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대하여
그대들은 함께 태어나 또 영원히 함께 하리라.
죽음의 흰 날개가 그대들의 생애를 흩뜨려 버릴 때까지 그대들은 함께 하리라.
영원히 그대들은 함께 하리라, 침묵하는 주님의 기억 속에서까지도.
그러나 그대들 함께 함에는 공간을 두라.
그리하여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에 구속되지는 말라.
차라리 그대들 영혼의 기슭 사이에 일렁이는 바다를 두라.
서로의 잔을 넘치게 하되 한쪽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가 자기의 빵을 주되 한쪽 것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되 그대들 각자가 따로 있게 하라.
비록 같은 음악을 울릴지라도 기타줄이 따로 있듯이.
그대들의 마음을 주라, 그러나 지니지는 말라.
오로지 생명의 손길만이 그대들 마음을 지닐 수 있나니
함께 서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나니
참나무와 사이프러스나무도 서로의 그늘에선 자라지 못하리니.
미국의 레바논계 예술가요 작가, 시인이었던 칼릴 지브란(Gibran Kahlil Gibran, 1883-1931)은 1883년 레바논 북부 마론파 기독교 신자들이 모여 사는 부쉐리에서 마론파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정 교사로부터 아랍어, 프랑스어, 영어를 배웠으며 일찌감치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 특히 글과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그가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고, 지브란은 어린 시절부터 종교 교육을 받았다.
1894년 아버지만을 레바논에 남겨두고 어머니, 이복형 및 두 여동생과 함께 미국 보스턴으로 이주한 지브란은 1896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로 혼자 돌아와 지혜의 학교(Madrasat Al-Hikmat)에 입학, 필수 과목 외에 의학, 국제법, 종교사, 음악 등을 공부한다. 1901년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친 지브란은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며 <반항의 정신>을 발표한다. 이 책이 나오자 당시 레바논을 침략하고 있던 터키 정부는 지브란을 위험한 인물로 지목한 동시에 베이루트 장터에서 책들을 불태워버린다. 고국으로부터 추방되고 마론파 기독교(Maronite)로부터도 추방된 지브란은 다시 미국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를 비롯한 미국가족들은 모두 사망하고 누이 동생 마리아나와 단둘이 보스톤에 남은 지브란은 그림도 그리고 작품 활동도 지속하였다. <예언자>를 아랍어로 다시 쓰기도 하고 다양한 미술 활동을 병행한 지브란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아랍어로 쓰였고, 특히 희곡 작품에 드러난 그의 사상은 아랍권에서는 지브라니즘Gibranism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18년 이후의 작품은 대부분 영어로 기록했는데, 1923년 20년간의 구상을 거쳐 완성한 산문시 <예언자>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브란은 1931년 4월 10일 뉴욕 빈센트 병원에서 48세의 나이로 간경변과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인간은 누구나 늘 본향을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일찌감치 아름다운 고향 레바논을 떠나 나그네처럼 살았으니 지브란은 얼마나 고국 레바논과 부쉐리가 그리웠을까? 작은 교회에서 장례식을 마친 시신은 시신안치소에 보관되었다가 7월 베이루트를 거쳐 지브란의 고향 부쉐리로 돌아갔다.
곤충의 아버지 파브르가 그랬던 것처럼 지브란도 결국 자신의 고향을 사랑하고 잊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리 인류의 영원한 본향은 과연 어디일까?
40여개 국어로 번역되고 20세기 단테라 불리며 사랑받는 지브란의 작품은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필자는 '신앙 깊은 곳의 잠언적 시, 시적 잠언의 예술'이라 표현하고 싶다. 그의 작품의 바탕이 된 고국 레바논의 신앙의 고장 부쉐리는 시의 모태가 되었을 것이요 예술이란 단어를 삽입한 것은 그의 탁월한 회화적 감각이 시 속에도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세 단어로 표현해본다면 예술적 혼을 담은 종교적, 신비적, 교훈적이라는 단어로 정리할 수 있겠다.
정현종 시인(전 연세대 교수)은 지브란에 대해 "인간의 삶이 안고 있는 여러 보편적 문제들-즉 삶의 고통과 슬픔, 절망과 비참, 기쁨과 희망, 사랑, 우정, 고독 등 실존적 조건들에 대한 깊은 명상을 노래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노래들은 우리의 마음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힘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힘의 원천에 대해서는 "그의 지순한 영혼의 淸淨·순진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대상에 대한 사랑"때문이라 말한다.
사실 지브란은 모든 세속적 탐욕과 부조리와 민간이 만든 법과 권력과 조직의 횡포 및 모순에 저항하며, 교회의 성직자들과 위선을 거침없이 비판한 시인이기에 레바논 침략자 터키 정부와 고국 레바논과 자기가 속한 교회에서조차 쫓겨난 작가가 아니었던가.
지브란은 <인간의 法 아래 고생하는 희생자들>이라는 시에서 '법 아래 신음하는 희생자들'에 대해 "그늘에서 자라는 꽃과 같아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그대의 꽃씨를 햇빛 속으로 나르고 그대는 그 햇빛 속에서 다시 아름답게 살게 될 것"이라 노래한다. 지브란은 "내 사랑하는 弱者들"이라 위로하며 "그대는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을 갖고 태어났으나" 희생된 여자(존재)라 노래하며 "고통받는 형제들이여, 내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의 압박자들을 깔본다"라는 강한 어조로 마치 약자를 위로하는 헌시처럼 이 詩를 마치고 있다.
지혜(wisdom)라는 단어는 칼린 지브란이 유난히 좋아한 단어였다. 은밀한 억압이라는 '연성 독재의 유령'이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는 지혜있는 자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될까?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를 은밀히 억압하고 통제하는 연성 독재는 이미 그 은밀한 사슬을 곳곳에 깔기 시작했다. 칼릴 지브란은 "그냥 재능 있는 시인이 아니라 깨달은 스승이기도 했다"는 지적이 왜 그렇게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글을 마치며 마른 흙처럼 표피가 떨어져나가는 칼릴 지브란의 문고판 시집(1974년, 민음사 간 정가 300원)을 펼쳐보았다. 수많은 책들이 지하 교회 홍수로 물들이 가슴까지 넘쳐흘러 버려졌으나 이 책을 버리지 못한 것은 바로 이때, 이 글을 쓰기 위함이었을까? 그저 할렐루야!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신학자, 시인)
#조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