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신학자이자 사회운동가 도로테 죌레(Dorothee Sölle)의 대표작 『고난』이 출간 50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신학서로 주목받고 있다. 1973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통과하며 형성된 죌레의 정치신학 사상을 집약한 저작으로, 인간의 고통과 사회적 불의에 대한 신학적 응답을 모색한다.
저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신학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강조한다. 죌레는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억압과 폭력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신앙이 사회적 책임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특히 1968년 ‘정치적 밤 기도회’를 통해 반전 평화 운동을 전개했던 그의 행보는 신학이 단순한 학문적 논의를 넘어 실천적 삶의 방향을 제시해야 함을 보여준다.
『고난』은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이 고통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십자가 위에서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는 예수의 절규는 인간의 고통과 하나님의 연대가 만나는 자리로 해석된다. 저자는 이러한 신앙의 전통 속에서 고난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적·역사적 차원에서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은 고난의 의미를 단순히 인내나 순응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비판하며, 불의한 현실을 정당화하는 종교적 논리를 경계한다. 저자는 고난을 회피하거나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일 수 있음을 지적하며,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할 책임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고난을 개인의 내면적 경험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연대와 변화를 향한 동력으로 이해하도록 이끈다.
특히 이 책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문명사회에서 대규모 폭력이 가능했는지, 인간은 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는지, 그리고 신앙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깊이 탐구한다. 독일 사회가 경험한 전쟁의 상처와 회개의 과정은 인간의 죄성과 동시에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된다.
죌레는 고난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조건 중 하나로 ‘언어’를 제시한다. 고통을 말할 수 있는 언어, 희망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신학이 단순한 교리 체계를 넘어 인간 경험을 해석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함을 보여준다. 고난의 경험은 인간을 고립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점도 강조된다.
또한 저자는 신앙이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깊이 사랑하도록 이끄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조건적 선택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책임지는 태도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신앙을 개인의 위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사회적 실천으로 확장하도록 요청한다.
『고난』은 신학적 사유와 사회적 책임을 결합한 정치신학의 대표적 저작으로 평가된다. 고난을 단순히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려 하기보다, 고난의 현실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묻는 이 책은 오늘의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출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고난』이 다시 읽혀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전쟁과 폭력, 불평등이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 이 책은 신앙이 무엇을 기억해야 하며 어떤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신앙,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말하려는 신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책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