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강해 3. 은혜받은 룻

오피니언·칼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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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 1:22-2:13
이희우 목사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도착한 룻,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베들레헴은 고향이지만 모압 여인인 룻에게는 낯선 땅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막막하다. 무엇을 해도 이곳에서는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이방인, 그것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의 나라 사람, 사람들은 저주받은 종족인 모압 여인 룻을 ‘모압 여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나오미의 며느리’라고 부르는 과부댁의 젊은 과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모압댁’이라는 말이다.

1장 21절의 ‘비어 돌아온’이라는 표현대로 빈털터리, 가진 것 하나 없이 베들레헴으로 왔다. 하지만 성경은 그때가 보리(barley) 추수기라고 했다(22절).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는 희망이 깃든 표현이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 보리가 누렇게 익어 온통 황금 들판이다. 룻은 거기서 보아스를 만나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은혜를 받는다.

이삭줍기

베들레헴으로 온 룻에게는 모든 것이 다 낯설었다. 특별히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다르게 생긴 젊은 모압 여인,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집안에만 칩거할 수도 없다. 당장 먹을 양식이 없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보리 수확기,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허락을 받고 땅에 떨어진 보리 이삭을 줍기 위해 인근 밭으로 나간다. 쉬운 일 아니다. 수모나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용감하게 밭으로 나간다. 꼭 이삭을 줍겠다는 것이다.

이삭줍기, 2장에 여러 번 나오는 동사인데 이것은 한 마디로 ‘은혜’라고 해야 할 것이다. 2장의 핵심, 그런데 2장의 더 큰 핵심 단어는 ‘이삭줍기’가 아니라 ‘은혜’라는 단어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굶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추수 때 떨어진 이삭을 거두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이 줍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성경 두 곳에 나오는데 레위기와 신명기 말씀이다(레19:9-10, 신10:18-19).

가난한 사람, 타국인,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이 목숨을 연명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추수할 때 밭모퉁이는 거두지 말고, 이삭도 줍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하셨다. 마치 예전에 시골에서 까치밥을 남겨둔 것과 비슷하다. 어찌 보면 동냥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룻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룻에게 체면 따위는 사치, 그럴 여유가 없다. 그래서 무작정 밭으로 나간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하기로 결심한 거다.

그런데 룻이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룻기 2:2)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아무 밭에 들어가 이삭을 주울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마음씨 좋은 사람 밭이어야 한다. 더욱이 모압 여인이라면 그냥 타국인이 아닌 것, 쫓겨날 조건이 충분하다. 그래서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줄 밭 주인을 만나야만 한다. 좋은 밭 주인을 만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룻은 당찬 여인, 그저 은혜를 기대하며 용감하게 밭으로 나간다.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다(2:3). 성경은 ‘우연히’라고 했지만 스토리를 보면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신 것,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렇다. 여기서 팁이다. “하나님은 우연인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실 때가 많다.”

그리고 성경은 마침 보아스가 밭에 나왔다고 했는데 사환들이 주인을 닮았을까? 이미 모압 여인 룻에게 이삭을 줍게 했다. 친절하다. 주인을 닮은 것 같다(2:6-7).

이삭을 줍는 룻의 모습은 프랑스의 국민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두 명작을 연상하게 한다. 첫째는 ‘이삭 줍는 여인들’(The Gleaners)이라는 작품이다. 널리 알려진 그림인데 세 명의 여인이 이삭을 줍는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두 여인은 머리를 땅에 처박듯이 허리를 굽히고 있다. 그중 한 여인은 허리가 아픈지 허리에 손을 얹고 있고, 또 다른 한 여인은 허리를 펴고 이삭을 추스른다. 그런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바탕이 파스텔톤의 노란 색이라 ‘평온한 추수 풍경’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여인들의 등을 밝히는 햇빛이 마치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여인들의 손이 투박하다. 마치 시커먼 솥뚜껑 같다. 오른편 위쪽으로 멀리 말을 탄 지주의 모습이 보이고, 그 곁에는 농부들이 떼를 지어 추수를 한다. 하지만 농사를 짓지 못할 만큼 가난해서 먹거리를 찾아 떨어진 보리 이삭을 줍고 있는 이삭 줍는 여인들의 모습에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룻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다.

또 한 작품은 ‘만종’(Angelus)이다. 왠지 모르지만 6,70년대에는 이발소마다 이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림은 전원적이고 신앙적이고 평온해 보인다. 황혼녘에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에 부부가 하던 일을 멈추고 경건하게 마주서서 기도를 드린다. 일을 마칠 무렵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 같은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색감이 많이 흐리고 어둡고 우울하다. 슬픈 이야기가 숨어있기 때문인 것 같다.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Louvre Museum)은 자외선 투사 작업을 통해 바구니 속의 감자가 초벌 그림에서는 어린아이의 관이었음을 입증했다. 원래 그 바구니에 아기 시체가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죽은 아기, 그 아기를 위해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그렸다는 것, 그래서 가난한 농부 부부를 옷은 허름하고, 손과 발이 뭉툭하고, 얼굴은 흐릿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어려운 시절, 룻처럼 절박한 사람이 너무 많다. 하지만 룻처럼 은혜를 기대해야 한다. 골목 상권까지 장악하는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또 날마다 편 가르기만 하는 정치인들이 정말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회복을 위한 정책대결로 제대로 의정활동을 하기만 한다면 그래도 살길이 열릴 것이다. 이삭줍기조차 힘든 시절이지만 기억하라. 룻에게 이삭줍기는 ‘은혜’였다.

보아스 줍기

이삭을 줍던 룻이 보아스를 만난다. 2장 1절에 의하면 그는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였다. 아직 나오미도 룻도 만난 적 없는 사람, 아니 잘 알지도 못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이 너무 어려운 처지라 상당한 재력가가 도와야 할 형편이라 그랬을까? 성경 기록자는 서둘러 보아스를 소개한다. 3절의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라는 소개만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굳이 1절에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유력한 자 보아스”라고 먼저 그의 소개를 넣은 것이 특이하다.

‘엘리멜렉의 친족’, 그리고 힘도 있고 재력도 있는 ‘유력자’, 유력자는 히브리어로 “이쉬 깁보르 하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구원자의 등판, 가난한 신데렐라의 운명을 바꾸어줄 왕자와 같은 영웅의 출현이다. 룻이 귀인(貴人)을 만난 것이다.

만남의 비결은 신실함이다. 밭에 나간 보아스의 눈에 낯선 소녀가 보여 누군지 물었을 때 사환이 보고한 내용이 그렇다.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는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룻 2:7), ‘아침부터 지금까지’, 신실하다는 말이다. 시골에서도 외진 곳, 가만히 있어도 구설수에 오를 수밖에 없는 모압 여인, 2장 10절에 보면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그러고, 13절에서는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스스로도 비천하게 여기는 사회적 약자,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보아스 보기에 룻은 너무 착하고, 너무 예쁘다. 호감이 간다. 더욱이 소문도 좋다(2:11). 소문이 중요하다. 공감한다면 습관적으로 좋은 말을 하고, 적극적으로 좋은 말을 해야 한다. 얼마나 사랑스러웠던지 보아스가 말한다.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룻 2:8), “다른 밭으로 전전긍긍하지 말고 내 밭에서만 주우라”며 은혜를 베푼다. 결국 룻은 이삭줍기 정도가 아니라 진짜 기대하던(?) 보아스를 주웠다.

보아스가 한 말의 핵심은 히브리어로 ‘다바크’(דבק), ‘꼭 붙어있으라’라는 말이다. 1장 14절에서 룻이 시어머니를 ‘붙좇다’라고 할 때 썼던 바로 그 단어, 이 단어가 룻의 성품을 가리킨다. ‘다바크’, 끝까지 붙어있어야 은혜받는다. 하마터면 떠돌이 이삭줍기 신세가 될 수도 있었는데 룻이 안정된 일자리를 얻은 것, 보아스가 ‘이쉬 깁보르 하일’(힘있는 사람)답게 바로 일자리를 제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고정시켜줌으로써 이 밭 저 밭 기웃거리며 구차하게 부탁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운명적인 만남, 앞에서 이 만남을 ‘우연히’라고 했지만 우연이란 것은 현재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것, 미래적 관점에서 보면 우연이 아니라 그 만남은 ‘필연’이었다. 여기서 깨닫는 것은 우연은 필연으로 발전하는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팁이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숱한 우연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필연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룻이 보아스를 주운 것은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등재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 그날 룻이 받은 은혜는 너무도 큰 하나님의 은혜였다.

기쁨 충만

룻을 본 보아스의 첫 느낌이 너무 좋다. 첫눈에 반했을까? 2장 8절에 보면, 호칭이 ‘내 딸’이다. 그만큼 사랑스럽다는 호칭일 것이다. 보아스에게 호감이 생겼다는 것인데 룻의 외모 때문일까? 아니다. 빈털터리로 돌아온, 망한 여인의 외모라면 초라했을 것이다. 성경도 룻을 미인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예쁘게 보이는 이유는 너무 착하기 때문이다. 이게 중요하다. 호감이 생겼기 때문에 예쁜 것, 만일 비호감이거나 최소한의 관심도 없었다면 아무리 예쁜 짓을 해도 밉게 보였을 수 있다.

그러면 동냥하러 온 사람을 좋게 본 보아스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보아스가 베들레헴으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룻 2:4). 사람들이 만날 때 서로 인사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서로가 인사한 것을 성경에 이렇게까지 기록한 것은 무척 드문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보아스와 베는 자들이 서로 인사했다고 성경이 기록한다. 룻기는 짧은 책, 그렇다면 상투적이고 일상적인 인사는 아닐 것 같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는 자기가 거느리는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했을 뿐만 아니라 정중하게 복을 빌어 준다. 멋지다. 아랫사람이라 하대할 수도 있었는데,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 그는 한 마디로 잰틀맨이다. 맞다. 인사를 잘해야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든 자주 보거나 본 지 오래된 사람이든 사람은 인사만 잘해도 좋은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잰틀맨 보아스, 한 명 한 명 추수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다 낯선 룻을 발견한다. 사환을 불러 누군지 확인한다. 자기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다 알았다는 뜻이다. 이름도 알고, 누구네 집 사람인지, 결혼은 했는지 그들의 사정을 안다.

과부요 이방인이요 가난한 자였던 룻이 호감 가는 사람, 능력 있는 이상적 구원자를 만났다. 은혜다. 얼마나 기뻤을까? 모르기는 해도 룻은 현실의 높은 벽이 다 허물어지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 같다.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를 주운 룻, 날아갈 듯 기쁘다. 이삭줍기라는 작은 일이 너무 큰 열매를 얻게 했다. 만일 타국까지 와서 고작 이삭이나 주워야겠냐는 자세였다면 보아스를 만날 수 있었을까? 내가 이런 일 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시대, 우리도 룻처럼 이삭줍기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좀 잘살게 되면서 직업에 귀천이 생겼다. 힘든 일은 아예 안 하려고 한다. 제도와 정책에도 문제가 있다. 어디 좀 다니다 그만두면 받는 실업급여 믿고,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꾸준히 일하지 않는다. 당사자들은 정말 도저히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고 할지 몰라도 꼰대(?)처럼 볼 때 취직했다가 힘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너무 쉽게 그만두고, 또 취직했다가 또 그렇게 그만둔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룻의 성실한 이삭줍기가 더 큰 은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보아스는 룻이 베들레헴에 온 것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보호받으러 온 것”이라며 “하나님이 상주시기를 원한다”고 한다. 네 장밖에 안 되는 짧은 책에 ‘여호와’라는 단어가 18번이나 나온다. 그렇다면 룻기를 읽으며 룻과 나오미와 보아스만 만나지 말고 꼭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셈이다.

그 하나님께서 날개로 룻을 품어주신다.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는 것처럼 완벽한 보호를 상징하는 날개, 우리에게도 가장 안전한 곳이요, 평안을 누릴 장소, 새 힘을 얻는 장소이다. 보호받고 구원받고, 즐거이 찬송할 도움과 휴식의 장소, 소망 중에 안연히 거할 곳, 두려움 가운데 피할 피난처, 그 장소가 바로 ‘주의 날개 아래’이다. 룻의 고백이다.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룻 2:13).

감격이다. 눈물 나게 고맙다. 너무 행복하다. 기쁨 만땅! 성경은 독자들도 은혜받고 주의 날개 아래 보호받는 행복한 인생, 기쁨 만땅의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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