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천년설에 대한 타당성 검토와 재평가
로마제국의 종교는 헬라제국에서 물려받은 다신교에 황제를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하는 사상을 추가한 것이었다.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와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여러 토속신과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유대교는 로마제국의 통치에 복종을 대가로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율성을 얻어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기독교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들에게 오히려 복음을 전파하며 로마의 종교와 맞서는 길을 택했다. 그런 사실은 신약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 생명을 걸고 복음 전파를 했던 초기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주신 세 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세 가지 가운데 첫째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기 전에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며, 둘째는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대위임령이고, 셋째는 승천 후에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신자들에게 복음 성취의 약속을 전하신 새 창조의 계시였다. 그것들은 모두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셋째는 특히 요한계시록에 집중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에 따라 그의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는 “천 년 동안”의 기간이 있다. 하나님이 정하실 미확정된 그 기간이 도래하는 때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시어 최후의 심판을 진행하신다. 그리스도는 최후의 심판을 통해 사탄과 그의 무리와 그들이 저질러 놓은 모든 악을 불태우신 후에 새 창조하신다. 새 창조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우시는 새 예루살렘에 백성들이 함께 입성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했던 천년왕국의 백성들과 둘째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을 통과한 나머지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자들과 의인들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신자들에게 그곳에서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어거스틴도 『하나님의 도성』에서 변증을 위해 세 가지 무기들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상징적인 해석에 과도하게 치우침으로써 원문 취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은 면이 없지 않다.
(1) 무천년설 천년왕국론의 실상: 무천년설은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을 해석하여 교리로 채택한 천년왕국론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무천년설은 어거스틴이 천년왕국을 해석한 『하나님의 도성』을 교본으로 하였다.
① 무천년설은 어거스틴이 천년왕국위 중요한 몇 가지 개념을 상징적으로 해석한 특징이 있으므로 인하여 상징주의 해석을 따른 것으로 평가된다.
② 어거스틴은 계 20장을 해석하면서 “천 년 동안”을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 지상의 교회 시대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보았다.
③ 그러나 국내에서 쓰는 ‘무천년설(無千年說)’이라는 말의 실상은 문자적으로는 ‘천년이 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설이므로’ ‘천년설’을 부정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 20장의 “천 년 동안”의 기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설이다. 따라서 그 ‘천년’을 왕국 앞에 붙인 천년왕국도 인정하게 되는 역설(逆說)이 담긴 묘한 말이다. 이 역설은 단순한 것을 꼬아서 복잡하게 만드는 상징적 해석 방법의 한 사례이지만, 국내에서 번역어를 잘못 선택한 결과에서 파생한 것이다.
(2) 현대적 기준에서 무천년설의 분류: 현대의 신학적 관행에 따라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를 기준으로 어거스틴의 천년왕국론을 분류한다면, 『하나님의 도성』에 나타난 그의 견해는 분명히 후천년설로 분류된다.
① 어거스틴은 “천 년 동안”이라는 말을 카르타고의 교부들처럼 현세의 교회 시대를 상징하는 천년왕국의 기간으로 해석했다. 어거스틴에게 그 기간은 물리적 시간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미확정된 재림 때까지의 상징적 기간으로 이해되는 것이었다.
② 어거스틴은 상징적 “천 년 동안”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교회의 완전함과 충만함을 위해 필요한 시간이라고 보았다. 그 완전함과 충만함은 교회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천상과 지상과 지하의 무저갱에서 동시에 완성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어거스틴은 대개 지상의 교회에 관련해서 설명했다.
③ “천 년 동안”에 대해 미확정된 기간으로 보는 그의 상징적 해석은 당시 기독교가 주장했던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론에 쏟아지는 비난에 대응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상징적 해석에 몇 가지 신학적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천년설보다는 합리적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3)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가 장차 재림하시기에 앞서 지상의 교회 시대에 교회와 신자들을 천상에서 영적으로 통치하신다고 보았다. 그동안 사탄은 감금되어 활동이 제한되어 있고, 세상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도성』을 향하여 발전할 것이다.
① 그의 견해는 그리스도의 대위임령과 그에 따라 복음 전파에 나섰던 초기 교회의 환난을 간과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십자가 수난으로 사탄의 활동이 제한되었다는 그의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영적 통치를 하신다고 보았던 초기 교회에 대해 악한 세력이 심각한 박해를 가했다는 사실은 그의 해석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3장은 사탄에게 권세를 받은 짐승이 신자들과 싸워 이기는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② 어거스틴의 견해는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신자들에게 닥칠 갖가지 환난에 “이기는 자”가 되라고 하신 권고도 간과했다고 볼 수 있다.
(4) 요한계시록의 과도한 상징적 해석: 어거스틴이 요한계시록의 서술을 과도하게 상징적으로 해석한 것들이 몇 가지 더 있다.
① “첫째 부활”을 신자들이 지상에서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거듭나는 “영적 부활”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요한은 순교자들이 천상에서 첫째 부활하여 살아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서술했다.
② “둘째 부활”을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죽은 자들이 모두 한꺼번에 부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요한은 둘째 부활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나머지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뜻으로 서술했다.
③ 어거스틴의 견해는 환난을 이겨낸 신자들에게 보상으로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는 요한계시록 20:6절의 서술에 대해서도 간과하고 있다.
(5) 종교개혁자들의 상징적 해석 계승: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성경해석권을 무법하게 독점했던 교황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하면서도 로마가톨릭교회가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을 해석하여 채택한 천년왕국 교리는 그대로 계승했다.
① 그로 인해 개혁교회에서는 대개 요한계시록과 다른 로마가톨릭교회의 천년왕국 교리를 따르는 전통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어거스틴의 이름을 믿어서인지, 나태함 때문인지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② 현대 개혁교회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천년왕국 교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개혁주의 원리를 소홀히 하는 태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③ “오직 성경”을 주장하는 개혁교회가 요한계시록의 명시적인 서술과 다른 로마가톨릭교회의 천년왕국 교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신자들과 그것을 가르친 자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할 가능성이 있는 행위로 간주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되는 일이다.
(6) 종말론적 사건들의 시간표: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표에 따라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종말론적인 사건들은 순서대로 일어날 것이다.
① 그리스도의 재림은 아직 미확정된 “천 년 동안”의 기간 앞에서 일어나거나, 또는 뒤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미도래한’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② ‘아직 미도래한’ 시간을 교회에 충만함과 완전함을 위해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시간으로 보는 무천년설 지지자들의 해석과 “그러나, 아직”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위한 은혜의 시간으로 보는 전천년설 지지자들의 해석은 같은 견해라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③ 그렇다면 전천년설과 어거스틴의 견해 즉 후천년설 사이에 아직 미실현된 예언에 대해 크게 논쟁할 이유는 휴거 문제 외에는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④ 다만 요한계시록의 문맥은 후천년설에 힘이 실려 있고, 실제 역사의 흐름도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계속)
#허정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