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기독교를 반대하는 최고의 주장’(The best argument against Christianity)을 7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Shinedown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룹의 “Daylight”라는 노래에 필자 마음에 100% 와닿는 가사가 있다. “힘든 시절은 많은 것을 드러내 누가 곁에 있어주고, 누가 떠나가며, 누가 진짜인지.”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는가? 필자는 한 남자를 안다. 그는 인생 대부분 동안 이런 경험을 했고, 지금도 다시 겪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첫 번째 아내를 암으로 잃었다. 재혼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아내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그녀는 살아남았지만, 21년이 지난 지금 다른 쪽 유방에 암이 재발했다.
그는 10대 후반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지금도 아내의 항암치료를 지켜보면서 이런 슬픈 경향을 깨달았다고 한다. 평소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공부에도 참여하며, 그들을 잘 알고 있는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가족 포함)이 이런 시기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 신앙이 진짜인지 의심받는 비그리스도인 가족과 친구들은 그들 곁을 떠나지 않고, 돌봐주고, 안부를 묻고, 진심으로 사랑을 베풀었다고 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표면적인 대답, 예컨대 “그들은 긍휼이나 섬김의 은사가 없어서 그렇다”거나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다”라는 말은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처럼 과잉 소통의 시대에, “생각하고 있어. 기도하고 있어.”라는 간단한 문자조차 하지 않는 이런 무관심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간디가 이렇게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네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당신네 그리스도인들은 싫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너무 다르다.” 어떤 범퍼스티커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하나님, 제발 당신의 ‘착한 사람들’로부터 저를 구해주세요.”
필자는 기독교 변증학과 신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기독교 진리를 위한 최고의 논증들을 많이 써왔지만, 기독교에 반대되는 최고의 논증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단연코 이길 주제가 있다.
바로 일부 자칭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다.
물론 여기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싸잡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변화된 삶을 살며 세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앨빈 슈미트의 『기독교가 세상을 바꾼 방식』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고 말씀하셨다면, 오늘날 교회 안의 많은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마태복음 7장 13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좁은 것일까?
간디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다. 무신론 철학자 니체도 이렇게 말했다. “구속자가 정말 존재한다면, 그를 따르는 자들의 얼굴에서 구속의 흔적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 유명 변증가가 전도하던 사람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회심이 정말 초자연적이라면, 왜 내가 아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그 변화가 그렇게 분명히 드러나지 않습니까?”
존 맥아더 목사도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크리스천들의 이혼율이 세상과 다르지 않고, 미혼 청소년의 임신율도 교회 안팎이 같고, 술과 약물 중독 통계도 차이가 없다면,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이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의 증거가 없는 것일까?”
정말 좋은 질문이다. 성경은 두 가지 답을 준다. 첫째, 성경을 들고 있다고 해서 다 거듭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구원에 이르는 자는 적다”(마 7:13)고 하셨고, 바울도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고 권면했다. 고린도후서 주석가 키스테마커는 이 시험에서 실패하는 것은 복음과 사람들에 대한 마음의 완고함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패는 마음을 굳게 하고, 마음의 완고함은 영적 죽음으로 이끈다.”
둘째, 로마서 7장에서 말하듯, 인간의 육신적 본성이 문제다. 이 본성은 많은 끔찍한 모습으로 드러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무관심이다. 이것은 황금률을 질식시킨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암투병 중인 부부의 상황을 생각해보라. 여러분이 암에 걸렸다면, 다른 이들이 어떻게 해주길 바라겠는가? 버림받는 것인가, 아니면 곁에 있어주며 사랑과 격려를 주는 것인가?
답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런 무관심과 성경이 “육체의 일들”(갈 5:19)이라 부르는 것들이 드러날 때, 세상은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멀리한다. 그리고 로마서 2장 24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모독을 받는도다”라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우리는 기독교의 산 증거가 아니라, 기독교를 반대하는 산 논증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의 일부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야고보서의 권면을 따르는 것이 좋은 시작점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고 돌아서서 곧바로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으나, 온전한 율법을 주의 깊게 보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2–25)
요즘 여러분은 말씀을 행하는 자로 살고 있는가? 특히 고통과 어려움 속에 있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가? 아니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는가?
만약 후자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관심에서 깨어나야 한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여 주여’ 하면서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
인생은 많은 이들에게 고통스럽다. 그 싸움 속에 여러분이 필요하다. 분명하다. 힘든 시절은 많은 것을 드러낸다. 누가 곁에 있고 누가 떠나가며 누가 진짜인지, 진짜가 되라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할때 그때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제5의 복음’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삶을 보여주는 산 증거, 기독교의 강력한 논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는 말씀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모두에게 윈-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