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의 진짜 의미: 변화로 이끄는 복음의 능력

엘리자베스 맥컬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엘리자베스 맥컬리의 기고글인 ‘오늘날 우리에게는 1970년대 예수 운동이 다시 필요하다’(We need a 1970s Jesus Movement today)를 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엘리자베스 맥컬리는 버지니아 MAVENS(미국의 가치, 교육, 그리고 노바 안전을 위한 어머니들)의 공동 리더로 섬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1970년대 예수 운동(Jesus Movement)을 그렇게 강력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는 말은 어떤 차림이든, 어떤 배경이든, 어떤 과거를 가졌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선포되는 복음의 진리를 들으러 오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는 말이 ‘있는 모습 그대로 머물라’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성령의 능력을 통해 변화되고,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죄의 삶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는 데서 오는 참된 평안을 얻으라는 초대였다.

최근에 필자의 딸이 학교에서 ‘10년대 의상 복장 데이’가 있어 70년대 소녀처럼 입고 간 적이 있다. 이 일을 계기로 우리는 예수 운동과 척 스미스(Chuck Smith)가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예수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도록 초대했던 사역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스미스 목사는 새롭게 예수를 믿게 된 이들이 기존의 모습에 머물도록 두지 않았다. 그들을 죄 가운데 편안하게 머물게 하는 메시지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오직 그분을 통해서”라는 진리를 제시했다. 그는 성경 본문을 붙잡아 죄의 삶을 계속 정당화하도록 평안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죄를 떠나 예수 안에서 참된 평안을 얻고, 인간의 풍성한 삶을 누릴 기회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고 말하면서 ‘있는 모습 그대로 머물라’고도 말하는 교회에 앉아 있는가? 누구든지 환영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복음 전체의 진리를 제시하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해 영원한 평안과 소망과 생명을 누리도록 돕고 있는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와 사람을 편안하게만 만드는 가짜 복음의 차이는 생명과 죽음, 그리고 영원한 결과로 이어지는 심각한 문제이다.

필자는 1970년대 척 스미스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이를 환영하되 모두를 참된 평안의 근원으로 인도하는 목회자들이 다시 세워지기를 기도한다. 예수님은 “내게 오라”, “나를 따르라”, “내 멍에를 메라”고 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죄, 짐, 염려라는 무거운 가방들을 지고 다니는 모습에서 벗어나, 그것들을 예수님의 발 앞에 내려놓는 자유의 그림을 상상해보라.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갈보리로 향하는 길에서 그 모든 짐을 짊어지셨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교회에 오는 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격려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되고 궁극적인 평안과 자유를 위해서다.

교회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은, 복음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방식이 뒤섞인 미지근한 메시지를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일이다. 교회에 들어오는 이들은 “기독교적 삶이 무엇이 다른가”를 보기 위해 온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리 전체이며, 희석된 복음이나 기분 좋은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사람을 가장 선한 방식으로 변화시키며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준다.

정체성과 각종 레이블에 집착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원한 정체성을 아는 것은 얼마나 자유로운 일인가. 만약 우리의 교회들이 복음의 능력을 담대하게 선포하여, 들어오는 사람들이 죄에 뿌리내린 정체성을 내려놓고 자유를 얻도록 격려한다면 어떻게 될까? 문화적 정체성을 숨기거나 정당화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되고 자유롭게 되는 일을 축하한다면 말이다. 목회자들이 성경의 가르침인 성, 결혼, 성적 윤리, 생명의 가치에 대해 담대하게 선포한다면 얼마나 능력 있는 일이 될까?

70년대의 ‘플라워 칠드런(flower children)’은 자신들의 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완전한 정체성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죄의 사슬을 뒤로하고,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 나아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인정받는 것에 평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 속에서 평안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며,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는다.

요한복음 8장에는 예수님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만나시는 장면이 있다: “예수께서 일어나 이르시되 ‘여자여,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자가 이르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0–11).

예수님은 그녀를 죄 가운데 편안하게 머물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죄의 삶을 떠나도록 명령하셨다. 그분은 그녀가 살고 있던 삶이 풍성함이 아닌 고통의 삶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 가운데 깊이 빠진 이들을 환영하되, 그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구덩이에서 끌어올려 죄의 패턴을 버리고 소망과 기쁨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이끌고 있는가?

참된 문화적 각성과 자유를 준비하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때 일어난다: “참된 평안을 찾으려면 예수께 오십시오. 아마 삶은 급진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급진적인 자유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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