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斷腸)의 아픔’이란 말이 있다. 중국 진나라 때 ‘화온’이란 사람이 배를 타고 촉나라로 가던 중 장강 삼협을 지날 때 시종 한 사람이 숲에 들어갔다가 원숭이 새끼가 너무 귀여워 덥석 안고 배를 탔다. 그것을 본 어미 원숭이가 뒤따라 나섰지만 배가 떠나자 험한 강가를 울부짖으며 뒤따라간다. 백 리를 넘게 가서 배가 강기슭에 닿자마자 어미 원숭이는 즉각 배로 뛰어들어 새끼 원숭이를 껴안지만 금세 죽고 만다. 사람들이 왜 죽었는지 궁금해서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여러 토막으로 끊겨 있었다고 한다. 너무 기를 쓰고 너무 애를 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긴 말이 ‘단장의 아픔’이다.
이게 많은 어머니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날마다 자식 걱정하며 사는 어머니, 본문에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상황에 처한 한 어머니가 등장한다. 아이를 낳지 못하다 뒤늦게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낳았지만 아들만 낳게 해주신다면 그 아들을 바치겠다고 서원했기에 젖을 뗀 후 성소에 바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바로 한나다. 그녀는 아이를 낳은 후에도 서원대로 행한다. 인간적으로는 너무 힘든 일이어도 약속이었고 또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드린 한나의 기도가 참 놀랍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1절), “이건 아니잖아요?” “이럴 수는 없잖아요?”라며 ‘울부짖었다’가 아니라 ‘즐거워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은혜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고백이다.
여기에 주목할 만한 표현이 또 있다. ‘내 마음’, ‘내 뿔’, ‘내 입’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건 히브리 문학에서 전형적 수사 기법으로 사용되는 3중 대구법적(對句法的) 표현 방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 마음이 즐겁다”라는 표현은 보통 어머니라면 절대 할 수 없는 표현이다. 그리고 “내 뿔이 높아졌다”고 했는데, 여기서 ‘뿔’은 힘과 자랑거리(pride)의 상징, 한나는 아들을 낳고 힘을 얻었다. 그래서 “입이 열렸다.” 이전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으나 이제는 아니다. 은혜를 받았기에 찬양하고 간증할 말이 너무도 많다.
브닌나로부터 멸시받던 그 한나가 아니다. ‘주의 구원’(salvation)을 체험했기에, 은혜를 받았기에 기쁨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한나의 노래’(2:1-10)라고 불리는 이 노래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기쁨의 노래’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과 기쁨, 그리고 감사가 충만한 노래, 이 노래는 신약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마리아 찬가’의 모체가 된다. 은혜 아니면 절대 부를 수 없는 이 노래가 우리의 노래 되면 좋겠다.
기쁨의 노래
1절을 보면 한나는 “기도하여 얻은 사무엘(Samuel)로 말미암아 기뻐하며”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라고 했다. ‘여호와로 인한 기쁨의 노래’라는 말이다. 물론 아들 얻은 감격으로 부른 노래인 건 맞는다. 하지만 내가 구한 어떤 것, 얻게 된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시는 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노래한 것이다.
누구든 어린 자녀에게나 조카에게 선물을 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때 선물을 주며 한 번씩 물어봤던 질문은 “선물이 좋아? 내가 좋아?”였다. 선물만 쳐다보다 받아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좋아하며 뛰어가도 아이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했을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 돌아와서 뺨에 입이라도 맞춰주면 “다음에 또 사줄게” 그랬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도 그저 선물만 좋아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거다. 선물보다는 선물을 주신 분이 훨씬 더 귀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라고 노래했는데 한나야말로 여호와를 기뻐하고 있다. 그래서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이 없으심이니이다”(2절)라고 세 번이나 “하나님 최고!”를 외쳤다. 기쁨의 노래, 이건 바로 은혜받은 자가 부를 노래이다.
믿음의 노래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6절). 한나는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은 스올(Sheol), 곧 음부로 내려가게도 하시며 거기서 올리기도 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7절)고 했다.
한나는 기대와 달리 어려움 속에 빠지는 것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믿었다. 최근에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이기도 하다. 성경은 1장 5절과 6절에 연속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 한나의 태의 문을 닫았던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강조한 것이다. 지금도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상황, 인간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잃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는 실로의 성전을 찾는다. 거기서 기도하는데 그 기도는 믿음의 노래였다. 한나는 하나님을 인생극장의 주인으로 믿었다. 그래서 아들을 바치면서도 해피엔딩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확신하며 이 믿음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한나의 노래는 모든 것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이다. 이 기막힌 상황 속에서도 고난의 대명사 격인 욥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도적 떼에 의해서 전 재산을 다 잃었던 욥,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가 덮쳐 졸지에 자녀들을 다 잃었다. 이어서 최후의 보루 같은 아내마저 곁을 떠났다. 그런데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하나님을 찬양한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한나의 노래와 다를 바 없다. 주셨다가 다 거두셔도 찬송하겠다는, 은혜 아니면 절대 부를 수 없는 노래였다.
낮이 있으면 밤도 있고, 높은 곳이 있으면 골짜기도 있고, 봄이 있으면 겨울도 있는 법, 우리는 이런 리듬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저항해 봐야 소용이 없다. 차라리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즐겨야 한다. 왜냐하면 꽃은 꽃대로, 열매는 열매대로, 낙엽은 낙엽대로 즐기는 법을 안다면 은혜가 더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고통 속에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심어놓으셨다. 믿으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표현처럼 숨어계시고, 낯선 하나님일지라도 끝까지 사랑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도 한나처럼 믿음으로 은혜받은 자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승리의 노래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1절) 여기서 ‘원수들’은 악인들, 3절에 보면 교만한 말과 오만한 말을 하는 자들이다. 한나에게는 브닌나가 원수였고,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블레셋(Philistine)이 원수였다.
한나는 이런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로 웃게 하며, 우리의 오른손을 번쩍 드는 분이시라고 노래한다.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1절), 뿔은 ‘황소의 뿔’, 다른 소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거만하게 뿔을 들고 걷는 황소의 모습이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5절)라고 노래하며 즐긴 승리의 만찬, 승자는 잔치를 즐기고 패자가 된 원수들은 발밑에 무릎 꿇고 있는 비참한 모습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로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하는 분이시다.
한나는 자신의 대적자를 하나님의 대적자로 여긴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10절). 철장에 질그릇이 깨어지듯 산산이 깨어질 것, 이럴 때 쓰는 말이 ‘통쾌하다’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통쾌하게 만드는 분이시다. 5절의 임신하지 못하던 자가 일곱을 낳았다는 표현도 사무엘을 대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았다는 21절 말씀과는 다르지만 일곱이란 완전수로 자녀를 많이 얻었다는 행복을 노래한 것, 숫자보다 슬퍼하던 한나가 이처럼 통쾌하게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
결국 이 노래는 한나 한 개인의 노래를 넘어 ‘이스라엘의 노래’가 되고, ‘구약교회의 송가’가 되었다. 이스라엘을 통치할 왕에 대한 예언의 노래이자, 메시아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에 대한 예언의 노래, 이 노래는 자기 인생의 뿔이 높아진 후 관심이 역사나 민족이나 하나님의 뜻으로 확대된다.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10절). 아직 왕도 없었는데 왕의 뿔을 높여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한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래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나’만 생각하는 노래가 아니라 ‘우리’, 곧 민족 공동체를 생각하며 노래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