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크리스토퍼 리스의 기고글인 ‘행복의 의미란 무엇인가?’(What does it mean to be happy?)를 1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크리스토퍼 리스는 The Worldview Bulletin의 창립자이자 편집자 그리고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모든 정상적인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인간 삶의 목표라고 보았다. 미국인들에게는 행복 추구가 독립 선언서에도 자명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명시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데 동의할 수 있지만, 행복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합의하기가 훨씬 어렵다.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의견이 다르지만, 미국인(그리고 대부분의 서구인)에게 있어서 행복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고, 자신의 마음을 따르며, 개인적인 성취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인의 84%는 “삶의 가장 높은 목표는 가능한 한 최대한 즐기는 것”이라고 믿는다. 86%는 충족되기 위해서는 “가장 원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91%는 “자신을 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러한 이상은 우리가 숨 쉬는 문화적 공기에 스며들어 있으며, 대중문화 전반에서 발견된다. 디즈니 영화 『뮬란』의 사운드트랙 중 한 노래는 이렇게 조언한다. “네 마음에 진실하라 / 그때 하늘이 열릴 것이다 ... / 너의 마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1994년 애니메이션 『엄지공주』에서는 해설자 자키모가 노래한다. “네 마음을 따를 때, 멀리 여행해야 한다면, / 작은 요령 하나 있어. 별을 안내자로 삼을 필요 없어. / 심장을 믿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어.”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히트곡 “The Voice Within”에서 청취자에게 “네 안을 들여다봐... 그 안의 목소리를 믿어”라고 조언한다.
신학자 테디어스 윌리엄스는 “청소년을 겨냥한 자기숭배 팝송만으로도 1년 내내 재생할 수 있는 재생목록을 채울 수 있을 정도이다. 우리는 권위에 반항하라는 노래, 너의 모든 꿈이 이루어질 거라는 노래, 너는 슈퍼걸이거나 기대 따위는 아침밥처럼 먹어치우는 야수 같은 여신이라는 노래들을 듣는다.”라고 유머러스하게 이렇게 지적했다.
이와 유사하게, 텔레비전 프로듀서이자 작가인 숀다 라임즈는 “행복은 당신이 필요로 하고, 원하는 대로, 당신의 내면의 목소리가 말하는 대로 살아가는 데서 온다. 행복은 당신이 되려고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라, 실제의 자신이 되는 데서 온다”고 주장한다.
애플의 공동 창립자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이미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겁니다.”라고 말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이 조언에는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는 일부 진리가 담겨 있다. 우리 각자의 성격, 관심사, 욕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방식의 일부이다(예: 시편 139:13–16, 예레미야 1:5).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하게 될 목표와 꿈에 대한 지표가 될 수 있다(반드시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달라스 윌라드는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바람과 욕망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획에 중요하다”(고전 3:9, KJV)고 말했다. 프레데릭 비크너는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시는 곳은 당신의 깊은 기쁨과 세상의 깊은 필요가 만나는 곳이다”고 통찰력 있게 말했다. 이것이 보편적인 원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말이 자신에게도 적용된다고 느낀다.
기독교인의 핵심 차이는, 우리의 욕망과 목표가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를 추구하는 방식 또한 성경에 부합해야 한다. 토머스 타런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 중심일 때 그것들은 선하며 그 본래의 목적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욕망이 자기중심적이거나 타락한 세상과 죄된 본성(육신)에 사로잡힐 때 그것들은 악하다. 이런 욕망들을 ‘왜곡된 사랑(disordered loves)’이라 부르기도 한다.”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정기적으로 우리의 욕망이 왜곡된 사랑의 열매는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마르틴 루터는 인간의 본성이 타락 이후에 “자기 자신에게 깊이 굽어졌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들조차 자기 자신을 위해 휘게 만들고,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자기 자신을 위해 찾는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이유로, 자기중심적인 행복 추구 방식은 항상 실패한다. 특히 하나님을 제외할 때 더욱 그렇다. 티모시 켈러는 “우리는 스스로 삶을 주관하고, 자존감을 얻으며, 하나님 없이도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의미, 희망, 행복을 피조물에게서 찾고자 하면, 그것은 결국 우리를 실망시키고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배우 짐 캐리는 한 인터뷰에서 “모든 사람이 부와 명성, 꿈꾸던 모든 것을 얻어봐야 해요. 그래야 그것들이 진짜 해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거든요.”라고 통찰력 있게 말했다.
샬롬의 길
행복이 마음을 따르고 자신에게 진실해지는 것으로 도달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성경에서 행복의 개념은 히브리어 “샬롬”이라는 단어로 가장 잘 표현된다. 이 단어는 충만한 삶, 평안, 만족, 온전함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그 대응어가 “에이레네”(eirēnē)인데, 둘 다 영어로는 종종 “평화”로 번역된다.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샬롬”을 “번영(fluorishing)”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그는 “샬롬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 이웃, 자연, 자기 자신과의 모든 관계에서 번영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물론 인간과 피조 세계 모두가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계시록 21장)이 오기 전까지는 완전한 행복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월터스토프의 카테고리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의 핵심 요소를 잘 설명해 준다. 이제 그 세 가지를 간단히 살펴보겠다.
1.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는 기초이며, 다른 두 가지 영역(자기 자신, 타인)에서의 번영을 가능하게 한다. 창세기 초반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첫 인간의 반역으로 그 관계는 단절되었다(창세기 1~3장, 로마서 5:12). 그 결과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로 태어나게 되었다(에베소서 2:1).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로마서 5:1)는 것이다. 이 회복된 관계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에베소서 1:3).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며, 성령을 통해 생명을 얻는다(요한복음 7:38; 14:16–18; 15:4–5).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 위해 창조된 목적을 이루게 되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번영할 수 있다. 블레즈 파스칼은 통찰력 있게 이렇게 말했다: “[인간 안에는] 한때 진정한 행복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 흔적만 남았고, 그는 이를 주변의 모든 것들로 채우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 무한한 공허는 오직 무한하고 불변하는 대상, 곧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자신과의 관계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자기 자신에게 굽은 존재”가 되었다. 로마서 1장에서는 이 퇴보의 과정을 설명한다. 사고는 허망해졌고, 마음은 어두워졌다. 우리는 우상숭배자가 되었으며,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 내버려두셨다. 그 결과 우리는 “온갖 불의, 악, 탐욕, 악독”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이다(로마서 1:29). 이러한 악덕은 번영과는 반대 방향으로 이끈다.
코넬리우스 플란팅가는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것은 단지 그것이 율법을 어기기 때문만이 아니라, 샬롬을 파괴하고, 평화를 깨며, 사물의 본래 모습에 반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실한 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구원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우리는 “새 피조물”(고린도후서 5:17)이 되었고,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하나님을 따라 창조된 새 사람”(에베소서 4:24)이다. 이 새 자아는 “창조주를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된 자”로서 “점점 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변화되고”(고후 3:18) 있다.
이러한 구속은 신자에게 평화와 기쁨의 근원이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죄인이고 결함이 많지만,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사랑받고 받아들여진 존재이다.”
3. 타인과의 관계
마지막으로, 타락은 하나님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도 파괴한다. 창세기 3장 이후 우리는 수치심과 비난이 아담과 하와 사이의 조화를 어떻게 왜곡시켰는지를 보여준다(창세기 3:7, 12). 인류는 더 이상 상호 지원과 연합 속에 살지 않고, 적대와 분열, 폭력에 치우치게 되었다(창세기 4:8; 6:11–12).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원수 된 것”의 담이 허물어졌다고 증언한다(에베소서 2:14).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의 새 사람”(에베소서 2:15)이 창조되었고, 우리 모두는 새로운 가족으로 초대되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도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상기시킨다(갈라디아서 3:28). 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짐을 지고(갈 6:2), 서로 용서하고(골 3:13), 서로를 사랑과 선한 일로 격려한다(히 10:24).
성령께서는 우리가 점점 더 예수님을 닮고, 자기중심성을 버려가도록 성화의 과정을 이끌어 가신다(고후 3:18; 빌 2:3-4). 그 결과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더 많은 샬롬을 경험하게 된다. 트레버 허드슨의 설명은 이 변화를 잘 포착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이전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열려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만 휘어져 있지 않는다. 우리는 옆 사람도 하나님 눈에 무한하고 대체 불가능하며 귀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특히 실패와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온유함을 갖게 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와 이웃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끊어질 수 없는 연결로 엮여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세 가지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샬롬을 어떻게 회복하셨는지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핵심은 우리가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진정한 근원은, 우리의 욕망이나 야망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테디어스 윌리엄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자신을 숭배할수록, 당신은 당신 자신을 덜 닮아가게 된다. 당신은 그림자, 유령, ‘비자아’가 된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답을 찾으려고 할수록, 그것은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자기 숭배의 이상한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