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5) 은혜에 대한 감사의 노래

오피니언·칼럼
설교
시 124:1-8
이희우 목사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 했다,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선택에 대한 후회를 암시한 거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가 후회를 “어리석은 자의 감옥”이라 했지만 북아일랜드 퀸스 대학 심리학 교수인 에이단 피니(Aidan Feeney)는 “후회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라며 후회를 “의사 결정을 개선하게 해주는 매커니즘”, “자신의 전략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신호”로 여겼다. 후회가 오히려 유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편 124편은 후회나 아쉬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마치 후회할 때 흔히 하는 가정법 스타일로 시작된다. 1절과 2절에 반복해서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이라고 가정한 거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정말 그랬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 채로 삼켰을 것이며”(3절), “그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4절), “그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5절), 생각만 해도 아찔했던 모양이다. ‘삼켰을 것’이란 표현이 세 절 연속 나온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우리도 하며 살지 않나? “그때 내가 참았더라면, 그때 내가 그 자리에 갔더라면, 그때 내가 조금만 더 늦게 갔더라면...”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까지 산 것이 은혜였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의 세계적 부호이자 마쓰시다 전기의 창업주인 마쓰시다 고노스케(松下幸之助) 회장은 성공한 기업가인데 1965년 그룹의 총수가 되었을 때 한 직원이 어떻게 이처럼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었는지 묻자 자신은 세 가지 하늘의 큰 은혜를 입고 태어났다고 했다. 세 가지를 가난하게 태어난 것과 허약하게 태어난 것, 그리고 배우지 못한 것이라 하자 놀란 직원이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갖고 태어나신 것 같은데 그게 하늘의 큰 은혜냐고 다시 묻자 “가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서는 잘살 수 없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일해서 성공했으니 가난이 은혜였고, 허약하게 태어나 건강의 소중함을 일찍이 깨달아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쓰게 되었으니 허약하게 태어난 것도 은혜였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퇴했기에 항상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는 데 노력하여 많은 지식과 상식을 얻었으니 못 배운 것도 은혜였지. 불행한 환경은 나를 이만큼 성장시켜주기 위해 하늘이 준 시련, 그러니 감사가 마땅하지.”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하늘이 준 은혜로 여긴 거다.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할 삶의 자세 아닐까?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얼굴’보다 ‘손’에 더 시선을 집중한다는 것, “하나님의 손이 아닌 얼굴을 구하라. 우리는 받을 것만 구하지만 하나님은 대면을 원하신다”며 “엘리야가 얻은 물의 근원은 시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고 했던 젠센 프랭클린의 개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 『한 길 가는 순례자』에서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시편 124편을 “나는 항상 실패의 위기 속에서 산다... 시편 124편은 위험에 관한 시가 아니라 도우심에 관한 시, 우리의 생애는 우리가 겪는 위험이 아니라 우리가 체험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빚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124편을 “은혜에 대한 감사의 노래”라고 제목을 정해 본다.

하나님을 믿는 은혜

안방극장에 날이 갈수록 ‘타임 슬립’(Time Slip)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많아지고 있다. 개인이나 집단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여행을 하는 초자연현상, 우연히 시간여행을 하는 거다. 사람이 과거로 이동하고, 또 과거나 미래의 인물이 타임 슬립을 통해 우리 시대로 건너오면서 겪는 문화충격을 다루거나 과거나 미래로 가서 선택을 바꾸는 것, 물리학계에서는 타임 슬립을 부정한다.

워낙 별난 시대라 상상은 자유지만 우리 현실에서 일어날 일은 아니다. 괜히 막연한 기대감을 갖거나 상상의 늪에 빠지지 말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이미 벌어진 일에서 의미를 찾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옳다. 물론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에 리셋되고, 리폼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반전이나 인생 역전, 많이 듣지 않나? 우리는 그것 때문에 아픔이 있어도 기대감을 갖고 사는 거다.

순례길에 나선 시인도 가정법을 부정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다른 표현으로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식, 하지만 모든 것이 은혜라는 거다. 시작이 멋지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1절), “이스라엘은 말해야 한다”로 시작한 거다. 순례 중 밤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과거를 돌아보며 신앙고백해야 한다는 의미, 번역은 안 되었지만 ‘만약’이라는 히브리어 ‘룰레’(לוּלֵא)가 두 번 나오는데 ‘비현실적 과거 상황’을 전제하며 신앙고백을 한 거다. 그래서 이 124편은 탄식시가 아닌 감사시,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하나님께서 구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한다. 절정은 6절,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표현이 너무 원색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 찬송이다.

멋진 가정법, 유용한 가정법이다. 에이단 피니(Aidan Feeney)를 비롯한 심리학자들은 후회마저 매우 유용하다고 했는데 이건 은혜를 깊이 감사한 것, 시인은 지금 “하마터면 끝이었는데 하나님이 내 인생을 살려주셨다”며 하나님 믿는 은혜를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 믿는 은혜, 아마 우리 가운데 하나님 믿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세상 사람들처럼 물질 중심의 가치관으로 살았을 거다. 그런데 그 삶은 물질이 있으면 교만하고 물질이 없으면 비굴해지는 삶 아니었을까? 자기 힘과 권세를 믿고 이웃을 무시하거나, 끼리끼리 놀고, 낄 데 끼지 못하면 원망하고 부러워하며 살았을 거다. 어쩌면 답답한 마음에 숱한 날을 술 담배로 지새웠을 수도 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다. 얼마나 좋은 만남이면 우리는 이런 찬송을 참 많이 불렀다. ♬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 나도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 하나님의 크신 은혜 생각할 때에 /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

확인되지 않은 전설이 붙었던 찬송이다. 영국 왕 제임스가 민정 시찰을 나왔다가, 방앗간에서 흘러나오는 가난한 노부부의 이 찬송에 은혜를 받고, 가난한데도 왕을 부러워하지 않는 그들의 신앙에 감동받은 왕이 즉석에서 2절을 개사해서 불렀다는 거다. ♬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영국 왕 제임스가 날 부러워해 ♬ 출처를 확인할 수 없다. 아마 누군가가 지어낸 전설인 것 같다. 또 이 노래 원곡은 1895년 청일전쟁시 일본 군가 중 하나인 ‘용감한 수병’이라는 전설도 있다. 어느 무명 수병의 애국심을 담은 노래를 찬양으로 개사했다는 거다. 역시 창작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거의 부르지 않는데 한 때 꽤 인기가 많았다. 은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가치관과 행복이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억하라. 하나님 믿는 게 최고의 은혜,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은혜

순례자는 1절과 2절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이라고 두 번 연속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라고 고백한다. 직역하면 ‘여호와가 우리를 위해 계셨다’ ‘여호와가 우리 가운데 계셨다’는 것. 이건 하나님이 우리 편, 다시 말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철학자나 종교인들이 싫어하는 표현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우주적인 신, 그래서 보편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어느 민족이나 특정 개인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고 본다.

하지만 성경은 줄곧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지역신이라는 뜻이 아니다. 여러 신들 중 한 신이란 뜻도 아니다. 창조주요 유일신은 맞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자신들을 지지하고, 자기들에게 복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아무리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일지라도 나와 상관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라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이나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

출애굽기 3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을 소개하실 때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우리를 편드시는 분, 마치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편들어 주듯 우리를 사랑하고 편드신다.

문제는 서로가 하나님을 자기편이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쟁까지 벌인다는 거다.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유럽이 격동기를 겪을 때 영국 헨리 8세가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개신교국이 되자 스페인은 영국을 이단국가로 간주하고 무적함대에 2백여 명의 사제들을 동승하게 해 성찬식을 거행하며 영국을 공격했다. 영국도 엘리자베스 1세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도와주시길 기도하며 맞서 영국이 유럽 최강 스페인 무적함대를 꺾는다. 그때부터 스페인은 쇠퇴하고 영국이 해양패권을 장악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두 나라는 같은 정교회 소속, 서로 하나님이 자기편이라며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미국 남북전쟁 때는 북군이 초기에 계속 패배하다가 첫 승전을 하자 참모가 링컨에게 “각하! 이제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북군 편이십니다”라고 승전보고를 한다, 그때 링컨이 “오직 나의 염려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일세.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서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편이 되어 주실 걸세”라는 명언을 한다. 맞다. 하나님을 우리 편 만들려면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어야 한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말은 가난한 자나 약자에게는 거의 무조건적 정당성을 갖는 것 같다. 가난한 자를 편드시는 하나님, 신명기, 시편, 그리고 예언서 곳곳에서 서술되는 하나님이 바로 가난한 자를 돌보고, 편드는 하나님이시다. 가진 자의 하나님, 권세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에 감사해야 한다. 기억하라.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자유케 하신 은혜

순례자에게 닥친 고난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던 모양이다.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3절), 원수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 괴물 같은 존재로 묘사한다. 실제 고대 사회에서는 전쟁에 패한 민족이나, 이방인들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죽이기도 했다. 문제는 현대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거다. 우리 사회를 보면 이런 괴물이 여전히 살아 있다. 누군가를 좌표 찍고 벌떼처럼 달려들어 공격하고 협박하는 네티즌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괴물 아닌가?

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그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4-5절). 우기에 물이 거세게 흐르는 와디(Wadi)를 힘겹게 건넜을까? 대적들의 공격을 홍수의 거센 물살에 비유한다. 원수들로 인한 위험이 파괴적인 홍수와 급류, 쓰나미처럼 몰려와 덮쳤다는 것, 제방이 무너지고 산사태가 나서 집과 사람들을 쓸어갈 때의 모습처럼 외부 환경이나 문제나 대적들의 공격이 감당하기 힘든, 끔찍한 파상 공세라는 거다.

가상 공격이 아니다. 디아스포라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서 늘 겪는 일이다. 그런데 6절에 보면 순례자는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잔인하면서도 잘근잘근 씹히는 지속적 고통, 시인은 자신을 사냥꾼의 올무에 걸린 새에 비유한다. 퍼덕댈수록 벗어나기는커녕 더 강력하게 조이는 올무, 스스로는 빠져나올 대책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끊어주셨다. 함정에서 건지셨다. 그래서 누리는 자유! 얼마나 좋았을까? 기적이다. 이렇게 살아서 순례 여정을 이어가는 게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을 송축한 거다.

그리고 8절에서,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라고 선포한다. ♬ 오 올무가 끊어졌네 해방되었네 우리 도움은 주의 이름, 오 올무가 끊어졌네 해방되었네 우리 도움은 주의 이름 ♬ 너무 든든한 빽! 그래서 “덤비려면 덤벼!” 그런 스탠스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고 외친 외침이 이랬다.

맞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 우리 영혼과 우리 몸을 얽어매고 있던 것을 단칼에 끊어버리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다. 믿게 하고, 목숨까지 내놓고 끝까지 책임지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 올무를 벗겨주며 자유케 하신 하나님, 그렇다면 그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며 성소로 나아가시기 바란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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