훈련 생태계 자체에 대해 거의 묻지 않는, 더 뼈아픈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한다. 인도의 많은 지역에서 문제는 세미나, 워크숍, 콘퍼런스, 훈련 프로그램의 '부족'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차고 넘친다.

우리가 던져야 할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이러한 생태계가 실제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목회자들을 올바르게 빚어내고 있는가, 아니면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 필자는 이 질문이 현장에서 충분히 다루어지고 있는지 깊은 의문이 든다.

필자는 일부 환경에서 이른바 '직업적 훈련생 문화(professional trainee culture)'라 부를 수밖에 없는 기현상이 발달하는 것을 목격했다. 목회자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역에 더 깊이 뿌리내리고, 더 책임감을 가지며, 더 신실해지려는 치열함 없이 그저 자신을 드러내고 이력을 쌓기 위해 이 행사에서 저 행사로 옮겨 다니는 것이다. 훈련 프로그램에 많이 노출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깊은 내적 형성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겉보기에 화려한 훈련이 진정한 영적 성장을 '대체'해 버리기도 한다.

외부에서 주도하는 일부 훈련 시스템들은 입에 담기조차 힘든 방식으로 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어떤 곳에서는 훈련 문화 자체가 매우 '거래적(transactional)'으로 변질되었다. 절대다수가 가난한 목회자들인데, 이들은 외부 자금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들에서 교통비와 숙박비는 물론이고 참석 수당으로 현금까지 지급하는 것에 길들어 버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참석' 자체에 일종의 단가가 매겨졌다. 많은 목회 현장의 경제적 취약성을 고려하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영혼을 깊이 병들게 하는 일이다. 진정한 내적 형성이 단순한 행사 참석과 혼동되고, 가난한 목회자들이 스스로 만들지도 않았고 쉽게 벗어날 수도 없는 이 얄팍한 '참석 경제'에 의해 참된 목회적 성장이 오히려 무너져 내리고 만 것이다.

더 깊은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신학교들은 신실한 리더들을 길러냈고, 멘토링 프로그램들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체계적인 훈련은 최선의 형태로 교회를 진실하게 섬겨왔다. 여기서 쟁점은 '체계(structure)'가 중요한지 아닌지가 아니다. 진짜 쟁점은 '체계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는가이다.

오늘날 교회는 은연중에 '투자 문화의 논리'를 수용하는 치명적인 위험에 처해 있다. 목회자가 실제로 빚어지는 그 느리고 진실한 현실보다는, 눈에 보이는 가시성, 확장성, 측정 가능한 결과, 눈에 띄는 투자 수익률 등을 통해 사역이 평가받는 문화 말이다.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을 받는 대상은 '목회자를 얼마나 깊이 빚어내는가'가 아니라 '후원자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수치로 보여줄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곤 한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패턴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필요가 파악되면, 범주가 표준화되고, 평가 지표가 만들어진다. 사람들을 동원하고 훈련 기관들은 우후죽순 늘어난다. 보고서들은 엄청난 발전이 있는 것처럼 포장한다. 그러나 목회자가 빚어지는 본질적이고 깊은 내면의 현실은 사실상 거의 변하지 않은 채로 남게 된다.

글로벌 후원 구조는 개척한 교회 수, 훈련받은 리더 수, 발급된 수료증 수와 같은 '규모의 언어'에 보상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더 조용하고, 더 느리며, 더 큰 책임감이 따르는 내면적인 목회자 양성 과정은 제도적으로 철저히 외면당한다. 그 과정이 덜 효과적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서류상으로 남길 화려한 실적이 적기 때문이다.

개척한 교회나 훈련된 리더의 수에 대한 거창한 주장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엄격한 검증을 피하기 일쑤인데, 왜냐하면 부풀려진 숫자표가 결국은 관련된 많은 이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는 가장 신실한 목회자들 중 상당수는 이러한 평가 시스템의 틀 안에는 그 이름조차 올리지 못할 것이다. 고난, 기도, 공동체의 신뢰, 관계적 권위, 도제식 양육, 구전을 통한 형성, 압박 속에서도 묵묵히 버텨낸 오랜 사역의 세월 등 그들을 빚어낸 핵심적인 요소들은 측정 가능한 지표 안에 깔끔하게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목회자는 제도적 시스템의 눈에는 띄지 않으면서도 깊이 빚어져 영적으로 큰 신뢰를 받을 수 있다. 반면, 고도로 가시화된 훈련 생태계는 그럴싸한 보고용 수치들은 기가 막히게 뽑아내면서도, 정작 장기적으로는 얄팍한 영성만을 길러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 훈련의 격차를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현장의 필요는 실재하며,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할 가치가 충분하다. 다만, 평가 지표를 설계하는 이들은 '측정할 수 있는 것'과 '결코 측정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반드시 겸손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목회자는 관계적이고, 영적이며, 상황적이고, '느린' 삶의 현실들을 통해 빚어진다. ◆끝까지 곁에 머물러주는 멘토를 통해 ◆목회자가 바른길을 걷도록 책임져주는 공동체를 통해 ◆신학적인 뼈대를 가지고 묵묵히 견뎌내는 고난을 통해 ◆강단에서 설교하기 전 삶에서 먼저 실천해 내는 기도를 통해 ◆단순히 입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풀무불에서 검증된 부르심을 통해 빚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격려하고 가꿀 수 있다. 비록 수치화하고 측정하기는 어려울지라도 말이다. 글로벌 지표가 요구하는 객관적 범주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소중한 것들이 우리 시야에서 조용히 사라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위험은 수많은 목회자가 훈련받지 못한 상태로 방치되는 것에만 있지 않다. 더 큰 위험은 눈에 띄는 활동, 인상적인 보고서, 후원자들의 신뢰를 얻어내는 시스템을 구축하느라, 정작 신실한 목자를 빚어내는 가장 느리고, 가장 많은 대가가 요구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과정들을 점차 약화시켜 버리는 데 있다.

앞서 언급한 인도 북부에서 만난 그 늙은 목자에게는 그 어떤 평가 지표에도 내세울 만한 수치나 증명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훨씬 더 좋은 것이 있었다. 자신을 굳게 믿어주는 공동체,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사역, 그리고 오랜 시간 온갖 풍파 속에서도 굳건히 연단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다.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양성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목회자가 아니던가. 우리는 이런 참된 목회자들을 찾아내는 것을 외려 방해하는, 껍데기뿐인 시스템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뼈아프게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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