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11) 절망의 수렁에서 부른 노래

오피니언·칼럼
설교
시130:1-8
이희우 목사

일본 여성 다하라 요네꼬(田原米子)는 어머니의 과잉보호 속에 살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홀로서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졌다. 그 결과 두 다리와 왼팔이 잘리고 오른팔만 남았는데 그것도 손가락 두 개는 잘렸다. 비참하고 절망적인 모습, 너무 불편해서 스스로 죽기조차 힘든 상태이다. 그런데 극도의 절망감으로 몸부림을 치며 살던 어느 날부터 한 신학생이 집요하게 병원 전도를 와 기도해주며 복음을 전하면서 마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서 복음을 듣게 한 그 신학생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 이후 사모가 된 요네꼬가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生きるってすばらしい 이키룻테 스바라시이)는 책을 냈다. 두 다리와 한쪽 팔을 잃고 남은 한 손마저 손가락이 세 개밖에 없는 여인이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고 사랑과 기적, 감동의 생명 찬가를 낸 거다. 그녀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사는 생활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시편 130편은 7개의 참회시(6,32,38,51,102,143편) 중 하나, 절망 중에 소망으로 부른 노래다. 언제 돌아갈지 기약 없는 바벨론 포로 생활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인데 이 시의 특징 중 하나는 홀수 절마다 ‘여호와’의 이름이 들어있다는 거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었나이다”(1절), ‘여호와’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현존하셔서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다. 이어서 “여호와여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3절), 바벨론 포로 생활이 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5절), 용서의 말씀을 기다린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7절), 은혜와 용서를 확신한다.

이 짧은 시에 ‘여호와’가 4번 나오고, ‘주’가 6번 나온다. 그만큼 여호와를 바라보고 여호와를 향해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하는, 시인은 철저히 여호와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이다. 홀수 절마다에서 여호와의 존재성을 부각시키며 그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인, 하나님을 ‘구속자’(Redeemer), 저당을 되찾는 자, 구원(Saver)로 선포하며 찬양한다.

비텐베르크 성의 한 탑에서 로마서를 읽다가 ‘탑의 체험’이라 불리는 유명한 체험을 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칭해진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깨달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구원의 교리를 잘 담고 있다고 32, 51, 143편과 더불어 ‘바울의 시편’이라고 부른 아름다운 참회시, 시 130편에 “절망의 수렁에서 부른 노래”라는 제목을 붙여본다.

부르짖는 기도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1절), 히브리어로 1절에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는 ‘마아마킴’(מַעֲמַקִּים), ‘깊은 곳’이다. 높은 산의 아래쪽 골짜기일 수도 있고, 바다 속의 심연(深淵)일 수도 있고, 아래가 잘 보이지 않는 수렁일 수도 있다. 예상치 못한 큰 고난 또는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다. 육체가 아프거나 정신적 고뇌가 자신을 사로잡는 곳, 가만히 앉아있거나 침묵할 수 없는 곳,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인생 밑바닥,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다.

시인은 미래가 닫힌 이 ‘깊은 곳’에 빠져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고백한다. 그곳은 불순종으로 인해 요나가 들어가야 했던 물고기 뱃속(욘2:1) 같은 곳이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 깊은 곳, 사방이 꽉 막힌 곳, 다시 말해 죽음의 장소, 절망의 장소에서 기도했다. 아마 부르짖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사람들은 죄를 깨닫고 진실해진다. 사람이 바뀐다. 깊이 있는 사람이 되는 거다. 그래서 130편 시인의 깊은 곳에서 부르짖었다는 것은 시인의 깊이 있는 신앙을 보여주는 표현일 수도 있다.

때로 하나님은 깊이 있는 신앙을 위해 성도를 광야로 인도하신다. 광야, 힘들지만 성도에게 꼭 필요한 학교 같은 곳이다. 학교가 졸업이 있듯이 광야는 계속 머무르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신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광야는 꽃이 피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뀐다.

영성가이며 시인이자 왕이었던 다윗도 비슷한 기도를 여러 번 드렸다. 다윗이 ‘깊은 곳’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시편 23편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4절)일 것이다. 사면초가 상태,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을 때 쓰는 표현이다. 숨바꼭질하시는 듯한 하나님, 다윗은 숱한 밤 “하나님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하나님이 함께하며 보호하신다. 그리고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40:2), 보고 계실 뿐만 아니라 결국 건져내고, 더 든든하게 세워주신다.

욥도 그랬다. ‘묻지마 환난’을 당했던 욥은 하나님을 만나려고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앞으로 가도 안 계시고 뒤로 돌아가 봐도 보이시지 아니하고 좌우 어디에서도 만나 뵐 수 없어 절망한다. 그런데 숨어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꼭꼭 숨어서 일부러 만나 주시지 않는다. 잔인하실까? 절망케 하려고 그러시나?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단련하시려는 것, 목적이 있으시다. 기억하라. 주님은 깊은 데서 부르짖는 성도의 기도를 들으신다.

130편 시인의 기도는 죄와 관련이 있다. 그의 죄에 대한 인식은 마치 질병처럼 뼈를 찌르고, 마치 죽음을 앞둔 것처럼 심각하다. 그래서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다”(1절). “내 소리, 나의 부르짓는 소리”(2절)라며 귀를 기울여 달라고 소리치며 호소한다. 그리고 응답을 기다리는데,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6절)라며 ‘기다림’을 두 번이나 반복한다.

그저 습관처럼 하는 고백이 아니다. 밤새 파수를 서는 파수꾼이 교대 시간을 간절히 기다리듯 날 새기를 기다리는 시인, 질병의 고통 때문에 잠 못 이루는지 사업 실패 때문인지 자녀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어둡고 칙칙한 지하 감옥에 갇혔는지 너무 힘들다. 분통이 터진다. 채찍에 맞은 등짝에 깊은 고랑이 생기고 밤새 찌르는 것 같다. 죄 때문인가?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르짖는다. 절규한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이게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기도다.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이 기도는 인생길을 걸으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짜기 같은 깊은 곳’을 경험한다면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기도, 우리의 기도가 될 수도 있다. 자포자기하거나 등 돌리지 말고, 좀 더 깊이 있는 기도, 좀 더 진지한 기도, 부르짖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래야 ‘깊은 인격’, ‘깊은 신앙’을 소유하게 되는 것, 이게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영적 자산이 될 줄 믿고 절망의 때를 맞는다면 부르짖는 기도로 이겨내시기 바란다.

용서를 구하는 기도

기도하는 시인은 무엇보다 먼저 죄악의 문제를 다룬다.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3절), 자신이 ‘깊은 곳’에 처하게 된 것이 죄악 때문임을 암시하며, 주께 용서를 구한다는 고백이다. ‘죄악’(עֲוֹנוֹת 아보노트)은 복수명사, 하나님 앞에 설 수조차 없는, 많은 죄로 얼룩진 존재임을 자인한 것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 시인은 죄 용서, 사유하심이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한다. 4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용서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다며 용서받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겠다고 결단한다. 지금까지는 마치 하나님 없는 삶,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삶을 살았지만 사유하심을 계기로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겠다는 거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죄에 대해 반드시 용서를 구하고, 주님과 좋은 관계로 교제하며 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44:22). 주님은 어떤 죄든 자복하면 용서해 주신다.

다윗은 최고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충신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걸 숨기려고 충신 우리아를 죽게 한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그의 죄를 지적하시는데 다윗이 누군가? 이스라엘의 왕이요 절대 권력자 아닌가? 그런데도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합리화하거나 선지자를 내치지 않고, 자기 죄를 인정한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삼하12:1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51:3-4), 다윗은 눈물을 흘리며 자기 죄악을 숨김없이 고백하며 회개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용서를 선포하신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12:13).

이거다.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중요하다. 130편 시인은 아마 용서하신다는 응답이 있을 때까지 부르짖었던 것 같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주님 앞에 죄악을 낱낱이 고백하고 죄 사함받는 것만이 살길이다. 감사한 것은 주님이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해 주신다는 거다. 그렇다면 충만하지 못했던 것도, 충성하지 못했던 것도 다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며 사시기 바란다.

기다리는 기도

사방이 꽉 막혀 바랄 것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는 상황, 이 상황에서 시인은 인생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5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7절), 시인은 “여호와를 기다린다”고 했다. 시편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단순한 기다림, 시간만 보내는 게 아니라 초점은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는 거다. 여기서 ‘기다린다’는 동사,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사40:31)에 나오는 ‘앙망하다’와 같은 단어다. 문자적 의미는 ‘줄로 묶다’, 기다린다는 건 우리를 하나님께 묶는 거다. 하나님이 그 줄을 당겨주시길 기다리며 소망하는 거다.

그런데 시인은 특별히 ‘주의 말씀을 바란다’고 했다. “용서한다”는 그 말씀 한 마디면 충분하다는 것, 포로로 끌려가 머나먼 바벨론 땅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멸시당했던 이스라엘, 어느 날 심판이 끝났다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사40:1-2), 죄 사함! 해방이라는 엄청난 말씀, 이 한 마디로 충분했던 것을 생각했을까? 주의 말씀을 바란다.

마태복음에 보면 하인이 중풍병으로 큰 괴로움을 당하는 것 때문에 예수께 나아간 가버나움 백부장이 있다.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시자 백부장은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8:8) 그런다. 자기도 군인이라 남의 수하에 있고, 자기에게도 부하가 있는데 “그들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하면 한다”며 말씀만 해 달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시며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신다. 성경은 그 즉시 하인이 나았다고 했다. 말씀을 기다리는 자세, 이게 우리의 자세여야 한다.

시인은 파수꾼처럼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디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6절), 파수꾼은 경계하는 군인, 부대원들의 생명과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은 자다. 그가 아침을 기다리는 건 인간의 기다림 가운데 가장 간절한 기다림, 극도의 피곤함 가운데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기다림이다. 지루하고 피곤해도 결코 졸거나 포기할 수 없다. 동트는 아침, 교대 시간만 학수고대하는 것, 시인은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간절함과 인내가 파수꾼보다 더하다고 한다. 맞다. 그래야 한다.

그런데 혹시 우리의 기다림보다 하나님의 기다림이 더하다는 생각을 해봤나? 이사야는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사30:18)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했다. 벌떡 일어나시는 하나님, 예수님의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거다. 때리거나 혼찌검 내려고 기다리시나? 아니다. 발목을 붙들어 매려 하시나? 그것도 아니다. 큰아들은 그것을 기대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그럴 생각이 없으시다. 씻기고, 옷 갈아입히고, 새 신발 신기고, 반지 끼워주고, 잔치 벌이기 위해 기다리신다.

이사야서에 이어지는 말씀은 더 감동이다.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30:18), 절망의 수렁에 빠지더라도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다. 기다리는 복! 우리가 누릴 복이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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