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속에서 빛나는 신앙: 루스의 이야기와 나이지리아 교회의 회복

폴 머레이 박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폴 머레이 박사의 기고글인 ‘학살에도 불구하고 나이지리아 교회는 찬양한다’(Despite the massacres, Nigeria’s Church still sings)를 26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폴 머레이 박사는 30년 이상 기독교 리더십에 헌신해 왔으며, 메릴랜드주 밀러스빌에 있는 라이트하우스 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국제 복음 전도자로 활동했으며 저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고통은 총성이 울릴 때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훨씬 이전, 아이들이 잠드는 조용한 공간에서, 어머니가 자장가를 흥얼거리는 순간에서, 믿음이 어두움 속에서 연약한 공동체를 붙드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고통은 예고 없이 찾아와 깨진 창문 사이로, 불타버린 대지를 넘어 스며들며 나이지리아의 심장을 그림자처럼 덮는다. 이 어둠은 단순한 인간 간 갈등을 넘어선다. 그것은 믿는 자들을 침묵시키고,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는 곳마다 꺼뜨리려는 영적 공격이다.

작은 루스를 떠올려 보자. 사랑과 웃음만을 알았어야 할 아이다. 풀라니 무장단체가 그녀의 마을을 습격했을 때, 루스의 어머니 한나투는 자비를 호소했다. 공격자들은 루스를 어머니의 품에서 찢어 내고, 한나투를 즉시 살해했으며, 갓난아이는 진흙 위에 버려졌다. 새벽이 되어서야 루스는 상처투성이였지만 살아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고, 그녀의 고모 가족이 데려가 길렀다. 상실의 그림자 속에서 자랐지만, 믿음의 빛 속에서 성장했다.

루스의 가족은 고통의 깊이와 회복력의 뿌리를 동시에 이해한다. 루스의 양아버지 단주마 존은 “우리는 복수를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직 용서를 위해 기도합니다. 공격자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심도 압니다.” 루스가 학업을 이어가고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는 동안, 그녀의 가족은 기도한다. “나이지리아의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플래토 주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루스 같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폭력의 고아가 되어 사랑과 믿음 속에서 성장할 기회를 갈망하는 아이들. 그리고 공격자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기를.”라고 말했다.

루스와 같은 이야기는 수천 건에 달한다. 올해 들어 지금까지 약 7,000명의 기독교인이 나이지리아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 살해 사건이 모두 종교적 동기 때문은 아니지만, 기독교인은 전국적으로 발생하는 집단적·폭력적 갈등에서 피해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경종을 울리며 조치와 책임을 요구해왔다. 최근 의회에서는 새로운 결의안이 제출되었고,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나이지리아를 ‘특별 우려 국가(Country of Particular Concern)’로 재지정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공적 압력이 커졌다. 언론은 제재, 성명, 압력 약속을 보도하지만, 이러한 정책상의 말들은 루스나 그녀의 마을, 그리고 매일 위험에 직면한 수많은 생존자들의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종종 나이지리아의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손실로만 언급된다. 숫자로 계산되고, 그들의 고통의 깊이나 믿음의 강인함을 포착하지 못한 통계로 축소된다. 루스와 같은 생존자들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각 숫자 뒤에는 용기와 기도, 인내로 형성된 삶이 있다.” 그들의 믿음은 주변의 폭력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 된다.

나이지리아 전역에서 교회와 지역 사역 단체들은 회복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전쟁으로 갈라진 가족들에게 피난처, 트라우마 상담, 화해를 제공한다. 목사들은 위험이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설교하고, 자원봉사자들은 아이들이 하루를 시작할 때 안아주며, 어떤 아이도 견뎌서는 안 되는 기억들을 함께한다.

숫자가 아닌 인간의 현실

논쟁과 정책 성명이 끝난 후에도, 진실은 단순히 차트와 통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위기의 현실은 통계만으로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 헤드라인이 사라지고 정치적 논의가 잦아들어도, 더 깊은 현실이 남는다. 숫자로 표현되지 않은 현실인 상처, 두려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믿음이 그것이다.

기독교 소녀들은 전례 없는 방식으로 계속 납치된다. 가족들은 파괴된다. 공동체는 집단적 트라우마와 어렵게 얻은 회복력을 통해 믿음을 이어간다. 학살, 교회 방화, 정부의 무관심이 반복된다. 세계 대부분은 시선을 돌리지만, 공동체는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다.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원조 패키지, 제재, 상징적 비난을 통해 해결책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빈곤, 부패, 민족적 긴장, 약한 제도, 기후 압력 등 믿음 기반 공동체를 취약하게 만드는 핵심 조건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멀리서 보면 이 위기는 연설로 해결할 수 있는 정책 문제처럼 보인다.

한 나이지리아 기독교 지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많은 것들이 얽혀 있는 독성 혼합입니다.” 고통은 고통 위에 쌓이며, 경제적·사회적·영적 피해가 함께 작용하여 무장단체가 오기 전부터 가족들을 짓누른다. 위기의 뿌리는 매우 복잡하다.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은 긴급 구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여성에게 권한을 주고, 지역 제도를 강화하며, 온건한 무슬림과 다리를 놓는 장기적 투자가 필요하다. 이런 단계들이야말로 지속적 안전의 희망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성 속에서도, 위기의 핵심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이를 견디는 신자들을 통해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피해자뿐 아니라 생존자를 보라

이 때문에 미국 기독교인들은 연민이 아닌 동반자적 대응을 해야 한다. 우리는 트라우마 회복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커뮤니티에 알리며, 기독교인과 온건한 무슬림을 함께 연결하는 화해 노력에 투자할 수 있다. 기도와 실질적 행동을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나이지리아의 회복력 있는 신자들을 존중하고 희망 속에서 그들과 함께 설 수 있다.

기도는 “나이지리아를 구하기 위해”가 아니라, 어려움을 겪는 신앙 공동체와 함께 걷고 배우기 위해 행동과 결합되어야 한다.

진정한 연대의 시험

의회 결의안은 중요하지만, 진정한 질문은 서구 기독교인, 정책 입안자, 기부자들이 겸손하게 귀 기울일 것인가이다. 생존자들과 함께 현장에서부터 지속 가능한 변화를 만들어낼 것인가, 아니면 분노와 공허한 약속을 반복할 것인가.

세상은 폐허를 보지만, 하늘은 어둠에 굴복하지 않는 교회를 본다. 루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한다. 믿음은 진흙 속에서도 피어나고, 용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실 속에서도 자라며, 그리스도의 빛은 악이 승리했다고 믿었던 곳에서도 여전히 빛난다. 나이지리아의 교회는 여전히 노래한다. 때로 눈물 속에서, 때로 속삭임 속에서, 그러나 항상 믿음을 통해 노래한다. 남은 유일한 질문은, 우리가 그 노래에 함께할 것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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