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미래 지향적 관계 구축에 의견을 모으며 '셔틀외교'를 재개했다. 회담 직후 발표된 공동언론발표문은 2008년 이명박 정부 이후 17년 만에 문서 형태로 채택된 것으로, 한일 양국이 공식적으로 합의된 결과를 담아낸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일 양국은 마당을 같이 쓰는 이웃이자, 글로벌 복합위기 속에서 공동 과제에 대응해야 하는 중요한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가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납북 피해자 문제와 관련해 “해결 노력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혀 지지를 표명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계승하겠다고 밝혔으나,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직접 사과는 언급하지 않았다.
양국 정상은 이번 회담에서 과거사와 미래 의제를 분리하는 ‘투트랙’ 접근법을 재확인했다. 경제, 안보, 사회, 문화,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으며, 특히 수소·인공지능(AI) 등 미래산업 분야와 저출산·고령화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안보 분야에서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구축, 그리고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한 한미일 공조 강화 방침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한국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문제나 북극 항로 개척 논의는 이번 회담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오염수 방류 문제로 인한 일본산 수산물 수입 규제 역시 언급되지 않았다. 강제징용·위안부 문제도 원론적인 수준에 그쳐 과거사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여전히 미뤄진 상태다.
이시바 총리는 공동기자회견에서 “양국 간 교류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면서도 “이웃 국가이기에 어려운 문제도 존재하지만 일관된 정책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 관계자도 “과거 문제에 대해 유연하고 전향적인 논의가 가능하도록 여건을 조성해 나가겠다”며 직접적인 대립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관계 개선을 모색하겠다고 설명했다.
이번 회담은 이 대통령 취임 후 2개월 만에 이뤄진 첫 양자 방문 외교로, 실용외교의 본격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 대통령이 첫 양자 방문국으로 일본을 택한 것은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처음이다. 두 정상은 캐나다에서 열린 첫 회담 이후 2개월 만에 다시 만남을 가지며 셔틀외교의 재개를 공식화했다.
양국 정상은 인도태평양 지역을 포함한 전략 환경 변화와 새로운 경제·통상 질서에 대응하기 위해 긴밀한 소통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이에 따라 안보와 경제안보를 포함한 각 분야에서 정상 및 실무 차원의 대화를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미국 주도의 새로운 무역질서 속에서 한일 협력 필요성을 보여주는 행보로 풀이된다.
이 대통령이 미국 방문에 앞서 일본을 먼저 찾은 점도 주목을 끌었다. 외교가에서는 이를 미국의 한미일 협력 기조를 의식한 전략적 행보로 해석한다. 실제로 회담에서 양 정상은 한일 협력이 곧 한미일 공조 강화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나가자고 뜻을 모았다. 위성락 안보실장도 “국익 중심 실용외교의 핵심은 한미동맹”이라며 “이를 근간으로 안정된 한일 관계를 발전시키고 한미일 협력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설명했다.
이번 회담은 양국이 셔틀외교 재개라는 성과를 얻었지만, 과거사 문제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등 민감한 현안은 피해 갔다는 한계를 남겼다. 협력과 갈등이 공존하는 현실 속에서 한일 관계는 앞으로도 관리형 외교 기조 아래에서 시험대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