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가장 큰 위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다’(The biggest danger of all isn’t what you think)를 1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검은 옷만 입는다고 아이들에게 조롱 받던 영화 아담스 패밀리 밸류(Addams Family Values)의 웬즈데이는 “왜 누가 죽은 것처럼 입고 다니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기다려”라고 답한다. 필자는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말이 결코 엉뚱한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우리는 오래 기다릴 필요조차 없다.
2025년 기준 전 세계에서는 연간 약 6,200만 명이 세상을 떠난다. 하루 약 17만 명, 1분마다 120명, 1초마다 2명씩. 오늘 아침 평소처럼 일어났지만, 저녁에는 이 세상에 없을 사람들, 그 안에는 우리도 언제든 포함될 수 있다. 이 숫자를 마주할 때마다 필자는 인간의 죽음이란 얼마나 조용하고도 냉정하게 현실이 되는지를 실감한다.
존 맥아더 목사가 9·11 테러 다음 날 래리 킹 라이브에 출연해 남긴 말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그는 “여기서 배워야 할 교훈은 모두가 죽는다는 것, 그리고 그때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했다.
삶은 그 자체로 가장 큰 위험이다. 왜냐하면 “삶”이라는 여정 끝에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이런 죽음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늘 마음속에서 걸리는 성경 본문 하나가 있다. 누가복음 13장의 말씀이다.
죽음은 ‘특별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인들을 학살한 사건을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의 답은 이렇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어서 그런 일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렇게 망할 것이다.”
실로암 탑이 무너져 18명이 죽었을 때도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하셨다. 필자는 처음 이 말씀을 읽었을 때 솔직히 조금 차갑다고 느꼈다. 만약 그 희생자의 가족이었다면 어떨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 이해한 것은 이 말씀의 핵심이 사람의 감정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아무에게나, 언제든 닥칠 수 있다”는 냉엄한 사실을 직시하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신 요지는 분명하다. “비극적 사건으로 죽은 사람은 누구보다 더 큰 죄인이 아니며, 그런 죽음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지가 아니라, 죽음이 오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예수님이 던진 비유: 유예된 시간 속에 사는 인간
예수님은 바로 이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열매가 없으면 베어버려야 마땅한 나무, 주인은 이미 3년 동안 열매를 찾았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마치 십자가를 향해 가는 예수님 자신처럼 가운데 서서 한 해만 더 봐달라고 요청한다. “열매가 열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십시오.”
여기서 필자는 한 가지 사실을 절감한다. 우리는 지금 ‘그 한 해’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언제까지인지 알 수 없는 유예된 시간,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는 바로 그 시간 속에서 말이다.
우리가 젊고 건강하고 바쁘기 때문에 잊는 것
삶 속에서 ‘그날’은 마치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특히 모든 것이 잘될 때, 죽음은 우리의 현실에서 멀어져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목회 현장에서, 그리고 삶의 여러 순간에서 죽음이 얼마나 조용히, 아무 경고 없이 다가오는지를 수없이 보았다.
신학자 워렌 위어스비가 지인에게 “그 도시의 사망률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을 때, 지인은 이렇게 답했다. “한 사람당 하나지.”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전에 죽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이제 죽고 있구먼.” 정곡을 찌르는 농담 같지만,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다. 우리 모두 언젠가 어느 날, 한 번 죽는다.
가장 큰 위험은 ‘죽음’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삶’이다
예수님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어떤 철학적 질문보다, 어떤 의학적 공포보다 더 큰 비극이다. 죽음 자체보다 더 무서운 위험은,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삶이다. 삶이 가장 큰 위험이라는 말은, 삶의 결과가 결국 죽음이라는 의미일 뿐 아니라 죽음 이후에 무엇을 마주하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악과 고통의 신비’를 설명하지 않으셨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결국 예수님은 비극의 원인보다 비극 이후에 어디에 서게 될 것인가를 묻고 계신 것이다. 필자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것도 바로 이 한 문장이다.
삶은 언제든 끝날 수 있다. 그러나 그 끝이 오기 전에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은 아직 열려 있다. 웬즈데이는 “기다려”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을 기다려야 한다. 오늘이라는 은혜의 유예 기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회개의 초청에 응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