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포기로서의 권력: 존 하워드 요더의 해석
미국의 사회철학자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는 예수의 정치적 권력을 “포기로서의 권력”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요더의 입장은 벤야민의 자기 비움으로서의 신적 권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주저 ‘예수의 정치학’(The Politics of Jesus)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삶을 따르자고 역설한다. 요더에 의하면 예수는 윤리를 말하며 정치를 실천한다. 요더가 여기서 말하는 정치와 윤리란 유한하여 왜곡될 수 있는, 일상적 세속적 차원에 속하지 않는다. 예수는 일상적 윤리와 정치의 의미에서 권력행사를 거부하였다. 세속권력의 차원에서는 언제나 폭력이 발생하는데 예수는 이러한 폭력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추구하는 정치와 윤리란 “고통당하면서도 그런 종류의 보복을 포기하는 것”이다.(John H. Yoder, The Politics of Jesus, 1972, 204, 각주 13번.) 예수의 정치적 태도란 폭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멈추는 것이다. 요더는 예수의 정치와 윤리에 관하여 말한다: “... 모든 종류의 폭력에 대한 거부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적 태도는 신약적 선포의 처음과 끝을 가로지르는 일관된 주제다.”
요더는 그가 제시하는 자기 포기의 정신을 요한계시록에서 도출한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메시지는 “죽임당한 어린 양이 권세를 받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이다. “요한은 여기에서 말하고 있다. 역사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칼이 아니라 십자가이며, 무자비한 힘이 아니라 고난이다...의로운 자의 승리는 의로운 자들을 도우려 시도하는 무력 안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수행했던 이 연약함의 입장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수행하신 사역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풀어낸 것에 불과하다. 예수가 폭력적 주인(主人)됨 대신 고통당하는 하인(下人)됨의 길을 선택하고, 권력으로 유지되는 정의 대신에 죽음에 이르는 사랑을 선택했던 사실 자체가 바로 그의 삶의 근본적 방향성을 드러낸 것이었다. 역사를 지배하는 모든 손잡이를 포기하셨다.”
요더에 의하면 예수는 사탄과 열심당의 시험과 정반대의 길,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걸으셨다. 정치적 역학구도 안에서 예수에게 십자가형이 선고된 이유도 예수의 존재 자체가 보여주었던 새로운 정치 형태, 반폭력적 정치에 대한 거부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의 권력에 대한 포기였다. 여기서 말하는 반폭력적 정치란 단순한 평화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고난에 동참하는 자기 희생이요 자기비움이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정당한 방법을 통한 목적 달성이 불가능할 때 우리의 정당한 목적을 기꺼이 포기하고자 하는 태도 자체가 어린양 승리에 찬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신적 지위를 거부하고 십자가를 짊으로써 하나님 나라 건설의 세속적 효율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신적 사랑에 헌신하였다. 그가 보여준 신적 사랑이란 초대교회가 즐겨 불렀던 그리스도 찬가(빌 2:6-11)에 나타난 예수의 케노시스(kenosis) 행동에서 나타났다.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이러한 그의 케노시스 행동은 단지 그가 신의 지위를 포기하신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 사회에서 우러러 봄을 받는 권력을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비우신 것은 세상에 대한 주권의 포기였으며, 모든 세상적 효율성을 포기한 것이다. 이 포기가 바로 하나님의 승리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찬가의 케노시스 사상은 예수의 포기가 그리스도인 윤리의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자기 희생과 자기 비움을 통해서 역사를 움직이는 자이며 인류의 대속자다. 그의 윤리와 행동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한다. 요더가 통찰한 예수의 진정한 권력이란 자기를 포기하고, 고난에 동참하는 자기 희생이자 자기 비움의 힘이다. 진정한 권력이란 잘못된 세상 권력을 비판하는 태도를 가지면서도 세상 권력을 획득할 수 있을 때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힘이 예수의 자기 희생이요 자기 비움의 힘이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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