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더 나아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한 논고를 ‘호교론’(護敎論)이라 일컫는다. 호교론은 인류 역사에 있어 영원한 숙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며 변증함과 동시에, 대척점에 있는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을 수호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하고도 지속적인 문제이다. ‘이단’(異端)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자기가 신봉하는 길과 달리 별도의 길을 이름. 전통이나 권위에 반항하는 것. 그리스도교의 신조에 반대함.” 한 사법부가 내린 법적 정의는 이렇다. “특정 교단의 권위에 의하여 배척된 교리 또는 집단.” 이와 같이 이단에 대한 사전적 정의 내지 법적 정의는 상당히 주관적인 판단의 여지를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이단에 대한 판단이 교파와 교단에 따라 상이한 준거에 의해 정의되거나 적용되기도 한다. 하여튼 이단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신앙을 견지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따라서 이에 관한 소고(小考)를 다음과 같이 전개코자 한다.
Ⅱ. 성경의 언급
한글개역성경에 ‘이단’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하이레시스’(αἵρεσις, sect)로, 신약성경에 모두 5회 등장한다(행 24:5,14; 갈 5:20; 딛 3:10; 벧후 2:1). 하이레시스는 ‘분파, 종파’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개념인 ‘이단’과는 의미상 다소 차이가 있다 하겠다. 왜냐하면 수식어가 붙지 않은 하이레시스는 단지 분파나 종파를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를 그릇되게 혹은 왜곡시켜 전하는 자들을 일컫는 용어로 ‘거짓 선지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프슈도프로페데스’(Ψευδοπροφήτης, false prophet)이다. 이 단어는 프슈데스(ψευδής, 거짓말하는, 거짓의)와 프로페테스(προφήτης, 예언자)의 합성어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모두 11회(마 7:15; 24:11,24; 막 13:22; 눅 6:26; 행 13:6; 벧후 2:1; 요일 4:1; 계 16:13; 19:20; 20:10) 등장한다. 구약성경(슥 13:2)에서 한 번 ‘거짓 선지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비’(איבנ, prophet, ‘선지자, 선견자’)는 문맥의 의미상으로만 거짓 선지자임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마 7:17),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고 엄히 경고하셨다. 이단과 거짓 선지자는 같은 범주에 속하며, 마지막 심판 때 영원한 유황불 못에 던지어 고통 받게 될 것이다(계 20:10).
Ⅲ. 교부들의 호교 활동
호교론(護敎論)은 교부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논제였다. 유스티누스(Justinus, 100-165년경)는 《첫째 호교론》,《둘째 호교론》을 저술하였고, 테오필루스(Theophilus, 120-185)는《아우톨리쿠스에게》를 저술하였고, 떼르뚤리아누스(Tertullianus, 155-230)는《호교론》,《그리스도의 육신론》을 저술하였고,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3)는《켈수스 반박》을 저술하였다. 모두 호교론서이다. 회심하기 전 약 10년 간 이단 마니교에 빠졌던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회심 후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가 쓴《신국론》,《그리스도교 교양》,《참된 종교》,《삼위일체론》,《아카데미학파 반박》,《질서론》,《영혼 불멸》,《마니교도 반박》등은 모두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호교론의 변증서들이다. 교부는 아니지만, 과학자이자 사상가인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31세 때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한 후 기독교에 대한 호교론을 집필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였는데, 그의 유가족들과 친구들이 유고를 정리해서 간행한 것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팡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회가 ‘파문’ 혹은 ‘이단’ 등의 말들을 만들었던 것은 쓸데없는 짓에 불과하였다. 사람들은 교회의 의도와는 반대로 이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현대의 이단 연구와 관련하여 일침을 가하고 있다.
Ⅳ. 이단 연구 활동과 책임
교부들은 성경에 해박한 탁월한 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교부들이 호교론을 논함에 있어 보여준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된 신학 교리에 대해 성경을 근거로 치열한 논거를 전개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이 그릇된 것임을 논증하였지만, 이단 감별사 노릇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중세 들어 공교회가 교권을 빙자하여 수많은 부녀자들을 악령에 사로잡힌 이단으로 정죄하여 마녀 사냥함으로써, 호교 및 이단 문제를 엉뚱한 방향으로 오도(誤導)한 역사적 과오가 특출하다. 호교를 위한 이단 연구와 논증은 높은 전문성을 요한다. 성경과 신학 및 교리에 정통함은 물론, 깊은 영성도 겸비해야 한다. 지식과 지혜에 대한 깨달음은 이성만으로는 부족하고, 성령의 조명에 의한 영적 통찰력을 갖추어야 한다. 영적 통찰력을 영성(靈性)이라 할 때, 그에 수반하는 영적 체험 또한 중요하다. 신앙은 기본적으로 영적인(πνευματικός프뉴마티코스, spiritual, 신령한, 신비한) 것을 전제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딤후 3:16). 따라서 신앙의 바탕은 본질적으로 영적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히 산다는 하나님의 계시는 영적 통찰(깨달음) 없이는 이해도 믿음도 온전치 못하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영에 대한 깊은 통찰과 체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방신학, 그리고 서방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온 한국교회의 토양은 영성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미흡하다. 이를테면, 서방신학자들은 라틴어 anima(soul, 혼)라는 용어를 무수히 사용하는 반면, spiritus(spirit, 영)라는 용어는 상당히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그들이 남긴 숱한 저술을 통해 흔히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과 신학 및 교리에 탁월한 전문성과 깊은 영성을 갖춘 자가 이단 연구 및 논증에 종사토록 해야 한다. 각 교단 총회에서 의례적으로 ‘이단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자질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그 직무에 관여하여 그 결과물을 총회에 헌의하고, 그리하여 어떤 특정인을 이단으로 정죄 공표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이단을 연구하는 사람은 교리와 신학을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종파별(교단별) 교리의 차이점이 엄연히 존재하는바, 이를 숙지해야 한다. 신학 내지 교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뿐이다. 신학은 얼마든지 다양한 이론을 제시할 수 있고,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거쳐 수정되거나 폐기되거나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된다. 한편, 교리는 오랜 교회 역사와 전통 속에서 공적인 토론 과정을 거쳐 정립된 것으로 모든 교회가 존중한다. 신조는 교리를 더욱 축약하여 공교회의 이름으로 공포된 것인바,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삼는다. 하지만 교리가 성경을 우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속한 교파(교단)의 교리나 신학을 잣대 삼아 타인을 무조건 판단 정죄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이단성 여부를 조사할 때에는 대상자의 출판된 책, 공개된 자료, 인터넷을 통해 수집할 수 있는 것들 외에도, 반드시 그 대상자를 직접 방문하여 상대방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하고, 소명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빈약한 자료에 의거 단정적으로 판단 정죄하는 것은 범죄 행위에 다름 아니다. 성경 해석에 대한 차이를 자신의 잣대로 제단하지 않아야 한다. 성경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용어를 잘못 사용하였다가, 후에 오류를 인정 수정하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 윤리․도덕에 속한 문제를 이단 감별의 잣대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불의에 대해 선지자적 목소리를 낼 때,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반한다고 하여 이단으로 엮으려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한국 교계의 병폐는, 한 번 이단으로 낙인찍히면 영원한 이단이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이단이 아님이 밝혀졌을지라도 그에 따른 회복 조치의 노력이 거의 없다. 이단 정죄와 관련된 추악한 금전 문제는 여기서 논외로 하자. 하지만 억울한 이단 혐의 피해자가 치명상을 입고 회복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여생을 보내야 한다면, 그 비극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마땅히 그런 정죄를 내린 사람이나 단체, 총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 직고의 회계(會計)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롬 14:12). 정죄(定罪, judgement)는 하나님께 속한 그분의 주권이며, 결코 인간에게 위임된바 없다. 따라서 이단 연구는 논증을 통해 사람들을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각심과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Ⅴ. 성령훼방죄
성경에 아주 엄중한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 12:31). 성령 훼방죄를 일컬음이다. ‘훼방’으로 번역된 헬라어 ‘블라스페미아’(βλασφημία)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을 의미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격인 ‘성령 하나님’으로 지칭하였으니, 하나님의 역사(役事)하심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 성령의 역사(활동)하심에 대한 모독(훼방)은 매우 포괄적이다. 어떤 행위가 이에 해당되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성경이 성령 훼방죄에 해당하는 죄목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긴장케 한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간이 어찌 가늠하고 제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분의 섭리와 경륜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위임하신 다스림(통치)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그분의 역사와 은사를 인간이 제한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한 그리스도인을 섣불리 자신이 속한 교단 교리로 제단하고, 성경 해석의 다양한 견해를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제단하여 판단, 정죄, 공표하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이단감별사 노릇은 하나님께 속한 주권을 도적질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2장 31절은 참으로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다.
Ⅵ. 나가는 말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관점과 방식도 변화를 거듭하는바, 코로나 이후 AI가 초래하는 세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바른 신앙 수호와 이단 대처에도 변화가 요구된다. 이미 우리의 인식과 논증, 경험으로 기정사실화 된 이단들에 대하여는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주의를 기울일 일만 남았다. 작금 복음의 진리와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최대 세력은 다음의 세 가지라고 본다. 첫째,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수술 없는 성전환 주장, 잰더이즘, 동성부부 인정, 이를 뒷받침하는 사이비 신학)이다. 동성애의 사조는 이제 세계 여러 나라가 국법으로 이들을 보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동성애는 옛 언약에서 가증한 행위의 중대범죄로 정죄한바(레 18:22; 20:13), 새 언약 하에서도 변함없이 가증한 행위로 경고한다(롬 1:26,27). 동성애는 인권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둘째, 민중신학이다. 해방신학의 한국판인 민중신학은 그 역사가 이미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계는 하나의 진보적 신학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 하지만 민중신학은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학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의 혁명가로, 부활을 민중이 주체가 되는 세상으로 폄훼한다. 서남동은《민중신학의 탐구》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계시의 말씀을 철저히 농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민중신학을 제대로 변증하고 비판한 신학자, 목회자, 이단연구가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셋째, 교회에 침투한 종북굴중(從北屈中)의 전체사회주의 주사파사상이다. 마르크스-레닌의 후예들인 이들은 교회를 비롯한 한국사회 곳곳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체제를 위협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데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호교를 위한 이단 연구는 이제 이 세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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