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민주화 없이는 통일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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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통일
노형구 기자
hgroh@cdaily.co.kr
염돈재 전 국정원 차장, 최근 트루스포럼서 강연
염돈재 전 국정원 차장 ©트루스포럼 영상 캡쳐

염돈재 전 국정원 차장이 최근 제71회 트루스포럼 강연에서 ‘잘못 알려진 독일통일 그리고 한반도 통일의 시사점’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염 전 차장은 “1988년 당시 동독의 1인당 GDP는 9,700달러로 남한보다 높았다. 세계 11대 공업국, 공산권 최고 선진 복지국가로 뽑혔고 정권은 매우 안정적이었다”며 “하지만 동독은 여행자유화 제약 및 비밀경찰의 감시통치가 이행됐다. 주민 62명 당 정보요원 1명이 철저한 감시통치를 이행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서독 사람들은 통일의식이 매우 미약해 사실상 통일 노력을 포기하기도 했다. 1988년도 당시 전 국민 가운데 3%만이 통일 가능성을 믿었다”고 했다.

또 “서베를린에는 연합군 12,500명이 주둔하면서 점령통치를 했고 동독은 소련 군사요원 54만 명이 주둔하면서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기도 했다”며 “이처럼 독일통일은 매우 요원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염 전 차장은 “그럼에도 동서독 통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라며 “첫째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다. 1989년 5월 헝가리가 국경을 개방하면서 동독 사람 2천명이 탈출했다. 또 그해 10월 고르바초프 당시 러시아 서기장은 군사 개입을 하지 않고, 동독의 시위대에 대한 유혈진압을 반대하면서 동독 개혁을 촉구하기도 했다”고 했다.

이어 “당시 계속 진행돼온 성 니콜라이 기도회가 동독 전국으로 확산됐고, 18년 동안 재임했던 동독 서기장 호네커는 사임했다”며 “이후 1989년 11월 동독 공보담당관이 여행규제 완화정책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국경 완전개방을 말하면서, 4달 동안 동독 사람 34만 명이 탈출했다. 결국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후 동독 공산정권은 자유선거를 이행했고 동독 주민들은 서독 편입을 지지하는 독일연맹을 택하면서 다음해인 1990년 4월 12일, 동독 민주정부가 탄생했다. 그리고 그해 7월 1일 화폐·경제·사회 통합 조약이 발표된 후 8월 30일 통일조약 체결, 10월 2일 동독 인민의회의 해산 선언에 따라 10월 3일 최종적으로 동서독 통일이 달성됐다”고 했다.

염 전 차장은 “독일은 통일을 위한 청사진은 따로 마련하지 않았으나 통일의 기회가 닥쳐오자 통일 방해 요소를 실질적으로 제거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서독은 2차 대전 패전 직후인 1952년도 당시 제정된 독일조약에 따라 통일 시 2차 대전 전승국 4개 국가의 동의가 필요했다”며 “먼저 서독은 통일 이후 나토에 잔류할 것을 약속하며 미국의 통일 지원을 확보했다”고 했다.

아울러 “독일은 오데르 나이세 국경을 인정하고, 경제지원 등을 약조하면서 러시아의 지원을 이끌어냈다”며 “하지만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과 영국 대처 총리는 독일통일을 끝까지 방해했다. 때문에 서독 콜 수상은 통일외교를 펼치면서 미국의 영국에 대한 설득 작업을 이끌어냈다”고 했다.

특히 “독일통일의 직접적 요인은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른 개입의 최소화 때문”이라며 “1988년 5월과 9월, 인접 국가인 폴란드,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의 탈 공산화 혁명이 성공했고, 당시 동독 경제의 파탄으로 인해 동독 주민들의 탈출 러시가 잇따랐다”고 했다.

염 전 차장은 “서독은 꾸준히 동독 주민으로 하여금 서독을 동경하도록 작업을 진행했고, 동서독 교류 과정에서 동독 지역의 서독 편입도 허가하는 법도 과감히 유지했다”며 “동독에 대한 지원도 대가 없이 불가하다는 원칙도 고수했다. 동독 주민에 대한 인권유린도 적극 규탄했고, 동시에 동독 주민의 서독 미디어 시청도 가능하도록 했다. 동서독 통일 이후 동독 비밀경찰 수장은 이를 최대의 실책이라고 했는데, 반대로 독일 통일의 간접적 요인 가운데 하나인 것”이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염 전 차장은 70년대 서독 사민당 출신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을 독일 통일의 원동력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소 무리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김대중 정권은 동방정책을 모델로 삼아 햇볕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은 동독·소련 등 공산권 국가와 화해 협력하면서 동독 정권의 안정화를 꾀하면, 공산정권이 언젠가는 태도를 전향해 결국 통일을 이뤄낸다는 내용”이라며 “하지만 독일 통일은 서독의 동방정책으로 동독 공산정권이 변해서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동독 주민들의 시위로 인해 동독 공산정권이 붕괴해서 가능해진 것”이라고 했다.

결국 “동서독 간 교류협력은 공산정권을 변화시키는데 매우 제한적”이라며 “사민당의 주장대로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독 탈출자의 수용을 제한하고, 동독정권에 대한 경제지원을 했다면 독일통일은 애시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서독 보수 정당인 기민당은 정치 경제 군사 분야에서 동독에 대한 우위를 점하면 동독이 자석처럼 서독에 이끌려 통일이 된다는 ‘자석이론’을 추구했다”며 “때문에 기민당은 철저히 친미 친서방 정책을 펼쳤고 동독에 대한 경제 지원도 3원칙인 ▲동독이 먼저 지원을 요구할 때 ▲지원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야 한다 ▲동독 주민들이 서독의 지원 사실을 알아야 한다를 견지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이 북한에 대한 남한의 지원이 위 3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위배된다면 오히려 통일은 늦춰질 것”이라고 했다.

특히 “독일통일 과정에선 미국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사민당 출신 브란트 수상에 이어 기민당 출신 콜 수상은 친미 친서방 정책을 유지했고 미국의 요구 조건은 철저히 수락했다. 그 결과 통일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소련과 영국에 대한 설득도 미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아울러 “독일은 통일 이후 점진적 통일을 남한에 권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동독의 탈출자가 급증하고 동독정권 붕괴가 임박한 상황에서 서독은 적극 동독을 흡수하는 방향으로 통일 정책을 펼쳤다”며 “연방제 등 대등한 통일이론은 사실상 비현실적이다. 왜냐면 예멘도 남과 북이 대등한 힘의 균형을 유지한 탓에 결국 통일 이후 94년도에 재분단이 됐다”고 했다.

염 전 차장은 “통일 이후 시장경제를 견지할 경우 남한 주도의 흡수통일은 불가피하다”며 “이처럼 서독은 동독에 대한 경제지원도 ‘공짜 ’는 없었다. 서독이 동독에 지원한 차관 약 19억 5천만 달러도 보증금 수수료 등 이자를 합산해 동독에게서 철저히 받아냈다. 서독의 동독에 대한 교류 지원도 민간인과 교회 지출이 대부분(77%)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 이후 재정적자, 성장둔화, 실업증가를 격는 등 유럽의 병자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슈뢰더 총리는 2003년 강성노조 혁파 등 노동·연금 개혁을 골자로 한 ‘어젠더 2010년’ 정책을 발표하면서 결국 2006년도엔 경제회복을 이뤄냈다”고 했다.

또한 “실질적인 통일비용 조달은 재정차입 70%, 증세 12%로 중산층 가정이 부담하는 통일비용은 총소득의 2%, 곧 월 6만원에 불과했다”며 “동독의 2등 국민 의식도 심리적인 문제일 뿐, 앙겔라 메르켈 전 수상 등도 동독 출신의 지도자들”이라고 했다.

그는 “한반도 통일은 대박이다. 통일 이후 대륙을 경유해 유럽으로 가는 통로가 확보될 것이며, 통일 한국은 현재 남한 경제 규모의 약 2.5배로 성장할 것”이라며 “영국 프랑스 등을 능가하는 슈퍼파워국가로 등극할 것”이라고 했다.

염 전 차장은 “통일 비용 부담은 약 20년 정도 감수하면 되지만, 통일의 혜택은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대한민국 국민 개인이 부담하는 통일 비용도 독일통일 당시 서독 국민에 비해 훨씬 적다”며 “동서독 통일 당시 서독 국민 4명이 동독 국민 1명을 먹여살려야 했으나 대한민국 상황은 남한 국민 2명이 북한 주민 1명을 책임지면 된다”고 했다.

특히 “북한 지하자원만 9,000조원에 이른다”며 “그러나 지원을 통해 북한 경제 활성화를 유도하자는 주장은 자칫 지원 비용이 북한 핵무기 개발에 투입될 수 있고, 북한 정권의 발전은 통일이 아닌 김씨 왕조의 존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식량 등 인도주의적 지원도 필요하나 주민들에게 제대로 배급되는지를 감시해야 한다”며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꾸준히 유지해온 ▲화해협력 단계 ▲남북연합 단계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구성의 3단계를 골자로 한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은 문제점이 있다”고 했다.

그는 “김정은 정권이 화해 협력의 대상인가. 가치가 다른데 국가연합은 과연 가능할까. 김일성 세습체제가 통일에 동의할까”라며 “이러한 잘못된 대한민국의 통일교육의 틀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일각에선 경제파탄과 대량 탈북, 집권층의 분열에 따른 민중혁명 등 북한의 무정부 사태로 인한 급변 상황에서의 통일을 기대하기도 하지만, 북한 주민의 자유의사만이 통일의 기폭제”라며 “즉 김일성 세습왕조의 붕괴와 함께 북한 주민의 민주화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염 전 처장은 “서독은 동독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72년도 동서독 기본조약에 인권조항을 삽입했고, 동독 주민의 서독에 대한 왕래와 이주를 확대했으며, 국경을 탈출하는 동독 주민에 대한 사살과 박해를 완화하는데 노력했다”고 했다.

또 “72년 서독 헌법재판소는 ▲동서독 주민의 통신정보교환 제한 조치 불가 ▲동독의 방송금지 청취금지 조치 동의 불가 ▲ 서독 내 동독반대 단체 결성 금지 불가 ▲동독의 인권탄압 인정 불가 ▲자유왕래 방해조치는 기본조약 정신에 배치를 판시했다”며 “이처럼 북한의 민주화 없이는 통일은 불가능하다. 북한 주민은 지원대상이나 김정은 정권은 타도 대상이며, 관용 정책만으로 북한 정권은 변화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는 “대한민국 통일을 위해선 ▲대한민국을 북한 주민의 동경대상으로 건설 ▲굳건한 안보와 힘의 우위가 평화와 통일의 기초 ▲북한정권의 실체와 의도를 정확히 인식 ▲대북 경제지원은 전략적 고려하에 추진 ▲북한 주민에 실질적인 이익이 돌아가도록 인도적 지원과 북한 인권 개선 노력도 지속 ▲경제적 기초를 탄탄히 하고 재정 건정성을 구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트루스포럼 #독일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