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시각에서 본 영화 <파묘>

오피니언·칼럼
노재원 목사의 무비 앤 바이블

※ 이 글은 영화 <파묘>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파묘 메인 포스터. ©배급: ㈜쇼박스

부를 대물림하며 살아온 한 부유층 집안에 기이한 병이 대물림됩니다. 현대의술로 치료가 안 되자 무당에게 해결을 의뢰하죠. 조상의 묫자리가 화근임을 알아챈 무당은 그 방면에 유능한 풍수사, 장의사와 팀을 꾸려 이장(묘를 옮김)을 진행합니다. 그런데 풍수사가 보기에 이 묫자리는 절대 사람이 묻힐 수 없는 악지(惡地)입니다. 기이함과 불길함을 감지한 채 파묘(옮기거나 고쳐 묻기 위하여 무덤을 파냄)를 진행하는데, ‘험한 것’이 나와 버립니다. 그리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눈에 보이는 ‘험한 것’

영화 <파묘>는 관 속에서 나온 ‘험한 것’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을 그려낸 소위 ‘오컬트 영화’(초자연적 사건이나 현상을 소재로 삼아 신비감이나 공포감을 주는 영화)입니다. 이런 류의 영화는 그 소재가 관객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데 얼마나 주효했느냐로 성패를 평가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두려움의 대상인 ‘험한 것’이 사람 눈에 보이는 물리적 실체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은 영화의 호불호를 가를 것 같습니다. 음산하고 험악한 형상이 일단 관객에게 말초적 공포감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계속해서 눈에 보이게 되면 이내 질리는 법이지요. 자연히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험한 것’이 주는 공포감이란 점차 약해집니다.

두려움이란 그 대상이 보이지 않을 때 극대화됩니다. 적잖은 오컬트 영화들은 이 점을 파고들지요. <랑종>(2021)에서 악령은 활개 치며 참극을 유발하지만, 그 실재적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저 악령에 빙의된 여인이 유리에 제 모습을 비칠 때 희미하게 실루엣을 보여줄 뿐이지요. <유전>(2018)에서 사악한 ‘그 존재’도 끝끝내 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곡성>(2016)에서 악마도 마지막에 잠시 모습을 드러낼 정도이구요.

반면에 파묘의 ‘험한 것’은 눈에 보일 뿐 아니라 마치 사람처럼 음식을 섭취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그것의 최후는 물리적 타격에 의해 이뤄지지요. 시공간을 초월할 뿐 아니라 완력에서도 인간을 압도하는 듯했던 ‘험한 것’이 노(老) 장의사의 기지와 뚝심에 의해 최후를 맞는 장면은 감독이 공들여 쌓아 올린 극적 긴장감을 훼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두렵다

영화 파묘 스틸 사진 ©배급: ㈜쇼박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더 두려움을 느끼는 법입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대상이 주는 공포가 그렇지 않은 쪽보다 즉각적이고 좀 더 와닿긴 하지만요. 그래서인지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누가복음 12:4,5)

오락영화를 논하는 와중에 근엄한 성경의 가르침을 끌어오는 것이 어색하거나 억지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게다가 이 구절이 <파묘>에 딱 들어맞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실체이자 육신에 위협을 가하는 존재보다,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인 존재를 두려워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참고로 할 수는 있겠지요. (물론, 이 구절에서 ‘권세 있는 그’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보이는 것에 연약한 인간의 본성을 대중영화의 작법으로 공략하려 했던 것일까요? 만약 ‘험한 것’이 끝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말썽을 일으켰다면, 그리하여 속 시원히 퇴치하기도 쉽지 않았다면, 관객의 공포감은 배가되지 않았을까요. 험한 것을 눈에 보이는 물리적 존재로 설정한 감독의 연출에 관객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합니다.

기독교를 향한 유쾌한 시선

최근 상업영화의 경향인 듯, 이 영화에서도 기독교는 희화화되는데요. 주인공 중 한 명인 장의사는 나름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보입니다. 동료에게 이름보다 ‘장로’로 불리고, 그의 가게에는 성경 구절이 큼지막한 액자로 걸려 있을 정도니까요. 그는 ‘돈’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을 뿐 아니라, 원만한 일 처리를 위해 뒷돈을 찔러주는 등 편법에도 능한, 그저 그런 사람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기독교를 향해 조롱을 보내는 건 아닙니다. 장로가 두려움을 이겨보고자 얼굴에 ‘주문’으로 보이는 한자를 잔뜩 새겨놓은 모습이나, 위기 상황에서 구약성경 전도서 4장 12절을 암송하는 장면, 지인들과 화투판을 벌이던 중 전화를 받자 ‘교우들과 성경공부 중’이라고 능청스럽게 응답하는 장면 등은 기독교를 향한 냉소라기보다는 관객의 입가에 미소를 띠게 만드는 유머러스한 영화적 기법으로 여겨집니다.

반복되는 역사, 두려움

노재원 목사

흔한 오컬트물과 달리, <파묘>는 역사를 소재로 삼습니다. ‘험한 것’이 왜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애당초 주인공들에게 일을 맡긴 가문은 왜 그렇게 부유한지 등에 대한 이유를 관객에게 이야기하죠. 이 영화에서 오락적 재미와 함께 곱씹어 볼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역사가 지금도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메시지 아닐까요. 그렇다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란 반복되는 역사와 그 역사를 추동하는 인간의 악함일 겁니다. ‘험한 것’을 야기한 가문이 바울의 가르침을 알았더라면, 눈에 보이는 부귀영화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치를 붙잡았다면, 다른 선택을 했겠지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8)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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