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역사를 바꾼 카이퍼와 이승만(정성구, 킹덤북스, 2024)

오피니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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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안호 선교사(영국 선교사)

※ “편집자 주” ‘본 서평을 2번에 걸쳐 나눠어 올립니다’

배안호 선교사.

들어가는 말(서론):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유창한 영어 덕분’
“이승만은 외교의 귀재이기도 했지만, 예수로 꽉찬 연설가였다”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이것은 종교적 대립이다” (카이퍼)
“나는 공산주의가 전 세계에서 가장 나쁜 전염병이라 생각한다” (이승만)

“오늘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정체성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이때, 하나님의 나라와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금 일어나기를 소원하는 바이다” (저자, 머리말)

<역사를 바꾼 카이퍼와 이승만>(정성구, 킹덤북스, 2024, 104페이지). 작은 책이지만 메시지는 묵직하다. 대한민국호는 지금 거센 풍랑으로 혼란스럽다. 금년 들어 지구촌은 엄청난 뉴스들로 갈피를 못 잡을 정도이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바른 역사관과 세계관을 갖고 ‘’어떻게 생각’하며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카이퍼와 이승만은 10가지 면에서 서로 닮았다. 이것은 역사의 우연(偶然)의 일치일까? 필연(必然)이었을까?

정성구 교수는 40년간 총신대학교와 대신대학교에서 칼빈주의와 실천신학 교수와 총장으로 봉직했다. 현재는 총신대학 명예교수다. 한국칼빈주의 연구원과 ‘칼빈박물관’을 1985년에 세워 40년간 국제적 학술교류와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에 앞장섰다. 한국칼빈학회 창립멤버, 세계칼빈학회, 칼빈주의철학회, 국제복음주의협의회 등서 활동하였다. 무엇보다, 칼빈주의 학자일 뿐 아니라, 목회자요, 명설교가로서 500여회 부흥회와 40년동안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전국목사장로 기도회’를 45년간 23회나 주강사로 섬겼다.

<현암 정성구 박사 저작전집 30권> 등 82권의 저술, 12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한국교회 설교사>는 10여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최근에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과 삶>이 독일어와 불어로 번역되어 독일 베를린과 프랑스 파리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저자는 오래전부터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다. 1986년부터 이화장에 드나들며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였다. 이승만 박사가 공부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곳을 수 차례 방문하여 자료를 모았다. 하와이와 워싱턴 3번 방문, 프린스턴 대학교와 신학교
를 10차례 방문 자료 수집을 했다. “그러던 중에 카이퍼 박사와 이승만 박사는 정치가로서, 교육가로서, 저널리스트로서, 신앙인으로 상당히 유사점이 많이 있음을 깨닫았다” (머리말)

현암 정성구 교수는 명컬럼리스트다. 코로나 이후 수년간 카톡으로 매주 시원한 카톡컬럼을 쓰면서 신학교와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한국사회와 전세계 한인교포사회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본서는 그간 10만 카톡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글 ‘카이퍼와 이승만’ 제목의 글모음.

“카이퍼와 이승만” 주제로 발표했던 10회 연속 카톡컬럼의 제목들을 먼저 소개한다.

어학의 천재로서 카이퍼와 이승만/반공주의자로서 카이퍼와 이승만/저널리스트로서 카이퍼와 이승만/교육자로서 카이퍼와 이승만/연설가로서 카이퍼와 이승만/훌륭한 멘토를 둔 카이퍼와 이승만/회개의 사람 카이퍼와 이승만/정치가와 국제맨으로서 카이퍼와 이승만/사회
개혁가로서 카이퍼와 이승만/기독교 입국자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10가지 중 7가지 공통점들을 (이 서평 독자들 위해) 간단히 요약하면서 서평을 할 것이다.

1. 어학의 천재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사실상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와 이승만(1875-1965)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의 시대가 완전히 다르다. 국적과 시대를 초월해서 두 사람은 완전히 빼 닮은 인생을 살았다. 두 사람의 중핵사상(中核思想)은 ‘위대한 칼빈주의자’였음을 서평자는 깨닫는다.

카이퍼가 네델란드 ARP 정당의 당수였을 때, 1898년, 워필드(B.B Warfield)교수는 그를 프린스턴 신학교의 유명한 ‘Stone Lecture’에 초청강사로 초청했다. 카이퍼는 ‘칼비니즘(Lecture on Calvinism)’ 주제로 한 주간 강의. 카이퍼의 칼빈주의적 신학과 세계관 강의로 인해 프린스턴 신학교에 새로운 돌풍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유럽은 과학주의와 진화론 사상이 풍미하여 국가와 사회가 혼란스런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대안(代案)으로 카이퍼는 칼빈주의 사상과 이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카이퍼는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사상을 재건.부활시킨 단순히 정통신앙을 유지만이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다.

칼빈주의 핵심 사상은 구속주와 심판주로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이다. 1900-1910년대 프린스턴은 칼빈주의 사상으로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신학교서 1년간 공부할 때 간접적으로 ‘카이퍼의 사상’(칼빈주의)를 진하게 경험하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프린스턴에서 변증학을 비롯한 신학과목들을 1년 공부했다. 당대의 칼빈주의 학자였던 B.B Warfield와 Geerhardus Vos의 설교를 들었다. 잘 알려진 대로, 짧은 기간에 학사/석사/박사를 끝내고 신학공부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어학의 천재’였기에 기능했다.

이승만은 유교와 불교배경 부모의 영향이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섭리로 기독교로 개종하었고 서양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그는 6년여 한성감옥 생활 중 영문법과 영어회화를 배웠고 영어사전을 만드는 열정! 마침내 그는 영어에 능통한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웅은 하루 아침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영웅이 되려면 남이 알지 못하는 피나는 노력은 기본이고, 어학습득의 천재적인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 한다. (중략) 우리 자유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언어의 천재로 말미암아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중략) 이승만의 유창한 영어로 국제 무대에서 외교를 통한 독립투쟁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 민국은 없다” (pp. 20, 21,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유창한 영어 덕분…)

아브라함 카이퍼도 역시 당대의 최고의 언어학자 - 히브리어/헬라어/라틴어/불어/영어/네덜란드어에 능통했다. 그는 대학에서 신학과 문학을 동시에 공부했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웅장하였고, 연설과 글쓰기에 탁월하여 주간지와 일간지에 명컬럼 저널리스트로 당대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 반공주의자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이승만과 카이퍼는 당대의 최고의 지성과 학력/나라가 거의 절망에 빠졌던 것/명연설가요 설교가/나라와 민족을 깨우며 생명을 걸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면에서 닮았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철저한 반공주의 노선에 서 있었다는 것이 또한 일치한다.

프랑스 혁명과 칼 맑스에 의해 촉발된 공산주의/사회주는 1917년에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공산당 나라가 되자, 온 세상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붉게 물들고 말았다. 상해 임시정부 안에서도 지도자들 중 상당수는 러시아가 보내준 사탕발림 루불화를 받은 지도자들이 수두룩 했다. 이승만은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지 6년 만에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무정부주의 자들임을 이미 간파하였다. 그는 이미 공산주의 문제점을 밝히는 소논문을 발표(1926)하였다. 일찍이 이승만은 “공산당은 호열자다. 인간은 호열자와 같이 살 수 없다”고 하였다.

카이퍼는 목사/신학자/대설교가/연설가로서 당 총재로 지냈고 후에는 수상이 되었다. 그가 소수 정당의 당수였을 때, 거대 당의 대표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에 해박한 뜨룰스트라(Mr. Troelstra). 그는 의회가 혁명을 예찬하고 맑스주의로 넘어가는 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카이퍼는 원래 연설의 달인에다가 웅장하고 논리적인 말을 통해서 왼손에는 포켓 성경을 들고, 사상은 사상으로, 논리는 논리로 대항하면서 뜨룰스트라가 이끄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론을 하나씩 격파해가면서 자유 민주주의, 시장 경제, 기독 입국론을 세웠다” (p. 27)

3. 저널리스트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이승만과 카이퍼 두 사람은 처음부터 언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신문을 발간하고 대중매체를 통해 국민을 깨우는 운동에 힘썼다. 언론의 영향력을 일찍이 간파하였던 것이다.

카이퍼는 1872년 화란의 일간지 <더 스탠다드(Staandard)>의 편집인이자 주필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혁명이 인본주의 사상에서 출발했음을 알리며,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종교/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과학 등을 다루면서 1920년 임종까지 50년간 필봉을 휘둘렀다.

“한 사람이 50년 동안 일간지와 주간지의 편집주간으로 매일같이 논설과 칼럼을 쏟아내고, 거짓된 사상을 비판하고 국민의 갈 길을 제시했던 것은 확실한 기독교 세계관과 문장가가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또한 논설과 칼럼은 곧 그의 칼빈주의 사상의 기반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일대기를 보면 ‘카이퍼는 그가 숨을 거두고 임종하는 순간에 손에서 펜이 떨어졌다’고 했다 (p. 30, 카이퍼는 일생 동안 크고 작은 223권-작은 도서관의 책을 썼다)

이승만도 역시 카이퍼와 견주어 봐도 손색이 없다. 당시 일제강점기에서 변변한 신문도 인쇄기도 없던 열악한 그 시절에 이승만은 <한성회보>, <매일신문>의 주필로 저널리스트로고난 받는 백성들을 일깨우며 사정을 알리는 일에 힘썼다.

“더구나 옥에 갖혀 있는 동안 참 종이에 글을 써서 노끈을 만들어 옥 밖으로 내보내는 모험을 했었다. 특히 그가 쓴 <일민주의>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같은 책은 예언서가 되었다. 최근에 (밝혀진) 1942년에 단파 방송(VOC)을 통해 2300만 동포들에게 자유 소식, 자유 메시지는 80년 전의 라디오로 우리 국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었고 지금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다. 이승만은 <워싱턴 포스트>, <타임지>, <데일리 뉴스> 등 언론을 이용할 줄 알았다” (p. 31)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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