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의 기고글인 '상처 입은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원하셨다”고 말할 때 생기는 문제’(The harm in telling trauma survivors God needed their suffering)를 5월 3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주콜로토 박사는 전직 목사이자 임상 심리학자이며 35년 동안 병원, 중독 치료 센터, 외래 진료소 및 개인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심리학자로 일하면서, 필자는 납치, 강간, 학대, 참전, 그리고 반복적인 폭력을 겪은 수많은 생존자들과 마주 앉아왔다. 선의를 가진 기독교인들은 종종 위로의 마음을 담아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고난만 주십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많은 생존자들에게 이 말은 마치 그들이 겪은 끔찍한 트라우마 자체가 그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부러 배정하신 일처럼 들릴 수 있다. 이는 위로를 주기는커녕,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들이 당한 악행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
필자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복음 역시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필자는 고통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전에는 가닿을 수 없었던 현실의 깊이, 하나님의 깊이, 그리고 자기 자신의 깊은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고통이 그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평소에 치고 있던 '방어막'이 마침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주장이다. 그리고 이를 혼동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상처를 입힌다.
우리 대부분은 수면 아래 조용히 작동하는 무비판적인 전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나는 내 삶을 통제할 수 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안전하다', '내가 충분히 강해지면 그 무엇도 나를 진정으로 해칠 수 없다'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전제들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너무도 편안해서 우리는 굳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무언가 금이 가기 전까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물의 뼈대처럼, 그저 배경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트라우마는 바로 그 뼈대에 금을 낸다. 종종 아주 폭력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갈라진 틈 사이로, 늘 진실이었지만 그동안 감춰져 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의존성, 자급자족의 한계, 그리고 든든한 기반이라고 착각했던 환상의 얄팍함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늘(always)'이다. 이러한 진실들은 트라우마 이전에도 그곳에 존재했다.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굳이 트라우마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고통이 한 일은, 그리고 고통이 항상 하는 일은, 우리가 그러한 진실들을 회피할 수 있게 해주었던 '일상'이라는 이름의 이상적인 껍데기를 벗겨내는 것뿐이다. 전도서 7장 2절은 이를 미화하지 않고 똑같이 통찰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은 상황을 명확하게 해 준다. 이것은 슬픔을 옹호하는 주장이 아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슬픔이 찾아왔을 때, 그 슬픔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솔직한 설명일 뿐이다.
예수님의 '두 집 짓는 비유'가 이 지점에서 매우 유용하며, 또 종종 오독되기도 한다. 폭풍은 모래 위에 지은 집에 약점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했던 약점을 '드러낸' 것이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마태복음 7:25). 폭풍이 핵심이 아니다. 기반이 핵심이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폭풍이 필요하지 않다. 반석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생존자들에게 저지르는 목회적 실수다. 무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 그 트라우마가 '필요했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트라우마는 필요하지 않았다. 트라우마가 폭로한 진실들은 언제든 접근 가능한 것들이었다. 굳이 끔찍한 피해자가 되지 않고서도, 진실한 기도를 통해, 정직한 공동체를 통해, 혹은 새벽 2시에 시편을 읽으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할 수 있다. 산산조각 나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충분하심을 만날 수 있다. 폭풍은 단지 그것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을 뿐이다.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 곧 그 폭풍 자체가 구원적(redemptive)이라는 뜻은 아니다.
시편은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시편 42편과 88편에 나타난 다윗의 애가는 고난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날것 그대로의, 전혀 무방비한 상태의 토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는가"라는 탄식은 고난이 유익하다고 여긴 사람의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은 자신의 내면을 포장하고 통제하기를 포기하고, 그 감정을 여과 없이 하나님 앞에 쏟아놓은 사람의 것이다. 그 시편들을 진정한 '만남'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무방비함이다.
일각의 기독교 사상에서는 하나님이 거룩함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통을 주도하신다고, 즉 강간이나 학대나 폭력이 어둡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떤 목적을 지닌 거룩한 훈련(divine formation)의 도구라고 암시하곤 한다. 고통과 주권에 관한 문제는 신학적으로 치열한 쟁점이기에, 필자는 이 부분에서 명확을 기하고자 한다. 개혁주의 전통은 하나님의 주권적 지식과 목적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다고 올바르게 가르친다.
사도행전 2장 23절은 십자가 처형마저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일어났다고 말한다. 필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반대하는 것은, 악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이 그 악을 필수적인 것으로 '각본을 짜셨다'는 주장을 교묘하게 섞어버리는 목회적 해석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주장이며, 후자는 정통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상처 입은 이들에게 해를 끼치고 하나님의 성품에 신학적 폭력을 가하는 섭리에 대한 왜곡일 뿐이다.
정통 기독교의 주장은 이와 다르다. 하나님은 낭비하지 않으신다(God does not waste). 이것은 하나님이 악을 필요로 하신다는 말과는 다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일으키지 않으셨고 실질적인 피해를 초래하는 진짜 현실인 '악'이 결국 최종적인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악 자체를 필요불가결하거나 선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시고도, 악에도 불구하고, 악의 한가운데서, 그리고 악이 지나간 후에도 역사하실 수 있다.
십자가 처형이 바로 그 패러다임이며, 우리는 이를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학에서 결코 부수적인 사건이 아니다. 이사야 53장 10절과 속죄의 전체 논리는 십자가에서 무언가 결정적이고 반복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한다. 필자는 십자가가 우연이라거나 단순한 비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악행은 '진짜 악행'이었지, 거룩한 교육 과정을 위해 무대 위에 연출된 소품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들이 저지른 짓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최종 결말이 되도록 내버려 두기를 거부하시는 것이었다.
부활은 십자가 처형을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악이 마지막 줄을 쓰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단호한 거부다. 악은 진짜 현실이었다. 고통과 피해도 현실이었다. 구원은 그 악을 '통과해야만 하는 필수 조건'으로 삼아 찾아온 것이 아니라, 그 악'에도 불구하고' 찾아왔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시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진실을 보여준다. 그분은 안전한 거리에서 고난을 설계(engineering)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으로 직접 들어오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별은 목회적 돌봄에서 엄청나게 중요하다. 우리가 생존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려고 이 일을 사용하셨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제아무리 부드럽게 포장하더라도 그 학대의 주체(authorship)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강간한 자나 학대한 자를 하나님의 커리큘럼에 쓰이는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다. 위로의 탈을 쓴 신학적 오류이며, 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산산조각 낼 수 있는 위험한 말이다.
우리가 진실하게 건넬 수 있는 위로는 따로 있다. "당신에게 일어난 일은 끔찍한 악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그런 일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통 한가운데에 당신을 버려두지 않으셨고, 그분의 구원하시는 손길은 바로 이 자리에까지 뻗어 있습니다. 그 악이 유용해서가 아니라, 악이 결코 마지막 결말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4절의 바울의 선언이 이 문맥에서 자주 인용된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바울이 '하지 않은' 말에 주목하라. 그는 위로가 존재하기 위해 환난이 '필요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환난 중에 받은 위로가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상처가 긍휼의 능력을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그렇게 한다. 상처는 그 위로가 도착한 상황적 배경일 뿐이다.
로마서 5장 3-4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바울은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룬다고 진솔하게 말한다. 필자는 이 말씀을 깊이 신뢰한다. 그러나 바울은 거룩함에 이르는 수단으로 고난을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무엇을 이끌어내실 수 있는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것을 구속(redeem)하시는 하나님과, 악한 것을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는 신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심리학적으로도 중요하다.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에 관한 연구들은 많은 생존자들이 고통을 겪은 후 타인에 대한 연민이 커지고, 신앙이 깊어지며,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명확성이 더해졌다고 보고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필자 역시 이를 목격했다. 그러나 연구는 트라우마 '이후에(following)' 일어나는 성장과 트라우마 '때문에만(because of)' 일어날 수 있었던 성장을 신중하게 구별한다. 사실상 모든 경우에서, 성장은 트라우마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사람이 의지한 인간적이고 영적인 자원들, 공동체, 기도, 의미 부여, 하나님의 임재에서 비롯된다. 트라우마는 맥락(context)이었지 원인(cause)이 아니었다. 변화된 모습으로 일어선 생존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파괴하려 했던 끔찍한 폭력 앞에서도 기어코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다. 이것은 '구속적 고난(redemptive suffering)'의 신학이 아니라, '회복 탄력성과 은혜(resilience and grace)'의 신학이다.
십자가가 악의 존재 이유를 완벽히 설명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악에 어떻게 반응하시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준다. 십자가는 악을 정당화하거나 선하다고 포장하지 않는다. 십자가 처형은 여전히 끔찍한 배신이었고, 고문이었으며, 불의였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에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그 속으로 친히 들어오심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인간 경험의 가장 어둡고 처참한 곳에 깃발을 꽂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바로 이곳에도 내가 함께한다. 심지어 이것조차 너의 끝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존자들이 가장 간절히 들어야 할 진실이다. 하나님이 그 폭풍을 보내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거센 폭풍의 한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서 계신다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