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라는 사실을 삶 가운데서 경험한 사람들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감사의 반응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22)라는 서원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경험하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보은(報恩)의 반응이다. 더욱이 야곱은 자신이 드린 십일조가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서 나온 것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다’라고 믿는 사람은 십일조로 이런 믿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십일조란 창세기부터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하는 예물이었다. 아브라함은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오면서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통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며, 이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모든 것의 대표인 십분의 일을 여호와께 드린 것이다.
김지찬 – 십일조의 복음
기독교 신앙에서는 인간됨의 의미를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 이해한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핵심 질문은 성경에도 나타난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다윗의 이 질문은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관한 것임을 주목해 보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점에서 하나님과 닮았는가? 이를 추상적인 차원으로 축소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에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사랑하는 능력이 있듯이 하나님도 그 모두를 하실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나는 고유한 특성은, 하나님의 성품을 비춰 내고 반영하는 능력과 연관이 있다. 플라톤주의는 이원론의 한 형태로, 이 세상에는 대등하지만 서로 반대되어 끊임없이 갈등함으로 화해를 이룰 수 없는 두 가지 힘(이 경우에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이와 다르다. 사람에게 육체와 영혼이 있다는 말은 이 둘이 서로 경쟁하거나 긴장 관계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에서는 양면성을 가르친다.
R. C. 스프로울 - 인간은 과연 선한 존재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진짜 문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 ‘정치’ 문제 앞에서 양 갈래로 나뉜다는 것이다. 이 책이 논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 양극화의 본질이 신본주의 대 인본주의의 대척이라는 것이다. 표면적인 정치인과 정당, 정쟁 그 이면에 있는 가치관의 충돌. 그리고 그 가치관 충돌 이면에 있는 영적 충돌을 추적하고 이해해서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우파 좌파 등의 용어에 대해 성경적인 공통분모를 갖고 ‘성경적 진영’에 거해 세속화 쓰나미에 결연히 저항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역사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옳은편이 있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정치 뉴스의 큰 물줄기에 분명한 ‘주님의 편’이 있다는 것이다.
책읽는사자 - 책읽는사자의 올바른 기독교 정치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