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루터와 웨슬리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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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성 박사(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대표회장)

양기성 박사

10월 31일은 마틴 루터 종교개혁의 날이다. 우리는 마틴 루터 하면 독일인 신부였고, 가톨릭의 인간 선행중심의 신앙, 그리고 종교적 부패를 일소하여 믿음(Faith), 즉 “믿음으로 얻는 의”의 신학으로 물줄기를 바꾼 종교개혁자로만 알고 있다. 이런 내용들은 이 시대에서도 되새겨야 할 개신교 신학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좀 더 종교개혁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원인이나 이유 등을 오늘의 시대와 더불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우선 종교가 자신의 본분을 잃고, 정치에 관여하다 엄청난 모순적 결과를 낳은 것에 대한 “믿음에로의 회복”이 개혁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당시의 교회는 국가정치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오죽하면 교회와 정치권과의 통합적 권력을 가진 대표를 교황이라 부르는 제도가 생겼겠는가 하는 것이다. 교회의 수장만 돼도 어마어마한 통치적 힘을 내포하고 있는데, 여기에 세속 정치권력까지 겸비하였으니 그 힘이 얼마나 컷겠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 자신의 교황청과의 관계에 의한 것이 바탕이 되었다. 가톨릭에서는 교황무오설까지 등장하게 되었으며, 교황이 정치권은 말 할 것도 없고, 교회와 연관된 잘못된 사안에 대해서도 투옥, 사형 언도 및 집행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권위를 둔 것이 아니라, 교황의 정치 및 행정통치에 온전히 권위가 서려 있었다 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교계 및 신앙생활 전면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고행이 믿음의 척도가 된다하여 교황청을 방문하면 빌딩 내 계단에 사제들은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기도 했다. 루터는 그런 경험을 하면서 “인간의 공적 사상, 즉 선행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Justification by Faith)는 신앙적 확신”을 갖게 된 것이 종교개혁 동기(Motive)의 근본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오로지(Only)”라는 서술적 단어를 강조하였다. 즉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말했다. 교권에 정치권력이 가미되니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자, 이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득의 사상으로 바꾸어 나가는 주장을 한 것이다.

루터는 정치권력, 정치 이념이나 구호, 심지어 철학의 이성(Reason)까지 배제하였다. 이성은 살아가는 일에서의 도구나 방편이지 신앙의 본질이 아닌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지 정치 이념, 또는 철학의 이성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말이다. 그 결과, 정치의 탈을 벗고 순수한 복음을 바탕으로 한 개신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정치의 간섭이나 이념적 관계성 속에서 온전히 분리되어 오늘날까지 교회적 전통과 정체성을 이어 내려오게 되었다.

목회자들의 정치나 사회 참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복음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이를 잘 알려준 인물이 루터인 것이다. 그는 성경으로 복음의 회복을 위해 개혁을 했지 정치적 힘의 논리를 배경으로 하여 종교개혁을 하지 않았다. 사회의 풍습, 성향을 개선하려면 정치가 아닌 교회 목회자, 교회, 기독교 자체가 복음화 되면 자연적으로 그런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루터가 그런 배경으로 개혁을 단행하니 독일 정치와 종교의 역할이 더 분명하게 구분 할 수 있게 되었고, 사회는 더 건전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루터뿐만이 아니다. 존 웨슬리도 복음으로 인간행실과 사회, 정치를 변화시켜 나갔다. 그는 정치운동으로 개인의 심사나 사회를 변화 시킨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 개인,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법, 교육, 제도 같은 것으로는 안 된다. 성령을 통한 영혼이 변화되어야 변화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런 정신 때문에 영국은 복음으로 신사의 나라가 된 것을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종교개혁의 완성자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와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18세기 영국 사회를 변화시킨 영적–사회적 개혁의 두 거인이라 할 수 있다. 웨슬리는 구약의 사무엘처럼 영적 부흥의 지도자였으며, 윌버포스는 정치적 개혁의 지도자로서, 서로 다른 위치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했다. 존 웨슬리 그는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사회적 사랑을 강조했다. 웨슬리의 복음 운동은 단순히 개인 구원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정의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은 나의 교구이다( I look upon the world as my parish).” 이 말은 복음과 사랑의 실천 범위를 사회 전체로 확장한 선언이었다.

웨슬리는 노예제, 빈곤, 아동노동, 알코올 중독 등사회적 죄악에도 적극적으로 맞섰다. 그는 설교와 글을 통해 “노예무역은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규탄했다.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는 국회의원, 복음주의 운동가로서 그는 청년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한 후 “내 생애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회심 이후 그는 정치적 영향력을 사용해 노예무역 폐지 운동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1807년, 그의 끈질긴 헌신 끝에 영국 의회는 마침내 노예무역 폐지법(Slave Trade Abolition Act)을 통과시켰고, 윌버포스는 생애 말년에 노예제 완전폐지(1833)를 보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존 웨슬리는 윌버포스보다 약 56세 연상 이었다. 윌버포스가 신앙으로 변화된 시기, 웨슬리는 노년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1791년, 웨슬리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며칠 전, 그는 윌버포스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것은 웨슬리의 생애 마지막 편지였다. 웨슬리가 윌버포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중 일부 “하나님께서 당신을 일으켜 세우신 것은 노예무역이라는 지옥에서 나온 끔찍한 불의를 끝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인내로 이 사명을 완수하십시오. 세상이 당신을 반대할 것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편이십니다.”(1791년 2월 24일, 웨슬리 서신) 이 편지를 받은 지 6일 후, 웨슬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 편지는 윌버포스의 신앙과 사명에 불을 붙였다. 그는 이후 40여 년 동안 노예제 폐지를 위해 싸웠고, 웨슬리의 마지막 기도가 그의 생애의 길을 비추었다. 신앙은 개인의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웨슬리처럼 복음은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한다. 정치는 믿음으로 사회를 섬기는 또 다른 사역이다. 윌버포스는 신앙을 통해 정치의 부패를 정화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시대의 고통에 응답한다. 두 사람은 “복음적 성결”과 “사회적 성결”의 본보기이다. 웨슬리는 영적 개혁을 일으켰고, 윌버포스는 그 신앙을 사회 속에서 실천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증명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508주년 종교개혁주일을 앞에 두고 종교개혁을 단행한 마틴 루터와 종교개혁을 완성한 존 웨슬리의 신학과 신앙 정신으로 윌버포스와 같은 평신도를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깨우치고 가르쳐 평신도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헌신하게 하는 것이 오늘의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20)

#양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