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내가 예수 믿고 천국 백성 된 사실이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일인지를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그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예정하심 때문이요, 둘째 이유는 신앙의 부모님을 잘 만난 덕이요, 셋째 이유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의 수고 때문이다. 무엇보다 열악한 남의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거나 세상을 떠난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깊은 감사가 크게 터져 나왔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해외 개신교 선교사는 약 2,5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언더우드나 아펜셀러와 같이 누구나가 다 기억하는 분들도 있지만, 한 번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선교사들이 대부분이다. 그중 천국에 가면 꼭 만나고 싶은 선교사가 한 분 있다. 그의 이름은 ‘루비 켄드릭’이다. 이분은 1883년 1월, 미국 텍사스주에서 태어나, 1907년 9월 말 조선으로 파송되어 황해도 개성에서 사역한 여자 선교사이다.
내 막내아들 또래의 24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여선교사는 조선에 와서 본격적인 사역을 위해 한글을 배우며, 개성 지역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영어를 가르치며 아픈 아이들을 돌보는 등 활발하게 사역하여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열정 가득한 루비 선교사는 어느 날 자기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감지하였지만,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국인 여학생들의 병간호를 도와주다가 쓰러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급성 맹장염으로 판명되어 급히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1908년 6월 19일 숨을 거두었다. 이때 루비 선교사의 나이 스물다섯, 한국에 도착한 지, 8개월 20여 일 만이었다. 살아갈 날이 한창인 때에, 많은 젊은이 중에서 해외 선교 자원자로 선발되어 그 많은 선교사 훈련을 마치고, 선교사역에 막 꽃을 피우려는데 생을 마감한 것이다.
“What a waste!” “이 무슨 낭비란 말인가!”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리려고 헌신하였지만, 원하였던 조선 땅을 밟은 지 9개월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난 루비 켄드릭 선교사는,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지 못하여 일찍 죽음으로 생명과 시간을 낭비한 것처럼 보인다. 그녀를 파송한 남 감리교 선교부로서는 어렵게 선발하고 훈련시켜 재정적인 후원까지 하여 보낸 선교사가 소기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으니,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천국에 간 그녀는 하나님께 책망받았을까? 그녀가 고향에 있는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보낸 다음의 편지 내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편지를 소개한다.
“어머니, 아버지! 이곳 조선 땅에 오기 전 집 뜰에 심었던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루 종일 집 생각만 했습니다. 욕심쟁이 수지가 그 씨앗을 받아 동네 사람에게 나누어 주다니, 너무나 대견스럽군요.
어머니, 아버지! 이곳 조선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십 년이 지나면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킬로미터를 맨발로 걸어오는 어린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예수님을 영접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서너 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선교본부에서는 철수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순교할 작정인가 봅니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 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으로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하겠죠?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겠죠. 저는 이곳의 작은 씨앗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씨앗이 돼 이 땅에 묻히게 됐을 때 조선 땅에는 많은 꽃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이것은 조선에 대한 제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선을 향해 가지신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루비 켄드릭 선교사는 이 편지를 보낸 2주 후에 급성 맹장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그녀에게 주신 달란트를 전부 끝까지 사용하게 하셨다. 그녀는 죽음에 임박하여 그녀를 파송한 텍사스 엡윗의 청년회 회원들에게 이렇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만약 제가 죽거든 텍사스 엡윗의 청년회 회원들에게 10명씩, 20명씩 그리고 50명씩 한국에 오라고 말씀해 주세요”라고.
그녀의 죽음이 텍사스 고향에 알려지자 그들은 큰 충격에 빠졌지만, 곧 그녀의 유언을 따라 선교사들을 모집하였는데, 37명의 청년 선교사가 지원한 가운데 1909년에 6명의 여자 선교사가 한국을 자원했고, 그해 11월까지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해외 선교에 헌신했다. 그 가운데 여러 사람이 한국으로 달려와 루비 켄드릭의 뒤를 이어 사역했다.
루비 켄드릭 선교사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 그녀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If I have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만일 내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일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조선에 다 줄 것입니다.”
비록 길게 살진 못했으나 조선을 향한 그녀의 열정과 사랑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넘치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환갑이 넘은 나는 스물다섯 살의 젊은 처녀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었는지 깊이 반성해 본다.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