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오피니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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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논구 시리즈
김영한 박사

역사적 예수는 가난을 축복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했으나 부의 소유를 인정했고, 가난하고 소외자, 당시 사회적 약자인 여성 만이 아니라 아리마대 요셉이나 바리새인인 니고데모 같은 유지(有志)들을 동료로 삼았으며, 재물을 거룩한 위탁이라고 하셨다. 역사적 예수는 첫째, 재물은 지혜롭게 관리해야 하며 둘째,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혜택을 주어야 하며, 셋째, 지상의 곳간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저축해야 하며, 넷째, 재물 사용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을 가르치고 있다.

I. 가난을 축복이라고 하지 않음

예수 자신은 가난했으나 물질적인 가난 자체를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집도 없고 유리(遊離)하는 방랑 설교가(눅 9:58)로서 사회적으로 지위와 배경이 없는 랍비였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고 병을 치유하는 복음 전도자였다. 예수 자신은 가난하고 였다. 그러나 예수는 사회적으로 부유한 자와 권력층에 있는 자가 자기의 기득권을 버리고 그를 따르도록 하는,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이었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예수를 따르려고 한 서기관과 예수와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한 서기관이 예수께 나아와 말한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마 8:19). 이 서기관은 지금까지 예수를 따르던 제자 집단의 바깥에 서 있던 자로서 사회적으로는 존경받는 신분과 안정된 삶을 누리던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서기관이란 율법학자의 신분이었다. 예수는 이 서기관에게 이르신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예수는 이 서기관에게 자기를 따르려면 거처도 없고, 사회적 안전망도 없는 처지에 동참해야 할 것을 일러주신 것이다. 제자직(弟子職)이란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권력을 잡고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전혀 사회의 기득권이 없는 자였다. 그리고 예수는 세상적인 부나 권력을 추구하지도 아니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내면적 자유를 누렸고 사회적 어느 당파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아니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병정들이 제비뽑아 나눈 그의 옷 외에 아무것도 다른 사람들이 나눌 것이 없었다(마 27:35). 복음서 저자 요한은 보다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요 19:23). 당시에는 처형받은 사람이 몸에 입었던 것은 사형 집행을 담당하는 부대의 군병들이 나누어 가졌다. 그것은 로마 시대의 관례였다. 그러나 예수의 속옷은 찢어 나누지 않고 제비뽑기로 한 사람이 가지도록 하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그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었다는 것은 인간의 측면에서 볼 때는 예수가 당한 가장 비참한 치욕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묻힐 무덤이 없어서 가족 무덤이 아닌 다른 사람의 무덤에 장사되었던 것이다(마 27:60).

II. 부(富)의 소유를 시인(是認)

예수는 무소유자였으나 부(富)한 자를 적대시 하지 않았다. 그의 친구 가운데는 부자들도 있었다. 예수를 지지한 사람 중에는 부자 아리마데 요셉(마 27:57), 가버나움의 백부장(눅 7:2). 베다니 가정(눅 10:38), 자기 소유로 예수를 섬긴 여인들(눅 8:3) 등이 있었다. 예수께서 부자와 나사로 비유로써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은 부자를 증오하고 가난한 자를 두둔하라는 것이 아니다. 부자는 재산이 많기 때문에 음부에 간 것이 아니고, 거지 나사로는 소유가 적기 때문에 낙원에 간 것이 아니다. 내세에서 이들의 처지가 달라진 것은 이 세상에서 부자(富者)는 열락의 생활만을 했으나, 나사로는 믿음의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눅 16:19-22). 나사로가 죽어서 그 품에 안긴 구약(舊約)의 아브라함은 그 시대에서 부유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눅 18:22)고 말씀하신 것은 천국은 무소유자가 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자 청년은 소유가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눅 18:23). 그가 가진 재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하신 것이다. 부자 청년은 그가 가진 재물의 욕심에 얽매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국가내는 세금과 성전에 내는 성전세 납부를 부정하지 아니하셨다. 예수는 가진 것이 없어서 중대한 가르침을 베풀려고 할 때에는 남의 돈 한 푼을 빌렸다. 예수는 황제에게 세금을 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는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하신다. 이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 온다”(마 22:19). 예수는 이 화폐의 형상과 글이 가이사의 것임을 보이신다. 그리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대답하신다. 국가에 대하여는 세금을 내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성전세와 십일조를 내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III. 부(富)는 거룩한 위탁

1. 재물은 지혜롭게 관리해야

예수는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귀인(貴人)이 맡긴 돈에 대한 비유로써 재물 선용(善用)을 가르치신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눅 19:12-13). 돌아온 귀인은 자기가 위탁한 돈에 대하여 종들이 이윤을 남긴 것을 기뻐한다. 그런데 한 므나(100은전) 받은 자는 이윤을 남기지 않고 수건에 싼 그대로 귀인에게 가져온다. 한 므나 받은 자는 그 이유를 다음 같이 말한다: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눅 19:21). 이에 귀인은 진노하며 꾸짖는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거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利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눅 19:22-23). 모든 종들은 자기의 능력에 맞는 금액의 밑천을 위탁받았다. 각 사람은 그것을 운용하여 자기 재능에 알맞는 이윤을 얻어야 한다. 주인의 칭찬을 받은 종들은 자기들의 재능을 발휘한 자들이다. 그런데 주인의 질책을 받은 종은 전혀 재능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는 돈을 운용(運用)하면서 예측되는 위험을 회피하였다. 그래서 그는 주인의 진노를 받은 것이다. 예수는 여기서 재물에 대한 지혜로운 관리, 오늘날의 용어로는, 건강한 자본주의를 가르치고 계신다.

2.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혜택

재물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혜택이 가도록 사용되어야 한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어릴 때부터 계명을 잘 지켰다는 부자 청년을 가르치시는 예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이에 청년은 근심하여 물러간다: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 예수는 이를 보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 여기서 부자란 재물이 단지 많은 자를 말하지는 않는다. 재물이 많은 청부(淸富)도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욥, 아리마대 요셉 등은 청부(淸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재물욕으로 가득 찬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재물은 개인적인 욕심과 자만(自慢)과 호사(豪奢)스러운 소비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이웃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필요한 자들에 대한 구제와 나눔이 필요하다. 이 지상에서 이들과 나눌 수 있을 때 진정하게 하늘나라의 곳간에 저축하는 것이 된다.

3. 하늘 나라에 저축

에수는 탐욕(貪慾)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에 부(富)를 저축하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는 부유한 농부의 비유(눅 12:16-21)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신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富饒)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6-21).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서 재물 많은 부자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그리고 자기 이웃의 궁핍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자기 만족과 오만(傲慢)에 빠진 것을 지적하고 계신다. 이러한 부의 축적을 통한 오만한 자기 만족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된다.

예수는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눅 12:15)고 가르치신다. 인간 삶의 의미란 재물과 권력의 풍부에 있지 않고 가난한 이웃들을 향해 구제하고 나누는 마음의 넉넉한 데 있다. 재물의 나눔은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절제하며, 가난한 이웃에게는 부요(富饒)한 태도에서 이루어진다. 지상의 소유란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 곳간을 넓히고 스스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는 것에 끝나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재물을 주심을 감사드린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 예물을 드리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 대한 배려와 나눔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하여 재물을 자기 곳간에 쌓지 말고 소외되고 궁핍한 자들과 나누어 사용함으로 부(富)를 하늘나라 창고에 저축하라고 가르치신다.

4. 재물 사용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

종말론적 심판에서 예수는 사회적으로 소외(疏外)된 자에 대해 돌보지 않음에 대하여 책임을 추궁하신다. 인자는 종말론적 심판의 날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돌보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책망하신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使者)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 25:41-43). 이들은 인자에게 다음같이 반문한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마 25:44).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예수는 여기서 인자를 종말론적 왕(임금)과 동일시하고 계신다. 종말론적인 왕은 메시아적 왕권을 지닌 자를 말한다. 심판자인 왕은 자신을 세상적으로 소외되고, 병들고 헐벗고, 굶주린 자와 동일시 하신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마음이 가난하고 청결한 자들의 소유라고 가르치신다. 재물을 많이 가졌다고 하드라도 사회를 향하여 빚을 졌다고 생각하면서 그 재물을 사회로 환원하면서 가난하고 궁핍한 이웃과 나누며, 사회의 그늘진 계층들을 향하여 사용하는 자는 청부(淸富)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경주의 최(崔)부자, 오늘날 미국의 마이크로 소프트사 창시자 빌 게이츠(Bill Gates)와 그의 부인, “투자의 귀재”라고 불리우는 워런 버핏(Warren Buffett) 등은 이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경주의 최부자는 자기가 사는 1킬로 내의 모든 사람들이 춘궁기를 버틸 수 있도록 대문 앞에 공익(公益) 쌀전을 마련하고 굶주린 자들이 적당량 쌀을 자유롭게 퍼가도록 항상 쌀을 비치해두었다. 게이츠 부부는 그가 만든 자선 재단을 통해 아프리카의 에이즈 퇴치와 아동 교육분야를 위한 자선 사업에 매해 기부하고 있다. 버핏은 극빈층을 위한 의료보험 프로그램 설정을 위해 기부하고 있으며 그리고 “재산의 85%, 374억달러(약 36조원)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공언하였다. 이들은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사회에서 상속제 폐지를 반대하면서 자기들의 부(富)를 사회적으로 환원하면서 “사회적 자본주의”(social capitalism)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적으로 칭찬을 받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그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재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오늘날 실천하는 깨끗한 부자(淸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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