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열악한 성당에 새 주임 신부가 부임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엄처 몰려들었다. 강론이 좋아서도 아니고, 특별한 은사가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고해성사하겠다고 앞다투어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알아본즉 이유는 이 신부의 귀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약점이나 허물, 그리고 죄와 상처를 남들이 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감추려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감추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하도록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후손들이 잊지 않기를 소망했다. 시편 129편도 시대가 겪는 애환과 고난, 그리고 역사를 잊지 않도록 지은 시, 순례자들도 성전에 올라가며 이 노래를 불렀다.
시는 탄식으로 시작된다.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1절), 고난으로 인한 상처가 너무 컸을까? 다음 절에서도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2절), 1절과 똑같은 고백을 반복한다. 특이한 것은 3절까지 1인칭 대명사가 5번이나 나온다는 거다. “내가” “나를” “내 등을”, 마치 한 사람의 개인적 상처에 대한 탄식처럼 보이는 1인칭 대명사를 반복 사용했다. 그런데 4절부터 1인칭 대명사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개인이 아니라 ‘시온’, 즉 민족공동체가 당한 고난으로 볼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런데 만일 민족 차원에서 당하는 고난이라면 1절의 “내가 어릴 때부터”라는 표현은 출애굽 때의 고난이나 노예 생활, 왕국 건설 이전의 혼란 상황에서 겪었던 고난을 의미할 것이다. 다만 1절에서 노래한 걸 2절에서 또 노래했다면 그 고난은 뼈에 사무친 고난일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국민 통합은 요원하다. 나라에 덮친 어둠이 점점 더 짙어져 가는 것만 같다. 정치 불안과 경제 불안, 안보 불안 등 날로 더 벼랑 끝으로 가는 국면이다. 극한 이념 갈등에 물가는 계속 오르고, 주택시장의 거래 침체도 계속되고, 남북 관계의 진전없이 우리만 9·19 군사 합의 선제 복원 등으로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거기에 인류 역사상 겪어보지 못한 탈종교 현상, 교회 비난을 사명으로 아는 엔티 크리스천들이 날로 더 늘고, 가나안 교인들은 예수 믿는다면서 유대인이 유대인을 핍박하듯 교회를 비난한다. TV나 넷플릭스 그리고 SNS, 온라인에는 반기독교적 정서가 난무한다. TV에 동성애, 마약, 무당, 폭력과 성적 자극이 넘친다. 한 마디로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환난 시대, 교회는 벼랑 끝에 서 있다. 아니 교회가 심각하게 박해받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벼랑 끝에도 계시고 환난 중에도 계신 분, 우리말 성경 개역개정판에 ‘함께’라는 단어가 1,359회나 나온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 그렇다면 개인적 고난이든 민족적 고난이든 두려워할 이유 없다. 신앙은 고난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이다. 인생 최고의 자산인 신앙으로 고난을 축복으로 바꿔야 한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시편 129편이 고난 속에서의 인내와 하나님의 신실한 구원을 강조한다며, 이 시를 ‘인내의 시편’이라 했다. ‘한길 가는 순례자’답게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끈기있게 나아가야 한다는 거다. 이 시편 129편에 “고난의 밤에 부른 노래”라는 제목을 붙여 본다.
평생 고난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1-2절), 시인에게는 어릴 때부터 누적된 트라우마가 있다. ‘상처’가 있다는 것, 증상은 반복 기억, 환각, 극도의 불안과 긴장, 불면, 일상생활 기피 등인데 그게 어릴 때부터 받은 고난으로 인한 상처라면, 그것도 여러 번 받아 누적되었다면 평생 그 아픔을 끌어안고 살았다는 것, 치명타에 시인은 괴로움을 두 번이나 토로한다.
상처받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자기비하, 자기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고, 한숨과 탄식으로 살며 인생을 원망한다. 그렇다. 모든 행동에는 수치나 상처를 덮으려는 몸부림이 있다. 어떤 권사는 트로트를 듣다가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노래는 심수봉 님의 ‘백만 송이 장미,’ 그 노래를 듣다가 누구는 백만 송이 꽃을 피우는 사랑을 하는데 우리 집 인간은 반백 번 생일이 되고, 결혼기념일이 되어도 장미 한 송이도 사오지 않았으니 지구상에 나 같은 여자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며 상처가 되었다는 거다. 하지만 자기 비하하지 말라. 세상에 그런 여자 많다.
사람들은 외부뿐만 아니라 축복의 통로인 부모로부터도 상처받고, 자식으로부터도 상처받고, 심지어 손주로부터도 상처받으며 산다. 직장에서 받는 상처는 얼마나 깊으면 월요일 출근길이 지옥길일까? 어떤 집사는 남편 옷을 세탁하려고 안주머니를 뒤졌더니 사직서가 나오더란다. 그래서 눈물이 핑 돌더란다. 그뿐인가? 교회에서 상처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
수많은 성도들로부터 존경받는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인 김장환 목사께서 설교 중에 “아내와 한국에 온 후 성격 때문에 여러 번 다투었다”다고 하셨는데 다투신 이유는 치약 때문이라고 하셨다. “나는 치약을 밑에서부터 짜는데 내 아내는 위나 중간이나 편한 대로 꽉 눌러 짜서 여러 번 밑에서부터 짜라고 했지만 소용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하루는 치약을 두 개를 사서 하나는 김장환, 또 다른 하나는 트루디라고 이름을 써 붙이고, 본인 치약에 크게 “만지면 죽인다”라고 써 붙이셨단다. 그런데 교회 부흥회를 하면서 강사를 사택에 모셨는데 실수로 치약을 가져오지 않은 부흥강사가 1주일 동안 사택에서 치약 없이 이를 닦으셨단다. 치약에 “만지면 죽인다”는 경고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내가 치약을 어떻게 쓰든 말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셨단다. 고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남편 구박에 바뀐 아내 없고, 아내 잔소리에 바뀐 남편도 없고, 자식 불평에 바뀐 부모 없고, 부모 꾸중에 바뀐 자식도 없다. 맞다. 고칠 수 있는 게 있고, 고칠 수 없는 게 있다. 그리고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자기 비하도 하지 말고, 원망도 하지 말고, 자기를 바꾸어여 한다.
상처받았을 때 나타나는 두 번째 현상은 복수심으로 사는 거다. 넷플릭스 드라마 중 ‘더 글로리’라 드라마가 있었다. 주인공은 연진 역의 송혜교, 청소년기에 당했던 왕따와 폭력으로 영혼까지 부서진 한 여인의 인생을 건 치밀하고 처절한 복수 이야기다. 성인이 된 주인공이 “나의 지옥에 온 걸 환영해”하며 치밀하게 복수하는 모습은 섬뜩하다. 129편 시인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어서 2절에서,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라고 했지만 복수를 위해 시련과 고통을 극복했다는 것보다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셨다고, 하나님이 복수해주셨다고 노래한 것이다.
증오심이 우리를 지배하게 하면 안 된다. 가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러면 안될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았다고 말하며 훌쩍거리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될 사람이 어디 있나? 상처는 대부분 내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 나보다 먼저 믿은 사람,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으로부터 받는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 깊은 상처 받을 일은 거의 없다.
상처가 별이 된다(Scar into Star)는 말이 있다. 룻기에 보면 나오미는 흉년이 들자 모압으로 이주했는데 그 모압 땅에서 남편 죽고 두 아들마저 다 죽는 지옥을 경험한다. 하지만 철저한 회개와 자기성찰을 통해 베들레헴(떡집)으로 돌아오면서 ‘마라(쓴 뿌리)가 나오미(기쁨) 되고, 상처(Scar)가 별(Star)이 된다.
요셉도 그랬다.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어릴 때부터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형들 입장에서 보면 요셉은 혼자 채색옷 입은 꼴보기 싫은 존재, 게다가 고자질쟁이다. 자기들이 잘못한 일을 다 아버지에게 이른다. 설상가상이랄까? 하루는 “형님들, 내 꿈에 밭에 내 곡식단이 서 있는데 형님들의 곡식단이 내 곡식단에 다 절을 하던데”라며 염장을 지른다. 미움이 분노로 바뀐다. 그래서 아버지 심부름으로 온 요셉의 옷을 벗기고 웅덩이 던진다. 그러다 마침 지나가는 상인이 있어서 노예로 판다. 동생의 살려달라는 애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형들은 요셉이 원인제공을 했다며 우리가 피해자라고 항변할 수 있다. 하지만 상처가 더 큰 쪽은 요셉이다. 애굽까지 가서 노예가 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셉을 높여주신다.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신 것, 별이 되게 하신 거다. 나이 17세에 노예로 팔려갔는데 13년 만인 서른 살에 총리가 되었다. 그후 7년간 큰 풍년이 오고, 그 다음 7년간 애굽뿐만 아니라 인근 나라들까지 다 큰 흉년을 맞는데 2년째가 되었을 때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온 형들이 요셉이 어릴 때 꿈을 꾸었던 대로 자기에게 절을 한다. 22년 만에 꿈꾼 대로 이루어진 거다. 하지만 보통 사람 같으면 “못된 형들, 나를 노예로 팔았지?” 그러면서 22년 동안 온갖 고생 다 하면서 생긴 상처를 거론하며 하나하나 다 갚겠다고 할 만한 상황에서요셉은 성경 그 어디에도 복수했다는 기록이 없다. 밉지 않았을까? 아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 미워하고 복수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맡겼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평생이 고난이더라도, 상처가 많이 아프더라도 마지막 심판의 날을 기대하며 참고 살아야 한다. 고난 당한 것이 오히려 유익이 될 것이다(시119:71).
하나님은 우리 편
시인은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시다”(4절)고 노래한다. 상처 때문에 너무 힘든 고난의 밤, 마치 ♬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 일어도 안전한 포구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가든지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함이라♬ 곤한 내 영혼이 쉴 곳, 풍랑 일어도 안전한 포구,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님 팔을 의지한다는 찬양을 하는 것 같다.
그의 시선은 고난이나 상처가 아니라 하나님께 고정된다. 그리고 괴로움에 지쳐 야윈 사람의 등줄기에 도드라진 척추뼈와 갈비뼈를 보며 시상이 떠올라 이렇게 표현했는지 아니면 고통의 생생함을 강조하기 위해 밭 가는 자들이 땅을 파듯 등을 판다고 이렇게 표현했는지 몰라도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은 것 같다”(3절)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여호와는 의로우십니다”(4절), “야훼 차디크”(צדיק יהוה), 채찍에 맞아 그렇게 되었을까? 아니면 마음의 상처가 그렇게 깊다는 걸까? 시인은 누울 때마다 밭고랑 같은 등짝의 깊은 상처가 너무 아팠다. 그런데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여기서 의롭다는 것은 도덕적 성품이 아니다. 여호와가 내 편 되셔서 내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원수를 무너뜨리고, 운명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갈망한 거다.
혹시 가난한가? 상처받은 약자인가? 기억하라.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알고 계신다. 가장 적당할 때 반드시 개입하실 거다. 다시 회복시켜 주실 거다. 믿으라.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다.
“악인, 넌 이제 끝이야!”
시인은 “악인의 줄을 끊으셨다”(4절)고 노래한다. 잠언 21:12의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라는 말씀을 연상케 한다. 잠언 말씀에서 ’감찰하신다‘는 것은 ‘살피신다’는 뜻, 환난을 당할지라도 삶의 목자되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고 보호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악인의 줄을 끊으셨도다”, 하나님의 진노이자 심판을 심플하게 한마디로 표현했다.
시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이자 건물의 정문 같은 1편에서 말씀하신 복 있는 사람(히브리어 ‘아쉬레이 אשרי는 ‘의인’ 챠디킴 צדיקים과 같은 의미지만 시편이나 지혜문학에서 사용되는 단어)과 악인(레솨임 רשעים)을 주제로 다룬 성경, 6절이 ‘시편 1편을 이해하는 열쇠’ 구절이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악인’이라는 단어는 시편에만 84회나 나온다. 그만큼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인들에게 시달렸다는 것,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이 악인의 줄을 끊으셨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너무 약하고 평범하다는 평가도 있다. 또 5절의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라는 표현과 6절의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를 것”이라는 표현, 그리고 8절의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이 표현들도 마찬가지, 너무 평범하고 온건하다는 평가지만 개인적으로 “악인의 줄을 끊으셨다”부터 그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에게도 축복의 인사를 받지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될 것”이라는 표현까지 129편 시인의 악인에 대한 자세가 오히려 쌈박한 것 같다.
시편 3편의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소서”(7절)나 140편의 “뜨거운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그들로 하여금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10절), 또는 35편의 “멸망이 순식간에 그에게 닥치게 하소서”(8절) 정도라야 속이 시원할까? 여기서 중요한 건 내 속 시원한 것보다 또 다른 상처를 남기면 안 된다. 어릴 때부터의 고난? 이미 적응되었고, 지금까지 잘 이겨왔다. 또 오히려 그 고난이 자신을 성숙하게 했다. 절대 고난 타령만 하면 안 된다. 상처 타령이 습관이 되면 안 된다. 힘들더라도 멈추고 원수를 용서하는 단계까지 올라서야 한다. 기억하라. 용서는 강자가 하는 거다. 129편 시인의 악인 저주는 그저 잔불 정리 수준, 하지만 악인이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면 고난의 밤이 깊어가도 희망의 아침을 기대해도 된다. 찬송하며 승리하시길 축복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