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을 둘러싼 두 극단의 오류: 언약의 큰 그림을 놓치지 말라

미칼레 올슨 작가.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미칼레 올슨 작가의 기고글인 ‘양극단의 위험: 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잘못된 두 시선’(The two ditches: Why both Christian extremes are wrong about Israel)을 최근 게재했다.

올슨 작가는 The Federalist의 기고자이자 Not the Bee의 작가로, 기독교 신학과 보수 정치에 대한 해설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오늘날 보수적 기독교 온라인 공간을 조금만 살펴보면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분위기를 쉽게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두 극단, 마치 길 양쪽에 파인 두 개의 깊은 도랑과 같다.

한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라”고 말씀하셨으니 논쟁은 끝났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혹은 기독교 국가라면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모든 면에서 지지해야 하며,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자원과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조금이라도 주저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라는 논리다.

다른 한쪽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약속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언약은 끝났고, 민족적 이스라엘은 더 이상 신학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유대인 자체를 문제로 간주하거나, 역사적으로 극단적인 반유대주의까지 정당화하려는 태도도 나타난다. 이들 역시 자신들이 성경적 언약 신학을 적용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두 입장 모두 성경을 인용한다. 그것도 매우 많이 인용한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 부분적인 이야기만 말할 뿐, 전체 이야기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전체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는 갈대아 우르에 살던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우상 숭배의 삶에서 불러내시며 약속하신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것은 특정 민족에 대한 단순한 편애가 아니라,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죄에 빠지고 바벨 사건으로 흩어진 이후 시작된 구속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약속은 점점 좁혀진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네 자손이라 불릴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하셨다. 이삭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형이 아우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약속의 계보는 야곱에게로 이어지고, 다시 유다에게로, 그리고 다윗에게로 이어진다. 마치 가느다란 실처럼 이어진 약속의 흐름은 때로는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희미해 보이기도 했다.

바로가 사라를 취했을 때 하나님은 큰 재앙을 내리셨고,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려 했을 때 하나님은 꿈을 통해 경고하셨다. 왜 이렇게까지 엄중하게 개입하셨을까? 그 계보가 끊어지면 약속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약속이 무너지면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죄의 저주 아래 인류는 그대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수 세기가 흐른 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가 되었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내 언약을 기억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재앙이 다시 내려지고 바다가 갈라지며 한 민족이 탄생했다. 언약은 여전히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을 도덕적으로 완전한 민족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광야에서 불평했고 금송아지를 섬겼으며 왕을 요구했고 나라가 분열되었으며 끊임없이 우상숭배에 빠졌다. 선지자들은 경고했지만 많은 경우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였다. 앗수르가 침략했고 바벨론이 침략했고 결국 포로기가 찾아왔다. 구약을 정직하게 읽는다면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보게 된다.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백성이었지만 동시에 완고한 백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베들레헴에서 한 유대인 아이가 태어났다. 마태복음은 족보로 시작하며 그 계보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까지 연결됨을 보여 준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그 자손은 곧 그리스도라.” 약속의 실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 자손은 단순한 민족이 아니라 한 인격이셨다.

이제 약속은 온 세상으로 확장된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메시아는 사도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셨다. 이방인들도 접붙임을 받았고, 모든 민족 가운데서 죄인들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메시아가 오셨다면 왜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버리신 것인가?

로마서 9장부터 11장에서 바울은 눈물로 이 질문에 답한다. 그는 육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을 향해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들을 조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구원마저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깊이 슬퍼한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특권들을 언급한다.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이 그들에게 속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중요한 선언을 한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민족적 혈통만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선택하시는 은혜를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민족적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셨다는 생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남은 자가 있으며 동시에 부분적인 완고함이 있을 뿐이다. 완전한 거절도 아니고 영원한 거절도 아니다. 그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경고한다.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그리고 이렇게 선언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더 나아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한다.

이것이 전체 이야기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언약이 이스라엘을 거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여전히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미래에도 이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제 이 이야기를 오늘의 상황에 적용해 보자.

첫 번째 극단은 창세기 12장의 말씀을 현대 정치에 그대로 적용한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한다”는 말씀을 21세기 국가 정책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 명령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본래 이 약속은 메시아의 계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구속사의 흐름 속에 있었다. 이 말씀을 현대 국가의 모든 정책을 자동으로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성경을 구속사의 맥락에서 떼어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존재 권리를 지지할 수 있다. 유대 국가가 안전과 주권을 가질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믿을 수 있다. 테러와 반유대주의에 분명히 반대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한 일이다. 정치적 의미에서 스스로를 시온주의자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대 이스라엘 정부의 모든 정책과 모든 군사 행동과 모든 정치적 선택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모든 결정을 무조건 옳다고 선언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두 번째 극단은 더욱 위험하다. 그리스도께서 언약을 성취하셨다는 진리를 왜곡하여 유대인에 대한 경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약속은 이제 영적인 것일 뿐 민족적 이스라엘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심지어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이 겪은 고통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까지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로마서 11장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유대인들을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받는 자”라고 말한다.

언약 신학을 따르면서도 바울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약속의 땅이 궁극적으로 새 창조 안에서 성취된다고 믿으면서도 많은 유대인들이 장차 그리스도께 돌아올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인을 향한 교만과 증오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실천적인 신학적 태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이야기가 1948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또한 이 이야기가 특정 국가의 정치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서 시작되어 결국 유대인 메시아께서 로마의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신 사건으로 이어진 이야기다.

그것은 반유대주의가 분명히 잘못된 죄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복음이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 전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현대 정치 문제를 다룰 때에도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신중함과 균형을 유지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겸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계보를 지키셨고, 포로기 속에서도 약속을 지키셨으며,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계획을 이루셨다. 그리고 동일한 자비로 이방인들도 접붙이셨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푸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면, 기독교인들이 그들에 대해 마음을 완고하게 가져서는 안 된다.

전체 이야기를 보게 되면 두 극단의 매력은 사라진다. 언약은 특정 집단의 자부심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 가운데서 구속받은 한 가족을 모으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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