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로마인들에게 인식된 십자가 처형
로마의 법률가 율리우스 바울(Julius Paulus)이 편찬한 『형법』(Sentientiae)은 로마시대에 행해진 세 가지 가장 잔인한 형벌을 다루고 있다. 첫째, 십자가형(十字架刑)(crux), 둘째, 화형(火刑)(crematio), 셋째, 교수형(絞首刑)(decollatio)이다. 그리고 짐승에게 찟기는 형(damantio ad bestias)은 잔인한 형벌로서 교수형에 대신하여 종종 행해졌다.
십자가에 해당하는 범죄자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적에게 투항하는 자, 비밀 누설자, 반역 선동자, 살인자, 통치자의 번영에 대하여 불길한 예언을 하는 자, 야간에 음란한 행위를 하는 자, 마술을 행하는 자, 절박한 상황에서 변절한 자 등이다. 십자가형은 그 형벌의 가혹함 때문에 항상 하류계층에게만 적용되었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은 것은 당시 그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준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당시 사회의 하류계층에 속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류계층에게는 보다 인간적인 형벌이 적용되었다. 십자가형은 처형자를 맹수에게 던지는 대중오락과 비교 할 수 있으나, 짐승에게 찢기는 형은 대중적인 축제가 거행되는 특수한 때에 수행될 수 있으나, 십자가형은 어느 곳에서나 시행될 수 있는 일반적인 처형방법이었다.
당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Seneca) 같은 지성인도 십자가형과 같은 고대사회의 처형방법이 잔인한 방법이라고 혐오하면서도 범죄자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처형되어야 하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는 사도 바울의 말을 실감케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러한 잔인한 형벌에 의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그의 낮아지심과 대속적 죽으심의 사랑과 희생을 깨우쳐 준다.
III. 수치스러운 죽음
십자가형은 처형당하는 자를 벌겨 벗겨 눈에 띠는 장소, 네거리, 극장 안, 높은 언덕, 범행 장소에 공개적으로 진열시킨다. 그럼으로써 십자가형은 처형당하는 자의 내면에서도 최대의 수치를 느끼게 하였다. 십자가형은 인간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고대세계의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십자가형은 처형한 자를 대부분 매장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처참하게 평가되었다. 처형당한 자는 매장을 거절당하고 그의 시체는 맹수들과 시체를 뜯어 먹는 새들의 먹이로 주어졌던 것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이처럼 십자가형은 처형당하는 당사자에게 완전한 굴욕과 수치를 가져다주었다.
구약시대 모세도 “십자가형이 저주받은 형벌”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b). 그러나 모세는 그 시대의 일반적인 악한 풍습에 반하여 십자가에 처형된 자들을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로 장사지내라고 명하고 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시신(屍身)을 밤새도록 나무에 달아 놓으면 시신이 맹수들과 시체를 뜯어 먹는 새들의 먹이가 되어 훼손되기 때문에 처형된 자의 시신 보존을 위하여 그 날에 장사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죽은 자의 명예를 보존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땅을 성결하게 보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처럼 로마시대 하류 계층에게 가해지는 가장 잔인한 형벌로 처형당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낮아지심이요 겸허와 자기 비움의 모습, 인간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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