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시인은 ‘눈물’이라는 시에서 눈물을 ‘나를 속일 수 없는 한 다발의 정직한 꽃’, ‘기쁠 때나 슬플 때 피는 꽃’이라며 그 ‘눈물이 기도가 되고, 뼛속으로 흐르는 음악이 된다’고 했고, 철학자 괴테(Goethe)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 눈물로 표현되는 괴로움과 힘겨움이 사람을 성숙하게 해준다는 거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아온 사람들은 다 영육이 고단하고 갈급한 눈물의 사람들이었다. 귀신들린 딸로 인해 개 취급을 당하며 구원의 손길을 간청했던 가나안 여인(막7:24-30), 에바다의 기적을 맛본 귀먹고 말이 어눌했던 사람(막7:31-37),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요9:1-10), 12년 간 혈루병을 앓았던 여인,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던 삭개오, 모두 다 육신의 병과 정신적 고독에 시달리고, 사람들의 멸시, 천대를 견뎌야 했던 눈물의 사람이었다.
시 126편은 눈물의 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을 회상하며, 감격의 눈물로 부른, 이스라엘의 아픈 역사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편이다. BC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무너지고 망했던 이스라엘, 제사장과 유대의 엘리트들은 죄다 포로로 잡혀가거나 이집트로 달아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바벨론 제국은 영원할 것이고,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BC 539년에 꿈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바벨론 제국이 바사, 즉 페르시아에 의해 무너진 거다. 고레스가 바벨론에 무혈입성하며 제국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때 혜성같이 등장한 제2 이사야, 이사야서 40장에서 55장까지를 선포한 선지자다. 이름도 없이 ‘야훼의 종’이라 불리며 이스라엘의 해방을 외쳤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40:1-3), 돌아갈 대로를 준비하라는 거다.
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바벨론 생활에 익숙했기 때문일까? 제국의 주인만 바뀌었지 포로 상태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지자를 무시했다. 그리고 위험인물로 여기며 입틀막했다. 그래서 제2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 그가 예언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53:5)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지만 먼저 이사야 자신의 운명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 이사야의 말처럼 해방이 찾아왔다. 숱한 날 바벨론 강변에서 흘렸던 눈물이 기도였는데, 뼛속으로 흐르는 음악이었는데 해방이다!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 제국이 1년 후인, BC 538년에 정책을 바꾸면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거다. 고레스 칙령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해방령이 된 셈이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누렸던 것과 비슷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레스 칙령으로 고국으로 돌아오는 광복의 기쁨을 누린 것처럼 우리도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의 기쁨을 맛본 것, 그래서 누구보다 그들의 기쁨을 잘 안다. ‘기쁨’이 이 시의 키워드다. 기쁨으로 맞은 그들의 광복, “눈물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여본다.
꿈 같은 현실을 맞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다”(1절), 너무 뜻밖의 일이라는 말이다. 70년 만에 맞는 꿈 같은 현실, 그들은 그 감격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2-3절). 공동번역을 보면 “꿈이든가 생시든가! 그날 우리의 입에서는 함박 같은 웃음 터지고, 흥겨운 노랫가락 입술에 흘렀도다. 야훼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 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귀환이 그들에게 복음이었다. 해방되는 복음, 그리고 구원! 민족이 해방되듯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이 해방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죄와 욕망의 포로, 마귀의 포로, 권력의 포로에서 해방된 것, 민족적이든, 개인적이든 해방은 사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기에 기쁨이요 감격이다. 기억하나? 우리는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 함박웃음이 터지고, 흥겨운 콧노래가 흘러나오며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믿는 즉시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를 얻고, 질병으로부터 반드시 고침받는 것은 아닐지라도 믿는 즉시, 그리고 항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기쁨과 감격’인데 날마다 기쁨과 감격 맞나? 주변 사람들도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맞은 꿈 같은 현실, 단순히 고레스의 칙령 때문인가? 표면적으로는 맞지만 시인의 고백은 다르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1절), 이 꿈 같은 일을 이루신 분은 고레스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이다. 칙령을 내린 고레스의 배후를 하나님으로 본 것, 신본주의적 역사관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선언이다. 우리도 이래야 한다. 이래야 하나님의 은혜로 꿈 같은 현실을 살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산다. 부디 예배드린 다음에도 지옥에서 출장 나온 것 같은 표정 짓지 말고, 정리 안 된 냉장고처럼 온갖 잡념으로 꽉 찬, 심각한 표정만 짓지 말고, 활짝 웃는 사람이 되라.
중국 격언에 “웃는 얼굴이 아니면 장사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찌푸린 얼굴로 손님 맞는 집에서 물건 사고 싶을까?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행복해서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니라, 노래 부르니 행복해진다”고 했다. 기뻐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기뻐진다는 거다. 조선의 명의 허준은 “웃는 얼굴은 어떤 보약보다 좋다”고 했다. 웃음은 건강한 영혼의 표현, 기억하라. 웃기 위해 눈물로 씨를 뿌리는 사람은 꿈 같은 현실을 맞을 수 있다.
회복을 기도하다
귀환이라는 꿈 같은 현실을 맞은 이스라엘, 처음에는 행복했다.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에 돌아왔으니 얼마나 좋았겠나? 고향의 거리는 물론 무너진 성벽의 돌 하나하나까지 다 정겨웠을 거다. 비워두었던 고향집이 엉망이 되었어도 거기 누워 하늘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나게 큰 행복 아니었겠나? 그런데 그 행복,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서 시인은 “대사를 행하셨던 여호와여 이제 다시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4절)라고 노래한다.
시인인 김현승 장로께서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라고 노래했는데 그들이 그리워했던 고향,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뒤뜰에는 닭이 뛰노는 정겨운 풍경이 아니다. 현실은 혹독했다. 살던 집이 불타고, 동네는 황폐해지고, 성전은 부서지고, 성도 무너졌다. 굶주림과 폐허, 불안이고 불편이고, 모든 것이 막막하다. 무엇보다 포로기에 들어와 정착했던 이방인들의 저항과 방해가 극심하다. 성전 재건도 방해하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도 방해한다. 결국 눈물로 씨를 뿌려 22년 후인 BC516년에야 성전을 완공하고, 예루살렘 성벽은 근 100년 후인 느헤미야 때에야 완공했다. 그 사이 내부적으로도 공동체 의식이 와해되고 사회정의가 실종되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들이 흘린 눈물은 핏물이 되었다.
하지만 피 흘림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Bleeding with blessing)고 했던가. 하나님이 또 다른 선지자를 통해 격려해 주신다. 제2 이사야의 정신을 잇는 제3 이사야, 그는 이사야서 56장에서 66장을 외쳤다. “실망하지 마라.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는 메시지, 그 중 이사야 60장 1절에 보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된 시온으로 돌아올 것이고, 시온이 만국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지가 되며, 열방이 시온에서 복을 나누는데 그 복이 메시아 잔치가 될 것, 다시 말해 시온이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거다.
그들은 기대를 담아서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4절), 아직 바벨론에서 돌아오지 못한 포로들이 속히 귀환하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한 거다.
묻는다. 이 시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뭔가? ‘우리’다. 6번 나온다. 기쁨도 함께, 축복도 함께, 아픔과 상처를 주는 공동체가 아니라 기쁨과 감동이 되는 공동체가 되길 기도한 거다. 그리고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달라’고 했는데, 여기서 ‘남방’은 네게브 사막, ‘돌려보내소서’는 히브리어로 슈바(שובה), 강세명령형이다. 약속(렘29:14, 암9:14, 습2:7)에 근거하여 꼭 돌려보내달라고 강력하게 청원한 거다. 우리도 북한에 10년 이상 억류된 6명의 선교사들의 석방을 이렇게 청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남방 시내’는 이스라엘 남쪽의 사막지대를 흐르는 ‘와디’라고 부르는 강이다. 여름 건기 때에는 말라있는, 그래서 평상시에는 길이고, 황무지 같지만 겨울 우기에 비가 내리면 창일한 강물이 되어 흐른다. 생명이 살아난다. 꽃이 피고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다.
순례자의 회복을 위한 이 눈물의 기도는 이사야 선지가 35장에서 꿈꾸었던 바로 그 비전이다.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35:6-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되듯 인생이라는 황무지에 장미꽃이 만발한다는 거다. 인생 대역전이다.
“불가능한 일을 이루셨던 하나님, 이제 다시 그 능력을 보여주십시오! 우리 입에서 찬양과 함박웃음이 다시 피어나게 해주십시오! 다시 한 번 우리 민족에 대사를 행하소서.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주소서” 우리도 회복을 위해 눈물로 기도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기쁨으로 거두다
우리나라의 해방은 준비되지 않은 해방이었기에 그 결과가 남북 분단이었고,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치열하게 대치하는 비극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해방은 준비된 해방, 그걸 성경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다’고 표현했다. ‘비가 내릴 희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씨 뿌리는 농부의 탄식’을 표현한 거다. 당시 농부들은 전혀 비 올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씨를 뿌렸다. 실제로 1차 포로귀환이 B.C. 537년에 이루어졌지만 2차는 79년 후인 B.C. 458년, 3차는 93년 후인 B.C. 444년이었다. 얼마나 암울했을까? 하지만 그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5-6절), 최악의 상황에서도 울며 씨를 뿌렸다. 그게 그들의 기도였고, 믿음이었다.
그들이 뿌린 씨는 무엇보다 말씀의 씨였다.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까지를 신명기 역사서라 하는데 이 책들은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가를 통렬히 반성하는 책들, 바벨론에서, 이집트에서 쓴 이 책들을 다시는 망하지 않겠다며 반성하며 뼈에 새겼다. 그리고 그 포로기에 모세오경을 한 권의 책으로 집대성했다. 구전 형태였던 율법들, 부족이나 지역별로 흩어져 있던 모세 전승을 제2의 모세라 불리던 학사 에스라가 최종적으로 집대성한 거다. 그들은 이 토라를 앉으나 서나, 들어오나 나가나, 걷거나 일하면서도 외우고, 가르치고, 마음 판에 새겼다. 그래서 포로기 이후에는 우상숭배라는 말이 사라지고, 오히려 너무 잘 지켜서 문자주의, 율법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회당과 안식일 제도가 생기고 정비된 것도 바벨론 포로기, 성전은 무너졌지만 그들은 안식일을 지켰다. 회당이 성전을 대신한 거다. 광야 같은 포로지에서 회당에 모여 말씀을 나누고 연구하고 가르쳤다. 그들에게는 회당이 성전이었고, 학교였고, 예배처였던 것이다. 이게 중요하다. 성전이 무너져도 여호와 신앙을 유지한 것, 그 신앙이 시온으로의 귀환을 낳았다.
믿으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 그런 예가 많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Livingstone, David)은 팔 불구에 육체는 질그릇,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폐병에 얼굴은 곰보,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3중고 인생, 인디언을 선교한 선교사 헨리 마틴(Henry Martyn)은 폐결핵과 악전고투, 명작을 집필한 소설가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은 결핵 말기,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는 평생 만성두통, ‘팡스’를 남긴 사상가 파스칼(Blaise Pascal)은 청년 시절부터 계속된 온몸 통증에 시달린 사람, 세기의 명작을 남긴 프랑스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Auguste Renoir)는 류머티즘 관절염 고통으로 비지땀을 흘린 사람, 비창, 월광, 열정 그리고 운명 교향곡 등 불후의 명곡들을 작곡한 악성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청각장애, 하지만 그들은 기쁨으로 단을 거둔, 그들은 눈물로 씨를 뿌린 사람들이었다.
탈무드에 보면 “천국의 문은 기도에는 닫혀 있어도 눈물에는 열려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눈물은 성수(聖水)”라 했다. 다윗은 시편에서 “찬송하라 주님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 밤새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시30:4-5)고 했고, “주님은 나의 슬픔을 기쁨의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의 나들이옷으로 갈아입히셨기에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한다”(시30:11-12)고 했다.
웃음은커녕 너무 괴롭고 화나는 시대, 고난과 눈물의 시대지만 예수 믿는 우리는 눈물로 씨를 뿌리는 소망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게브 사막에 강물이 흐르는 기적을 주고 기쁨의 단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큰일을 행하실 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인생의 굴곡을 지나 ‘기쁨으로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고 확신하며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