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와 공공신학 - 리처드 백스터의 공공신학적 면모와 시사점(2)

오피니언·칼럼
황경철 박사(국제복음과공공신학연구소)

2. 청교도의 공공신학적 면모

황경철 박사.

토머스 풀러는 영국 국교회의 계서제와 예배를 반대하는 이들을 청교도라고 부르는 데서 청교도의 기원을 찾으며, “퓨리탄(청교도)”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1564년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윌리엄 할러는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정책을 비판하며 1572년 영국의 개혁가들이 의회에 제출한 “의회를 향한 권고문”(An Admonition to the Parilament)이 청교도 운동의 주요한 시발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내용은 로마 가톨릭의 모든 잔재를 제거하고 오직 기록된 성경 말씀에 따라 영국교회와 예배를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그들을 비하하는 의미에서 “퓨리탄”이라고 불렀다. 흔히 청교도 시대는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는 1558년부터 관용령(The Toleration Act)이 시행된 1689년까지를 일컫는데, 청교도 안에는 교회 정치적으로 볼 때,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등 다양한 갈래가 있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행위 공로를 가르치는 로마 가톨릭,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소키누스, 그리고 알미니안과 반율법주의자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신앙적, 교리적 토대를 공유하였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엽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은 한 마디로 격동의 혼란기였다. 왕당파와 의회파의 정치적 싸움은 국교회와 청교도의 종교적 대립과 맞물려 갈등이 증폭되었다. 물가는 적어도 400에서 650퍼센트 상승하였고, 임금은 턱없이 낮은 지경이었다. 인구도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영국의 인구는 거의 두 배로 뛰어 약 500만에 육박하였다. 사회 계층은 위로는 지대(地代)에 의존하여 생활하는 대·소지주들이 있었고, 독립적 농민인 젠트리(gentry)와 요먼(yeoman)이 중간에, 그 아래 임금노동자들이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부 주도로 개혁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청교도들은 설교와 교리 교육을 통해 예배와 개혁 운동을 이끌어 갔다.

청교도들은 일차적으로 예배와 교회개혁에 힘썼지만, 그 영향력은 교회 안에서만 그치지 않았고 사회 전반과 신자의 일상으로 확장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아 국민을 돌보고 다스려야 한다는 계약(언약)을 위반하고 폭정을 일삼는 위정자에게 저항하도록 시민적 저항권을 일깨웠고, 개인적 삶의 성화뿐 아니라 직업 소명을 통해 일의 성화와 이웃 사랑을 강조하였다. 또한 가난하고 못 배운 사회적 약자(농민과 노동자 계층)를 돌보고 교육하였고, 빈민을 구제하며,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간호하기도 하였다. 청교도들의 시각은 교회 안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삶 전체의 회심과 변혁을 추구했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조엘 비키와 랜들 페더슨은 청교도들이 성경에서 발견한 내용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는 데 힘썼을 뿐 아니라, 총체적 회심, 대(對) 국가적 삶과 관련된 큰 질문들에 대한 성경적 해답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격변기 가운데 진행된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와 그 결실로 얻어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은 특별히 십계명 해설 부분에서 공공신학적 의제들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기에 공공신학의 목적, 방법, 내용 등과 관련하여 성도의 공공신학적 삶을 위한 매우 훌륭한 교본이 될 수 있다고 우병훈은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많은 청교도와 그들의 가르침을 통해 확인된다.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는 청교도 운동의 중심지인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대학의 교수로서 제모(制帽), 예복 등 영국 국교회의 권위주의적 종교의식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교회와 국가를 포괄하여 사회 전반의 개혁에 성경을 철저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또 그렇게 시도하였다.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는 제네바에 머무르는 동안 칼빈의 개혁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은 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메리 여왕에게 순교자적 자세로 저항함으로써 교회와 사회 개혁의 토대를 놓았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옵소서”라는 그의 유명한 기도는 철저한 칼빈주의적 신학 위에서 개혁을 이끌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예배를 무시하고 우상숭배하는 통치자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는 자로 간주하고, 이러한 통치자에 대하여 시민들은 순종할 이유가 없다고 보고 시민들의 저항을 강조하였다.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는 누구 못지않게 언약 신학을 정치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적용한 신학자로서 왕이 언약의 의무와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폭정을 펼치면 그 언약은 무효가 되고 왕위는 폐해진다고 하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설파했다. 실제로 러더포드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행해진 일이나 루터 시대의 신학자들은, 저항이 적법한 것”임을 보여주며, 이 점에 있어서 “칼빈, 베자, 파레우스, 독일 신학자들, 부캐넌”등은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러더포드의 저항권 사상에 영향을 주었던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는 “왕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지 백성이 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천명하며, 왕이 하나님의 법과 자연법을 어기고 폭압 정치를 일삼아 이에 대한 다른 어떤 타개책도 없을 때 하급 관료들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무기를 들고서라도 폭군에게 저항할 수 있다고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의 공공신학적 면모는 폭군에게 저항하고 성경적으로 국가를 개혁하려는 정치적 영역에서뿐 아니라 직업적 영역에서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은 중세교회의 유산으로 주어진 성(聖)과 속(俗)의 구분을 철폐하고, 믿음과 소명이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가 영국 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기도 했다. 그의 주장은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에 의해 더욱 구체화 되었는데, 퍼킨스는 수도사들의 직업관을 통렬하게 비판하며 직업을 통해 사회에 공공선과 유익을 끼쳐야 한다고 했다.

금식과 기도에만 열중하고 세상과 동떨어져 살기 때문에, 완전을 실현하고 살아간다고 확신하는 수도사들의 주장은 얼토당토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수도원적 삶의 양식은 저주스럽기 그지없다. 모든 신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부여된 금식과 기도의 의무를 제외하고서는, 모든 사람은 특별하고도 구체적인 소명을 통하여 사회에 선하고 유익한 성원과 지체가 되는 것이다.

그는 소명이란 일종의 생활 태도로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부여하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퍼킨스의 가르침은 돈만 얻을 수 있다면 윤리와 도덕, 체면까지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심지어 이웃의 목숨까지 경시하는 자본주의적 세계관에 노출된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신선하고도 커다란 울림을 준다. 청교도들의 직업관은 그들의 생업이 생계를 유지하는 방편을 넘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장으로 확립되도록 기능하였다.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 1551-1618년)는 누구도 자기 소유물을 지닌 소유자가 아니라 단지 청지기로 존재할 뿐이므로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축복을 지혜롭고도 진심으로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청교도의황태자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신자가 사회적 책임을 지고 공공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하면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개인의 신앙과 공동체 윤리의 조화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청교도들의 공공신학적 자세는 정치적 영역과 직업적 영역뿐 아니라 일상적 삶에서도 확인된다. 그들에게 복음과 성경적 가치는 종교적 의식이나 행위가 아니라 삶 전체에 작동하는 원천이 되었다. 청교도들은 개인의 도덕성은 물론 사회 전체의 질서와 순결에 깊은 관심을 두었는데, 이것은 구성원 개개인이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중요한 책임 의식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사회의 종교개혁과 청교도 운동은 사회 전체를 변혁하는 기폭제가 되었는데, 노동자나 농민뿐 아니라 지도층에게까지 복음적 가치가 확산되었다. 구체적 예시로 영국 의회는 노예제를 폐지하고, 사회보장제도의 모판을 마련했으며, 빈민 구제 기관을 설치하고, 자선의 범위를 극빈자, 노아, 산모, 노숙인, 장애인, 특수 질환자까지 확대하였고, 서민금고나 보험제도 및 자선 학교, 자선 병원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청교도 사상은 사람들의 생활양식까지 쇄신하였는데 정직, 근면, 절제, 상호존중, 약자 배려의 가치가 뼛속 깊이 공유되었고, 합의된 규칙에 대한 준수, 민주적 절차, 투명한 운영, 대화와 토론이 사회 전반에 자리 잡도록 일조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노동자들의 의식과 품위에도 영향을 미쳐서 도덕성을 추구하는 온건한 방책이 노동운동가들의 거의 일치된 방법론이 될 정도였다. 그 결과로 폭력적 선동이나, 차후에 출현하는 마르크시즘이 영국 사회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외면 받는 요인으로까지 작용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청교도들은 공적 영역과 사회 활동에 대거 참여했는데, 그들은 수적(數的)으로만 증가한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국교회 신자와 대등한 역할과 활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순종이 삶 전체의 헌신, 자기를 희생하는 공공정신, 그리고 직업에서도 상호 복종과 공공의 유익을 위한 덕성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세상을 악마의 놀이터나 멸망해 없어질 악한 세상이라고 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로 이해하며 세상을 더욱 아름답고, 질서있고, 바르고, 정의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음으로 잘 인식하고 있었다.

Ⅲ. 리처드 백스터의 공공신학적 논의와 시사점

1. 백스터의 역사적 배경

백스터는 1615년 슈롭셔의 슈르스버리 근교의 로우톤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서와 연구로 지적 세계를 넓혀갔다. 백스터가 회고록에서 밝히듯 윌리엄 퍼킨스의 전집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결단하도록” 사용하신 수단이 되었다. 1639년 슈롭셔의 브리지노스의 부목사가 되면서 비국교도 체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발전시켰고, 2년 후 키더민스터의 목사가 되었다. 키더민스터에서 17년의 사역(1641-42, 1647-61)은 상당한 열매를 맺었는데, “죽어 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하듯” 설교했고, 뜨거운 기도와 부지런한 심방, 성령의 역사로 많은 회심의 결과를 낳았다. 의회파와 왕당파 간의 싸움(Civil War, 1642-46, 1648-52) 초기에 백스터는 의회군을 지지하며 크롬웰 앞에서 설교하기도 했지만, 호국경의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관용을 불편해했다. 비록 결핵과 신장결석으로 건강은 계속 좋지 않았지만, 열정적인 설교와 심방과 교리 교육으로 키더민스터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공동체로 개혁하고자 힘썼다. 매주 이틀씩 교인들에게 교리문답 교육을 하였고, 조수와 함께 각 가정을 심방하며 자신이 신자 교육을 위해 직접 쓴 책 한두 권을 나누어 주었다.

호국경이었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658년 사망하고, 1660년 왕정복고로 찰스 2세가 즉위한다. 백스터는 국왕으로부터 궁정 목사직을 제안 받지만, 백스터는 국가의 통제 아래 있는 감독제를 반대하였기에 그 제안을 거절한다. 그때부터 백스터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다. 1662년 8월 찰스 2세의 대추방령이 있었고 약 2,000여 명의 비국교도 목사들이 추방당했다. 1689년 관용령이 선포되기까지 백스터는 공식적인 교회 사역을 할 수 없었다. 이 시기 동안 백스터는 많은 투옥과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저술 활동에 집중하여 약 200 여권의 작품을 후대에 남기게 되었다.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백스터의 목회 여정에는 최소한 세 가지 객관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치열한 전쟁과 만성 질병과 투옥으로 인한 박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백스터는 존 오웬 전집의 두 배에 달하는 저작을 남겼고, 신학의 실천적 적용편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생활 지침」 시리즈를 개인, 교회, 사회 영역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이고,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안내서를 남겼다. 1691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백스터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작은 펜에 지나지 않는다네. 펜에게 무슨 칭송할 것이 있겠는가?” 역사적 격동기에서 헌신적으로 목회를 섬겼던 백스터의 삶과 저술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혼란한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의 목회자에게 공공신학적 측면에서 어떤 가르침과 시사점을 줄 수 있을까? (계속)

#황경철 #황경철박사 #국제복음과공공신학연구소 #청교도 #리처드백스터 #공공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