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은혜 위의 은혜(정성구, 킹덤북스, 2024)

오피니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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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안호 선교사(영국 선교사)

들어가는 말(서론): ‘왜 자꾸 칼빈주의, 칼빈주의 하십니까?’

현암 정성구 자서전 「은혜 위의 은혜」책표지.

“정교수님! ‘왜 자꾸 칼빈주의, 칼빈주의 하십니까?’ 칼빈이 위대하지만 그는 450년 전의 위대한 종교개혁자 중 한 ‘사람’인데 왜 그를 높이는지요?” 서평자는 총신 신대원 1학년을 2번째 할 때, 칼빈주의 수업시간에 질문하였다. ‘칼빈주의는 곧 성경주의’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칼빈주의는 무엇일까?” “칼빈주의 세계관은 무엇일까?”

<현암 정성구 자서전, 은혜위의 은혜>(킹덤북스, 2024), 904페이지). 18년전 저자의 회고록(2005)을 기반으로 자서전을 썼다. 총신대학 교수(총장). 80여권의 저자. 칼빈주의 운동에 전 생애를 바치며 한국칼빈주의연구원/박물관 설립. ‘뼛속까지 킬빈주의자’. 예술가.시인.화가.애서가.애장가.명문장가. 저자는 교단 교파를 뛰어 넘어 한국 사회에 알려진 이름이다. (서평자는 저자를, 현암으로 부를 것이다)

“사실 나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고, 자료 수집에 대한 열정이 유별났습니다. 그래서 내게 대한 기록의 자료도 아주 조그마한 것까지도 꼼꼼하게 잘 정리해 두었습니다. (중략) 제가 이 자사전을 쓰면서 평소의 자료수집벽에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기록이 혹시 내 자랑이나 과시에 머물면 어찌할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평생 한나님의 영광을 모토로 살아왔다면서 이 기록이 참으로 잘한 일인지는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p. 7. 저자 서문)

서평자는 현암의 자서전을 읽으며 다재다능(多才多能)이란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분임을 확인하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하여 부모 마저도 포기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아남았고, 2008년에 심장수술, 암 수술 고비를 넘기며 ‘넘치는 일감들’을 감당하며 80여년 하나님의 “은총의 포로”로 살아왔음 새삼 확인하며 자서전의 제목을 <은혜 위에 은혜>로 정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역사신학과 선교학을 전공한 서평자에게 가장 인상깊게 각인되는 6-7개 주제들 중심으로 현암의 자서전을 서평 할 것이다.

1. 고등학생 시절(1960) 가장 추운 겨울 택해, 30일간 ‘전국무전여행’

중학생 시절 성령세례를 체험했다. 현암은 고등학생 시절 30일 동안 남한일주 여행하였다. 1960년 가장 추운 겨울을 택했다. “인간의 바닥의 삶을 내 발로 직접 가서 보고 체험하고 느껴보고 싶었다”(p.186) 사서하는 고생, 문전 걸식을 시험해 본 것이다. 당연히 부모님은 이 추운 겨울에 어디로 가느냐고 눈물로 말렸지만 결국은 아들의 고집을 꺽지 못했던 것이다. 단독 무전여행, 순간순간 위기였지만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하였다. 신앙/인간/고난/학문의 문제를 온 몸으로 고민하였던 것이다.

무전여행 중, 경남 진주에서 개최된 전국 S.F.C 16차 동계수련회(그 당시 위원장 석원태 목사). 한상동/한명동/한부선/황철도/전성도목사/전영창 거창고 교장의 설교/특강/간증은 한 참 예민했을 십대시절에 일생의 영적 감화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일생동안 살아오면서 한 번 결심하며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일단 마음을 먹으면 즉각 행동에 옮겨야 마음에 평안이 왔다” (p. 187, 하나님은 현암의 10대시절 다윗과 같은 이런 옹골찬 믿음의 중심을 일찍부터 주목하셨을 것이다)

2. 좋은 멘토들: 정암 박윤선/죽산 박형용/요한네스 벨까일/헤를만 도예베르트

현암은 자신의 사상적 멘토는 존 칼빈과 아브라함 카이퍼임을 고백한다. “나는 카이퍼의 창을 통해서 칼빈을 이해했다”(p. 598) 현암은 자신의 일생의 멘토 4분을 소개했다. 정암 박윤선 목사, 죽산 박형룡 박사, 네하네스 벨까일, 헤르만 도예베르트.

2.1. 정암(正岩) 박윤선(朴允善, 1905-1988)

1962년 정암의 주석을 교정하면서부터 시작. 동산교회 교육 전도사. 결혼 주례. 화란 유학떠날 때 추천사. 유학 중 정암이 보내준 편지 40통(박물관에 보관) “정 목사, 절대 비굴하지 말아라, 가난하면 비굴하기 쉽다”. 임종 전 “제게 남길 말씀이 없습니까?” ‘기도일관(祈禱一貫)’ 문구를 지필묵 써 주심. 30년을 가장 가까이 모셨다.

“박목사님의 일생은 한국교회의 축소판이자 한국교회의 개혁주의 신학의 축소판이며, 신학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노진현 목사님의 말처럼, 칼빈을 주석의 왕이라고 표현한다면, 박윤선 목사는 칼빈 이후 한국이 낳은 성경주석의 왕이요, 세계에서 신구약 66권의 주석을 완벽하게 주석한 유일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주석은 기도로 쓰였고, 그의 설교도 말씀과 기도가 어우러진 대 코러스였다” (p. 605)

2.2. 죽산(竹山) 박형룡(朴亨龍, 1897-1978)

“나는 박형룡 박사 아래서 7년을 공부했다. 즉 학부와 신학대학원과 대학원까지 장장 7년 동안 나는 그의 학문과 신앙과 덕을 배웠다. 박형룡 박사는 위대한 보수주의자이면서 대칼빈주의 학자였다. 나는 20대 초반에 박형룡 박사의 문하생이 되어 그의 임종과 장례식까지 그 어른을 지켜보았다. 박형룡 박사는 박윤선 박사의 뜨거운 열정과는 대조적으로 참으로 조용한 성자형이며 그의 삶 자체가 경건의 모델이었다” (p. 607-08, 1981년 박형룡박사 전집20권 출판 때, ‘박 박사는 신학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신학으로 세상을 마치신 어른’이라고 현암은 추천사를 썼다)

2.3. Johannes Verkuyl(요하네스 벧까일), 1908-2001)

22년간 인도네시아 선교사였던 요하네스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적 신학과 신앙, 그의 삶의 여정을 빼 닮은 신학자/설교자/목회자/저술가/평론가. 19세기 말에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걸출한 대인이 교회와 신학과 정치를 이끄는 견인차였다면, 20세기 말에는 카이퍼의 사상과 삶을 본떠서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들어내고 복음의 세계화를 위해 애쓴 행동하는 칼빈주의자. 화란 뿌라야 대학교 학위를 받고 J. H. Bavinck의 뒤를 이어 선교학교수로 활동. 전도학 개론/선교학 개론 등 120권이 저서. 그는 신학/교회/정치/경제/문화/사회/예술/교육 등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적용해야 하고, 복음이 그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누룩이 되어야 함을 가르쳤다. 서평자가 보기엔 요하네스 벨까일은 현암의 큰바위얼굴 이었다.

2.4. Herman Dooyeweerd(헤르만 도예베르트), 1894-1977

헤르만 도예베르트는 칼빈주의 철학의 창시자다. 화란에서 유학생활 시작할 당시 도예베르트 집과 불과 5분거리. 현암은 박윤선 박사님의 책에서 도예베르트를 상당부분 인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였다. 당시 80이 넘은 도예베르트에게 단도직입적 질문했다. “선생님의 칼빈주의 철학의 근거는 어디서 출발하는 것입니까?”

“철학은 무슨 철학? 나는 철학자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닙니다. 내가 아는 한 가지가 있다면, 시편 119편 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는 말씀을 알키미디안 포인트(Archimedian Point)로 해서 즉 그것을 근거로 해서 내 사상을 발전시킨 것 뿐입니다” (p. 622, 도예베르트는 철저한 말씀의 사람이었다.)

“모든 사고와 사유와 삶의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 그리고 만유와 만사의 원리가 된다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경중심의 세계관이 신학과 신앙을 말할 것도 없고,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교육, 등의 삶의 전 영역을 지배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중립이란 없습니다. 결국 세계관이 핵심인데, 내가 말하는 칼빈주의적 세계관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한 것입니다” (p. 622, 이것이 칼빈주의 핵심 내용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부터 현암은 칼빈주의 사상에 감전되어 오늘까지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의 원리를 지켜왔다고 고백한다. “내 삶의 방향과 중심을 잡은 셈이다. 필자가 칼빈과 아브라함 카이퍼를 연구하고, 1985년부터 한국칼빈주의 연구원과 칼빈박물관을 세운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도예베르트 박사의 말에 불꽃이 점화된 셈이다” (p. 623, 실로 도예베르트는 신학자가 아니면서도 개혁주의 기독교 철학과 개혁주의 신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대석학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와의 만남이 내 생애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p.633, 현암은 고백하였다)

3. 韓國敎會 說敎史: 530페이지. 3천 종의 자료 수집 10년 집필.

현암의 80여권의 저술 중 서평자가 보기에 가장 인상적 책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누가’(man), ‘무슨 자료를’(material), ‘어떤 방법으로’(method) 설교했는지 즉 3M 원칙에 따라 자료를 모으고 정리했다. 이런 아이디어는 미국의 설교역사학자, Charles Dargan의 설교사에 가져왔다고 밝혔다. 한국교회의 부흥의 원인을 종교현상적(Religious Phenominologi cal) 접근이 아닌, 구속사적(Redemptive Historical)으로 들여다 본 것이 압권(壓卷)이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10개국으로 번역되었다.

4. 속전속결의 추진력과 결단력. 창의적인 다재다능

현암은 매사에 긍정적이요 적극적이다. 창의적이며 속전속결형이다. “나는 성격이 좀 특별해서, 다른 사람이 아는 것 처럼 얌전한 듯 보이지만, 굉장히 저돌적이고 한 번 마음 먹으며 기어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 전부를 거는 승부 근성을 가졌다. 다시 말하면 나는 보통 세 가지 네 가지를 한꺼번에 해치운다” (p. 609)

5. 전국 목사.장로 기도회: 45년간 23번 ‘단골 강사’, ‘개혁교회의 꿈’ 외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개최하는 매년 5월의 ‘전국 목사.장로 기도회’는 한 교단을 넘어 한국교회 연례행사다. 이런 큰 대회에 주강사로 1-2번이 아닌, 45년간 무려 23번이나 초청받았다. 대개 신학교 교수들은 신학은 훌륭하지만 대중적 소통이 잘 안 되며, 반대로 대중적일 경우 신학적 기반과 논리가 부족한 경우가 허다하다.

“신학교 교수가 대중적인 집회에서 청중의 회개와 통회를 이끌어 낼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내 26년간 측근에 모셨던 나의 스승 박윤선 박사의 사상과 열정을 고스란히 받았기 때문”(p. 456)이라고 하였다.

40여년 긴 세월동안 목사.장로 기도회서 메시지가 마르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을 토해내는 비결이 있을 것이다. “나만이 아는 비밀과 노하우”는 그의 주도면밀(周到綿密)함과 철저한 준비였다.(pp. 461-62, 서평자는 이부분에서 다시 한번 놀랐다. 그는 강사로 초청 받으면 먼저,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여러 친구 목사/제자들/장로들/신학생들/심지어 사찰 집사/청년들에 골고루 의견청취를 한 후, 가장 큰 공통점을 주제로 삼는다. 곧바로 최근 3년 이내에 그 주제에 대한 모든 기사를 섭렵하며 관련된 주제의 책 읽기 후 → 초고원고는 대중적인 입맛에 맞게 구어체로 작성 → 30-40회 도우미의 도움으로 계속 추고 → 기도원/집에서 영적으로 뜨겁게 달구는 집중된 기도 후에 설교단에 선다.

6. 칼빈주의연구원(Institute for Calvinistic Studies)과 칼빈박물관 설립

현암은 칼빈주의연구원(Institute for Calvinistic Studies in Korea, 약칭 ICSK)를 누가 시켜서 하거나, 재정적인 누구의 도움을 받아 한 것이 아닌, “그냥 내가 좋아서, 모든 정열과 모든 물질을 다 바치고 온몸을 다 던져서 칼빈주의연구원을 만들기 위해 40여 년간 칼빈주의 자료를 찾아 지구를 10바퀴는 더 돌았다”고 고백하였다(p. 472)

서평자는 ICSK와 칼빈박물관을 5-6차례 방문하였다. 처음 방문했을 때, 엄청난 희귀(稀貴) 자료들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소장된 자료는 1만 여 점. 폴리갑/아다나시우스/암부로스/저스틴 마터/크리소스톰/어거스틴 등 초대 교부들의 원전(原典)이 16세기 구텐베르그 활자체로 찍어진 책들이 빼곡하다. 칼빈의 작품을 비롯 아브라함 카이퍼까지 칼빈주의 학자들의 서적들과 그림들, 문헌자료들이 칼빈박물관에 잘 소장되어있다. (이런 실제 희귀자료들이 한국에 보관된 것이 신비롭다)

한국교회는 이제 겨우 140년 역사이다. 그런데 이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 “세계에서 기독교 역사가 가장 짧은 한국교회에 칼빈박물관이 있다는 것은 놀랍고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pp. 473-74, 참으로 놀랍고 특이한 일이 아닌가?)

현암은 스스로 “나의 분신”이나 마찬가지 ICSK와 박물관의 1만종의 희귀자료를 한국 교회를 위해서 지난해, 3월 1일에 그가 평생 섬겨온 총신대학교에 고스란히 기증하였다. (국민일보, 2024.3.1일자, 현암 정성구 박사 칼빈박물관 사료 기증식 및 <은혜 위의 은혜> 자서전 출판예배기사 기사 참조)

7. 40년간 기독신문과 신문 컬럼: 매주 카톡을 통해 ‘명컬럼’ 글쓰기

현암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국어성적이 좋았고 편집장을 경험하였다. 총신대 대학원 2학년 재학중, <크리스찬 신문>에 당시의 일류 전문가들과 함께 지면에 논문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신문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후 기독신문 뿐 아니라 경향신문에 6개월간 ‘정동칼럼’(1993년)썼다.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는 주간지/일간지의 50년간 편집장으로 글을 썼듯이 현암도 신학교와 교회 울타리를 넘는 컬럼니스트로 정치,사회,문화, 교육 등 전반에 걸쳐서 날카로운 필봉을 날리고 있다. 현재도 계속되는 현암의 카톡 컬럼을 읽을 때마다 첫 느낌은 통쾌함, 시원함이다.

나가는 말(결론) “깨어있는 하박국”/”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의 포로”(박종구 시인)

사실상 현암의 학문적 노고와 업적은 사람들에게 정확히 알려지지 못하였다. 서평자 생각은 현암이 갖고 있는 복음의 열정과 부흥사의 은사 때문이다. 지난 45년간 전국 목사.장로기도회 초청강사를 비롯 지금도 끊임없이 부흥회요청을 받고 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의 생애와 사상>, <칼빈주의 신학대계>등 칼빈의 생애와 사상을 일평생 바쁜 일상 중 체계적 연구는 단연 한국교회의 독보적 학문적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칼빈을 연구하는 것은 인간 칼빈을 알기 위함보다 우리의 성경연구에 있어서 그 말씀을 바로 깨닫는데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이런 목적 없이 칼빈을 위하여 칼빈을 연구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칼빈이 원치 않는 악을 행함이 될 것이다” (p. 501, 1987년 10월 마지막주 요한 칼빈 자료 전시회 축하말씀 중에서)

‘정암 박윤선 박사의 지적대로 칼빈(주의) 연구로 말씀을 바로 깨닫기 하소서’. 서평자는 신학생 시절 칼빈주의를 깨닫고 일생동안 성경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 ‘현암의 자서전 제목대로 <은혜위의 은혜>삶, 성경과 역사적 정통 신앙에 서게 하소서’.

“저는 40년 동안 칼빈의 자료들 모으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칼빈 박물관을 세운 것은 칼빈의 위대성을 예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도 병약하고 고독하고 불행했던 한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그를 도구로 사용하셨는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며,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p. 356)

서평 후기

배안호 선교사.

서평자는 본 서평을 쓰는 중에 일부러 한국을 방문, 분당 칼빈박물관에 달려갔다. 정교수님께 평소에 궁금했던 몇가지 질문들 드렸다. “정교수님! 이런 진귀한 자료들을 어떻게 수집하게 되셨나요?” 역시 대답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서평자가 첫 번째 안식년(2007년)을 맞아 귀국했을 정교수님이 전화를 주셨다. “우리 대신대학교에 와서 선교학을 강의해 주세요. 경북 대구지역의 선교학 강의를 하겠다는 자들이 많지만 배선교사를 위해 자리를 비워두었어요” 그해 대신대학 교회 여름 수련회에도 배선교사가 주강사로 설교해야 한다고 명령하셨다. 대신대학 교수가족 중심 수련회서 “솔직히 저는 정 교수님께 설교학을 배웠는데 B학점 이었어요”고 고백했을 때, 회중석에서 정교수님은 손을 번쩍 들어 일어서셔서 “오늘 부로 배안호 선교사의 설교학 점수를 A+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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