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십자가의 능력과 성화의 삶(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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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최더함 박사

그런데 이 혁명적 능력은 크게 두 방면의 사역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는 ‘복음 전도’ 라는 외적 사역입니다.

우리는 앉으나 서나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세상은 악하고 타락하여 복음을 듣는 것을 극히 싫어합니다. 악마는 세상에서 복음이 사라지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합니다. 이 방해 공작을 위해 제일 전면에 내세워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세상 언론들입니다. 언론들은 십자가의 능력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단지 세상에 일어나는 표면적인 사건에 관심을 두고 옳으니 그르니 하며 매일 일어나는 다툼과 논쟁과 싸움과 전쟁 이야기로 도배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공격하고 목사를 공격하고 기독교를 혐오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으로 매일 으르렁 거리는 그들이 오직 기독교를 공격하는 일에는 하나가 됩니다.

한 신문에 바다 위를 걸은 예수님에 대한 희화적인 대화편이 실렸습니다. 한 여성 기자가 묻고 종교전문기자라고 하는 이가 대답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질문 자체도 유치하지만 그 대답하는 수준 또한 신학적으로 매우 경계하는 자유주의 신학적 입장으로 보였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이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사람과 동물들이 어울리고 무제한적으로 동작과 이동이 가능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천국으로부터 이 땅에 오신 메시아임을 증빙하기 위해선 물 위를 걸어야 했으며 그렇게 주장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은근히 성경에 기록된 여러 기적과 이적들이 설정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치밀하게 각색한 이야기들임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의 아들’ 혹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호칭하면서도 예수를 오로지 사람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이면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차원에 계셨지만 우리와 같은 차원의 사람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연적인 차원에서만 서서 모든 현상을 이해하기에 초자연적인 차원에서의 일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이해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머리에 못을 박아 두었기에 도무지 그들의 이성적인 능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우주 만물과 인간의 기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일까요? 인간은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 줄 왜 모르는 것일까요?

이런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도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있다면 억지로 사람에게 어떤 일을 억지로 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억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억지로라도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때 사람의 반응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결코 즐거운 경험들이 아닙니다. 악한 본성이 나타내는 모든 것들을 감내해야 합니다. 수많은 저주와 비난과 욕지거리와 핍박과 조롱과 비아냥을 들어야 합니다. 이런 치욕을 무슨 수로 견딥니까? 사람이 가진 자연적인 능력으로는 도무지 감당키 어려운 일들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이 임할 때 모진 능욕과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가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화’라는 내적 사역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한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이 변화가 성화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 변화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고 수련하고 도를 닦으면 어느 정도 변화는 있을 수 있으나 근본적인 변화, 즉 죄인에게서 의인으로의 변화, 타락한 본성에서 거룩한 본성으로의 변화는 인간 스스로 획득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영역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자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됩니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사탄의 소속에서 하나님의 양자로 신분이 변하게 됩니다. 사망선고를 받은 죄인에서 영생을 얻은 의인으로 변화합니다.

강도가 십자가상에서 변화하였습니다. 살인자가 십자가의 능력을 덧입자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당당하게 사형장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린고비로 소문난 한 졸부가 갑자기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 이웃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발표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아침마다 학교를 가면서 눈에 보이는 교회당에 발길질을 하고 쓰레기를 투척하고 온갖 욕설을 하던 한 아이가 커서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를 두들겨 패던 청년이 하루아침에 돌변하고 주님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예수쟁이들을 극혐하며 체포하기를 즐겨하던 사울도 십자가의 능력에 의해 거꾸러지고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던 그가 이제는 십자가의 복음을 온몸과 마음으로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육신의 정욕을 멀리하고 위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전파의 사명을 잊지 않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달렸습니다. 그는 정말로 철저한 십자가의 능력을 덧입은 대표적인 그리스도인 중 한 사람으로 우리 앞에 불멸의 존재로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런 바울 사도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십자가의 능력을 온 몸에 지니고 새롭게 변화된 사람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러한 변화가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눈에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겉을 보시고 판단하시지 않으시고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바라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겉으로는 변화가 없어 보여도 이미 안에서 혁명적인 벼화가 시작된 사람입니다. 안에 거하던 모든 죄의 뿌리들이 점점 약해지면서 그 영향력과 힘이 성령의 내주에 의해 약해지고 있습니다. 죄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쁜 습관들과 기질들과 성격들과 취향들이 거룩한 것으로 바뀌어집니다. 이 내적인 거룩으로의 변화가 성화의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십자가의 능력은 외적으로는 전도의 능력이고 내적으로는 성화의 능력입니다. 이 두 가지 능력을 겸비할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입니다. 물론 복음전도에는 다양한 수단과 방법과 기술들과 특징들이 포함됩니다. 사람마다 생김새와 성격과 특질이 다르듯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도 매우 다양합니다. 대상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시기가 다르고 방식이 다릅니다. 또 내적으로도 성화의 사역도 개인차가 있습니다. 성화가 느린 사람도 있고 빠른 사람도 있습니다. 매우 변화가 어려운 부분을 가진 사람도 있고 쉽게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까탈스러운 기질의 소유자가 있고 순한 기질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인격적인 성숙을 추구하는 사람과 달리 믿음의 행함에 관심을 두고 거룩한 사명을 완수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너무나 다양하기에 한 마디로 이 두 사역을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아무리 열심을 다 한다 해도 십자가의 능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자기 십자가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십자가가 곧 복음이요, 새 생명이요, 구원의 일한 길이요, 십자가가 곧 기독교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참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렇다 하여 교회가 외적 표시로 십자가 탑을 세운다 하여 반드시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을 지닌 것이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불행히도 오늘날 많은 교회가 십자가 탑은 세웠지만 십자가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가 많습니다.

토저 목사는 이런 대목에서 “내가 믿는 기독교는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믿는 기독교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는 참된 기독교를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토저 목사의 눈에는 복음주의자들이 이끌어 가는 교회는 세상적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얄팍한 방법으로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엄격함을 완화시키려 합니다. 이들은 연예오락에 열광하는 젖먹이 성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심지어 성소에서조차 재미있게 즐기려는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십자가의 본질을 손질하여 십자가를 하나의 장식품으로 전락시켰습니다. (계속)

#최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