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총회장 김영걸 목사) 역사위원회(위원장 장의환 목사)가 17일 오후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 그레이스홀에서 ‘제109회기 한국교회사 포럼’을 ‘한국기독교 선교140주년 기관연구 – 제중원과 한인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행사는 개회예배, 한국교회 논문공모 시상식, 발표, 논찬 순으로 진행됐다. 개회예배는 이원범 목사(총회 역사위원회 서기)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박재순 장로(총회 역사위원회 회계)가 대표기도를 드렸다. 이어 김영걸 목사가 ‘확실하게’(누가복음 1:1-4)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어 참석자들은 찬송가 208장 ‘내 주의 나라와’를 찬송했으며 김영걸 목사가 축도했다. 이어 장의환 목사가 인사말을, 윤장훈 목사(남대문교회 위임)가 축사를 전하며 개회예배 순서가 마무리됐다.
이어진 한국교회 논문공모 시상식에서 오혁 전도사(장신대 박사과정, 예행교회)가 총회장상을 오애리 전도사(장신대 일반대하권 선교신학 박사과정)가 역사위원장상을 수상했다.
이어진 발표에서 김일환 박사(장신대)가 ‘제중원 초기 신앙공동체 형성의 역사: 1894-1904년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김 박사는 “1885년 4월 10일, 알렌 선교사의 노력으로 설립된 제중원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자 선교 거점이었다. 이곳은 조선 선교의 전진 기지로서 의료 사역과 복음 전파가 함께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초기에 온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 초기 선교사들은 제중원을 중심으로 한국인들과의 관계를 맺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 갔다. 알렌, 헤론 등의 제중원장과 선교사들은 조선의 상황에 맞는 선교 방식을 고민하며 의료와 선교의 조화를 꾀했고, 제중원은 단순한 병원을 넘어 학교, 교회 설립과도 연계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했다.
이어 “1893년 말, 에비슨 선교사가 제중원의 책임을 맡으면서 병원 운영을 개선하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는 열악한 병원 시설과 부정부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북장로회 본부와 조선 정부 양측에 개선안을 제안했고, 이로 인해 1894년 2월부터 새 운영 규정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조선 정부 측 인사들의 부정으로 인해 개선은 지체되었고, 에비슨은 결국 병원 운영을 포기하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이후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등의 정세 변화 속에서 조선 정부는 제중원의 운영권을 공식적으로 에비슨에게 위임하게 되고, 1894년 9월 26일부로 제중원은 북장로회 한국 선교회의 공식 기관으로 재편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운영권 이양 이후, 에비슨은 본격적인 복음 전도 활동을 제중원 내부에서 시작합니다. 외래 환자 대기실에는 전도지를 비치하고, 환자들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해 복음을 전하며, 점차 주일 예배와 기도회를 정기적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특히 1895년에는 남녀를 분리한 예배가 시작되며 신앙 공동체의 형태가 더욱 명확해졌다. 제중원은 단순한 의료 기관을 넘어 환자와 직원, 지역 주민이 함께 모이는 복음 공동체로 성장하였고, 이 시기의 활동은 이후 서울 지역 교회 형성에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중원은 한국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태동기에서 중심적 역할을 감당한 ‘선교적 교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서선영 박사(장신대)가 ‘미국 북장로회 한국 선교회 서울지부의 곤당골 진출과 제중원: 빈튼(C,C, Vinton)의 활동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서 박사는 “제가 발표하는 내용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가 매입한 곤당골의 학교 건물과 그 건물에서 활동하거나 거주했던 인물들을 연결하여 곤당골 교회의 기원을 밝히려는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해당 건물은 ‘로워 스쿨 빌딩’으로 불렸으나 일반적으로 ‘초등학교 건물’로 번역되어 왔으며, 이 발표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학교 건물’로 지칭한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서울 소공동 일대의 부지를 600달러에 매입하고, 약 1,700달러를 들여 수리한 이 건물은 고아와 사생아들을 위한 기독교적 교육의 출발점이자, 장차 기독교 대학 설립의 꿈을 담은 첫 시도였다”고 했다.
이어 “하지만 학교 개교는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해 무산되었다. 선교사들은 1888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학교 설립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이미 공립학교가 있으니 사립학교는 필요 없다’며 거절했다.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지 않겠다고 명시했음에도, 정부는 언더우드 등의 활동에 전도 의도가 있다고 의심했고, 이는 결국 허가 불허로 이어졌다. 결국 막대한 예산을 들여 수리된 학교 건물은 사용되지 못한 채 남게 되었으며, 이는 선교회로 하여금 선교 전략과 방향을 재조정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1890년대 초 선교회는 선교사 간의 갈등과 제조원의 기능 약화, 학교 불허 등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이 가운데 마포삼열 선교사는 중재와 조정을 통해 1891년 선교회의 규칙 제정, 지방 선교 확장을 위한 토지 구입, 그리고 정동 고아원을 ‘남학교’로 개편하는 등의 조치를 주도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단지 위기를 넘기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한국 선교의 방향성을 새롭게 설정하는 전환점으로 작용하였으며, 곤당골 학교 건물은 그 상징적 출발점으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