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마다 좋아하는 찬송이 있고, 연령에 따라 좋아하는 찬송이 있고, 누구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찬송이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찬송도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군목 시절 GOP 위문을 다닐 때 입에서 절로 나온 찬송은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502장)였다. 깊은 산속, 어두운 철책, 대남방송과 대북방송으로 시끌벅적하기는 했지만 어디선가 바스락 소리만 나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곳이라 저절로 이 찬송을 흥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여행하는 순례자들도 여러 찬송을 부르며 순례길을 갔다. 그러다 예루살렘 근처까지 와 시온산 높은 산꼭대기의 예루살렘 성이 보일 때 부른 노래가 시편 125편이었다. 예루살렘이 산들에 둘러있는 모습을 보며 이 시편으로 신앙을 고백한 거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시를 이스라엘이 외부의 지배를 받을 때 지어진 것으로 본다. 평화롭게 살던 동네에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보라. 무자비한 이방의 침략으로 가족을 잃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상황, 재산을 잃고, 자유도 잃고 인권도 잃었다. 어디를 가도 통제받는다. 마음대로 말할 자유도 없다. 전통이 무시되고, 생존을 위해 침략자들의 언어와 그들이 섬기는 신(神)을 섬겨야 한다. 매일매일을 불안 속에서 산다.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불안하고, 얼마나 요동쳤을까? 다른 민족에게 지배받는 요동치는 나라, 희망이 없어 보이는 불안한 나라,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격동의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설 수 있는 비결을 노래한 시(詩)다. “시편의 노래들은 기념비가 아니라 발자국, 기념비엔 ‘적어도 이만큼은 해냈노라’고 적혀 있지만 발자국은 ‘다음 걸음을 뗄 때까지 여기 머물다 가노라’라고 말한다”고 했던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시편 125편은 그리스도인의 ‘안전’을 노래한 것, 하나님이 같은 편이시라 요새를 세울 필요가 없다고 선포한 노래”라 했다. 의지하기에 충분한 분, “확신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여본다.
흔들림이 없다
시인은 먼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다”(1절)고 노래한다. 여기저기 솟아있는 산을 보며 시온산을 떠올렸을까?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자의 눈에 시온산이 보이자 가슴이 뛰었던 것 같다. 삼각형 구조라 기초가 든든하기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산을 보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는 노래를 부른다.
비록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고 그와 비교하면 너무 초라한 성전이지만 여전한 시온산, 마음을 든든하게 하는 산, 약간 높은 구릉지대에 불과하지만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산이다. 성전이 시온산 동북쪽 끝자락의 모리아 산에 위치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이 있는 곳과 동일시 된, 예루살렘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실제 가서 보면 어디가 시온산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높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산, 희망과 구원의 보증 같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마치 우주의 중심 같은 곳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린 산, 그기서 하나님을 만났다. 또 통일왕국을 누리고, 그 산으로부터 다스림을 받았다. 그래서 마음과 신앙의 중심지이자 민족의 고향, 희망의 상징, 구원의 징표, 시편 48편에 보면 시온산을 이렇게 노래했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시48:2). 사실 높은 산도 아니고, 아름다운 산도 아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 밖의 감람산이 80m 정도 더 높다. 또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항상 하얀 눈으로 드리운 3,000m의 헐몬산(Mt. Hermon)이 있다.
그런데 낮고 볼품없는 산을 ♬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상의 기쁨 저 북방에 있는 시온산 큰 왕의 성일세 ♬라고 찬양한다. 시온산이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종말에 시온산이 높아지는 극적 지형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복음이 나오는 시온, 시온산은 ‘하나님이 세운 구원의 높이’를 상징한다. 스가랴서의 표현처럼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슥14;10),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슥14;10) 그날 시온산이 가장 높아지고, 그 영광 앞에서 모든 다른 산들이 평지가 되는 것처럼 노래했다.
그래서 시온은 ‘여호와의 산’이라 불린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2:2), 여기서 ‘여호와의 전의 산’이 시온산,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마치 우주에서 가장 높은 산처럼 서술했다. 이 표현으로 보면 8,848.86m의 에베레스트 산도 작은 산이다.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신 산, 이 높은 산으로 열국 백성들이 순례 온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영광이다. 그리고 이건 종말의 그림이기도 하다.
순례자의 목적지이기도 한 이 시온산을 가장 높다고 한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2:3), 마치 강의 근원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향해 흘러간다. 이 시온산에서 나오는 율법, 말씀은 시내 산에서 모세가 받은 율법이 아니다. 은혜의 복음, 구원의 복음이다.
이스라엘의 영광을 상징하는 시온은 잃어버린 고향처럼 아련하고 애틋한 곳이기도 하다. 많은 고초를 당하고, 빼앗기고, 디아스포라 되어서 그저 멀리서 바라보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사야와 예레미야서에서는 시온을 자주 ‘딸 시온’ 또는 ‘처녀 시온’이라 부르기도 했다. 사랑스럽지만 그만큼 그 운명이 애처롭다는 뜻이 담긴 표현이다.
이사야의 신학에 시온 난공불락설이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 시온은 결코 망하지 않는 철옹성이라는 신앙이다. 유다 히스기야 왕 때 대제국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쳐들어와 시온을 포위하고 위협하며 온갖 조롱의 말을 했을 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왕하19:21). 그리고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왕하19:34). 그날 밤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왕 산헤립의 군대 18만 5천 명을 쳐서 쫓아낸다. 결국 산헤립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고 니느웨에서 쿠데타로 죽임을 당했다. 시온은 난공불락의 성이다.
바벨론 포로기에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시온산을 그리며 회복, 해방의 날을 꿈꾸었다. 결국 시온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는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52:7)라고 노래했다.
이스라엘이 쇠퇴하고 영광이 곤두박질쳤을 때 시온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 약속이 있었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사62:1), 약속대로 이스라엘은 AD 70년 로마에 의해 망한 뒤 나라 없이 지내다 1948년에 팔레스틴 지역에 현대 이스라엘을 세웠다. 2천 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내하며 포기하지 않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시온을 향한 사랑이었다. 시온산은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도 아주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산이고,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기초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산이다.
순례자의 고백처럼 태산인 시온산처럼 요동하지 않고, 세상의 그 어떤 위력이나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재물이나 유혹이나 인기에 넘어지지 않고, 뚜렷한 주관과 소신으로 뚜벅뚜벅 전진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이다. 나라가 흔들리는 격동의 시대지만 우리는 환경 지향적인 사람(Other orientation)이 아니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Faith orientation), 신앙 지향적인 사람답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 되어야 한다.
보호받고 사랑받고 있다
시인은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2절)라고 노래한다. 북쪽으로는 높은 고원지대가 있고, 동서남쪽으로는 시온산, 모리아산, 감람산 등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 그 산꼭대기에 예루살렘 성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 바깥에서 공격해서 정복할 수 없다. 포위하고 있으면 식량이 모자라 스스로 항복해서 나오기 전에는 항복시킬 수 없는 예루살렘, 로마가 북쪽 고원에 큰 산을 만들어 함락시킨 것이 유일할 정도로 사방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가 바로 예루살렘이다.
순례자는 겹겹이 이어진 주위의 산세를 보며 여호와의 임재를 느낀다. 혼자 생채기와 가시로 고생하고 있다는 느낌이 산이 두르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둘러서 보호하신다는 느낌으로 바뀐 거다. 산처럼 늘 제자리를 지켜주신 하나님, 그래서 세상의 그 누구도 어떤 것도 침략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울타리가 되신다고 노래한다. 바울은 그 든든함을 이렇게 고백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그 어떤 강력도 뚫을 수 없는 가장 완벽한 보호,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확실한 안전이라 했다. 권력의 보호막이 아니다. 물질의 보호막도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 만왕의 왕이 보호막이 되신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확신해야 한다.
순례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노래한다. 창조주이시자 온 우주 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리고 자기를 의인이라 칭하며 하나님은 의인의 하나님이시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정의의 하나님’이시라고 노래한다.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3절), 여기 ‘규’는 막대기, 통치와 폭력을 상징하는 것, 남의 땅을 침략하는 제국주의자들이나 권세 부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악인’, 5절에서는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 “죄를 범하는 자들”이라 했다. 율법이 없기에 자기 욕망과 무지를 좇아 악을 행하고 죄짓는 자들, 반면에 의롭고 선하고 올곧게 살고자 하는 순례자는 스스로를 ‘의인’이라며 자기 땅은 ‘의인의 땅’이라 한다. 4절에서는 자기 민족을 ‘선한 자들’ ‘마음이 정직한 자들’이라 했다. 그러면서 민족적으로 당하는 고난이든, 개인적 채무로 노예가 되었든 정의의 하나님이 선대하시는 의인, 하나님이 보호하시되 정의로 의인을 보호하신다고 한다. 서글픈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약속을 떠올린 것 같다. 잊지말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정의로 보호받고 사랑받는 사람이다.
평강을 누릴 것이다
시인은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5절)라고 노래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평화(샬롬)을 기원한 거다. 이 평화는 선한 이들과 올곧은 이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좋으심,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는 거다. 복수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산들이 제자리를 지키듯, 제자리 잃었던 것들이 다 제자리 찾기를 바라는 것,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3절), 이방 제국의 폭력과 위력이 이스라엘을 위협해 시온산이 흔들리며, 무너질 위기에 처하고, 선한 자들과 정직한 자들의 일상이 위협을 당한다 할지라도 보호해주실 하나님, 순례자에게 하나님은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주목할 것은 시편 곳곳에서 의인이 ‘가난한 자’와 연결된다는 거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시10:12), 여기서 가난한 자들은 의롭게 살다가 가난하게 된 사람들, 하나님이 그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호하신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2절). 예루살렘 주변의 크고 작은 산들과 광야가 마치 예루살렘을 보호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몸와 영혼을 겹겹이 보호하신다는 거다. 순례자의 눈에는 적들의 공격보다 생명싸개로 보호하시고, 불성곽으로 둘러쳐 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더 크게 보인다. 위축될 이유가 없다. 아니 담대함이 솟구친다.
드디어 평강을 누린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의 노래이자 우리의 간구여야 한다. 직역하면 “이스라엘 위에 평화가”, 평화는 샬롬, 원래 뜻은 온전함인데 우리 노력으로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민수기에 보면,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흔들림이 없는 삶을 살고, 안전한 삶을 살 뿐만 아니라 평안을 누리며 산다는 거다,
비록 세상의 유혹과 박해가 강한 시대지만 흔들림 없는 안전한 삶은 물론, 전쟁이 없는 샬롬, 폭력이나 상처로 몸과 영혼이 위축되지 않는 샬롬, 더 나아가 생명력으로 가득한 샬롬으로 충만하기를 축복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