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 진주 선교, ‘공간’으로 다시 본 신앙의 역사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37회 학술발표회서 정병준 교수 발제
서울장신대 정병준 교수. ©기독일보 DB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 정병준)가 지난 11일 오후 온라인 줌(Zoom)을 통해 제437회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이날 학회에서는 정병준 서울장신대학교 교수가 ‘해방 이전 진주 선교에 대한 공간적 이해: 선교 공간에서 실천 공간으로 전환’을 주제로 발표했다.

정 교수는 “호주선교회가 활동한 경남 지역의 교회사 연구는 오랜 기간 지역사 연구자들의 헌신과 선교사 문서 번역을 통해 강화되어 왔다”며 “특히 진주는 향토사 연구의 활발한 전개로 다른 경남 지역보다 교회사 연구가 풍부하게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교회의 형성은 단지 선교의 결과만이 아니라, 토착 그리스도인들의 자발적 신앙 수용과 실천, 그리고 의심과 갈등의 시기를 거친 결과였다”며 “진주 지역 교회사 연구는 이러한 토착교회가 지역 사회와 지리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수용하고 주체적으로 발전했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공간의 의미를 단순한 ‘배경’이 아닌 ‘역사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보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진주는 식민지 수탈 구조 속에서 형성된 도시 공간이었으며, 초기 진주 교회사는 그 안에서 신앙적 대안 공간을 창출한 실천의 역사였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해방 이전 진주 지역에서 전개된 호주장로회 선교 활동을 공간적 시각에서 재조명하며 “선교 공간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장소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변화를 이끄는 창조적 실천의 장이었다”고 했다.

또한 “호주장로회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의 죽음이 경남 전역을 선교지로 인식하게 한 계기가 되었고, 휴 커를(Hugh Currell)이 1903년 선교지 분할협정 이후 진주를 경남 선교의 거점으로 정했다”며 “커를은 1905년 외성 북문 안에 거처를 마련하고, 시장 인근을 전략적 중심지로 삼아 의료와 교육을 통해 교회를 성장시켰다. 교인들은 1906년 자립 원칙에 따라 선교부지 인근에 두 번째 예배당을 설립했고, 커를은 병원·주택·학교를 함께 배치해 지속 가능한 선교 거점을 구축했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이러한 공간 전략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식민 권력이 장악한 중심부를 피해 민중과 가까운 곳에서 실천적 선교를 이루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정 교수는 또한 선교 공간이 실천 공간으로 전환된 세 가지 사례를 제시했다. 그는 첫째로 백정 동석 예배를 통해 신분 차별을 거부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을 증언했던 사건을 언급하며 “이 예배는 평등의 이상을 보여줬지만, 동시에 교회 내 갈등과 분열을 초래했다”며 “결국 백정 교인들의 이탈로 이어졌지만, 교회가 신분 차별 문제를 신앙의 실천 과제로 직면한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이어 둘째로, 3·1운동 시기 진주 지역 시위를 언급했다. 정 교수는 “진주에서는 평안동, 비봉동 등 진주교회와 광림학교, 배돈병원 인근에서 기독 청년과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며 “이는 선교 공간이 단순한 종교적 장소를 넘어 민족의식과 저항 의식이 형성된 시민 공동체의 중심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위 이후 교회는 일제의 감시로 위축되었지만, 고난을 함께 겪은 공동체로서 더 깊은 신뢰를 얻었고, 이후 새로운 선교의 기회를 열었다”고 했다.

또 셋째로, 공창폐지운동과 여성구제사역이 진주 선교 공간에서 전개된 점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유곽이 도심 한복판에 밀집해 있었고, 선교 공간과 도덕적 경계를 이루며 공존했다”며 “여선교사들은 성매매 실태와 여성, 학생들의 피해를 직접 목격하며 공창 문제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선교 공간은 단순한 복음 전파의 장을 넘어 구조적 악에 맞서는 윤리적 실천의 공간으로 변화했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진주의 사례는 공간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선교와 사회개혁 담론이 생산되고 실현되는 역사적 실천의 장임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번 발표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지도와 지리정보시스템(GIS) 분석을 활용한 공간 이해 방식이었다”며 “선교 공간은 특정한 구조와 맥락 속에서 실천이 이루어졌음을 GIS 분석을 통해 입증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예를 들어, 선교지부의 병원, 교회, 학교, 주택은 식민 권력의 중심부와 거리를 두고 민중과 가까운 지역에 전략적으로 배치되었으며, 옥봉리 백정 마을과 교회의 위치는 동석 예배의 가능성을 뒷받침했다”며 “진주 3·1운동 주동자들의 주소지, 시위 장소, 선교 시설의 분포를 함께 분석한 결과, 선교 공간이 사회운동의 실제적 배경이 되었음이 드러났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정 교수는 “GIS 분석은 선교 공간을 물리적 구조, 사회적 실천, 신학적 상징의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조망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며, 향후 역사 연구에서 공간적 방법론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한편, 이 밖에도 이날 한강희 교수(한신대)가 ‘대한기독교장로회의 4·19혁명에 대한 태도와 개신교 반공주의의 균열’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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