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에 대한 워필드의 ‘기독교 초자연주의’ 변증(5)

오피니언·칼럼
기고
1896년 프린스턴 개강설교를 중심으로
최더함 박사

셋째,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 본문을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방법으로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면서 정통교리를 무시하고 말살했다. 그들은 주관적인 경험을 하지 못하고 단지 지식만 있는 신앙을 무차별 공격했다. 이 영향으로 신학을 경시하는 풍조가 나타났고 교리 무용론(無用論)이 득세했다. 그들은 기존 교회가 교리에 붙들려 죽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통이 화석화(化石化)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방식으로 취득하는 지식이 문제이며, 교리가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만든 비성경적인 교리가 문제임을 간과했다. 그들은 성경을 절대적인 최종 권위로 두지 않는다. 성경은 단지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좋은 교과서요 윤리적인 지침이요 참고서이며 그리스도는 구속주가 아니라 훌륭한 윤리교사이며 최고의 신 의식을 지닌 인간일 뿐이라고 한다. 그들은 성경에 있는 비과학적인 이야기들은 실제로 믿지 않는다. 단지 신앙을 위한 좋은 참고자료라고 여긴다.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따위는 실제 역사가 아니라 믿음의 역사적 사건이라 치부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성경에 일점일획이라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경고했다. 성경은 무오(Inerrancy)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넷째,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공의(公義, righteousness)를 삭제하고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했다. 진노의 하나님을 삭제하고 미소 짓는 하나님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우렛소리와 함께 심판을 단행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면 기겁한다. 하나님은 매우 인자하시고 나와 늘 즐겨 대화하시며, 나의 짓궂은 장난과 개구쟁이 같은 행동에도 머리를 긁적이며 다 받아주시며 나와 농담도 자주 하시며 내가 언제든지 달려가면 만나주시고, 나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하면 들어주시는 친근하고 재미있는 분으로 각색했다. 여기에 하나님의 내재성(內在性) 즉,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므로 나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것이다. 내재주의(Internalism)로 인해 묵상기도, 관상기도 등이 나타났고 영성훈련을 한다고 법석을 떨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으로 인해 악을 미워하시고 무섭게 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사라졌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자기 백성을 지옥에 보낼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여기서 지옥이 부정되고 ‘영혼 멸절설(Annihilationism)’이 재등장했다. 자유주의 교회에서 회개를 요청하는 설교는 사라졌다. 그들은 신자가 잘못해도 권징(勸懲)을 하지 않는다. 용서가 최고의 미덕이 되었다. 그러나 공의 없는 사랑, 사랑 없는 공의는 절름발이일 뿐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악을 미워하고 우상숭배를 엄하게 금하시고 다른 신에 대해 질투하시고 백성들의 죄악을 친히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신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징계의 채찍질을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징계하지 않는 자마다 사생아에 불과하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 8, 벧전 5:9, 계 3:19)

다섯째, 자유주의 신학은 낙관적인 인간론(낙관주의, Optimism)을 펼침으로 기복신앙(祈福信仰, faith for blessing)을 낳았다. 그들은 예수만 잘 믿으면 부자 되고 성공한다는 말을 계속 강조하고 반복했다. 낙관론은 아담으로부터 형성된 원죄를 부정하면서 나타난 사상이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선한 존재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얼마든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적극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행, 불행은 인간의 책임이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예정(predestination)에 달려 있지 않다고 했다. 칼빈이 주창한 예정론 교리는 그런 의미가 아님에도 그들은 예정론을 한 번 정해진 운명론(fatalism), 또는 결정론(determinism)으로 몰고 갔다. 잘못된 예정론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의지로 개척하고 극복하지 않고 주어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불행을 향해 달린다고 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을 불행으로 이끄는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했다. 당연히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 복은 창세 전에 택함을 받은 주의 백성에게 허락되는 은혜임을 그들은 증거하지 않는다. 나아가 그들은 주님께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설교 중에 회개하라는 말을 금지어로 만들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정리하자면 자유주의는 정의상 기독교 신학이 외적 권위에 기초하지 않고도 스스로 기독교적일 수 있다는 발상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후 인간들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존중하시기에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간사에 개입하거나 결정을 자기 주권적이며 일방적으로 처리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한 번 위임하신 이상 중간에 자꾸 이래라저래라 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사랑하시는 주님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유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또 다른 이름의 기독교이다. 성경은 ‘다른 세계로부터 온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겁 많은 인간들을 신앙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안주시키기 위해 인간들의 상상력과 전설과 신화들을 각색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라 폄하했다. 오직 인간의 이성이 인정하는 자연적인 요소들만으로도 충분히 기독교가 유지된다고 했다. 이른바 기독교의 모든 초자연주의적 요소를 배격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그들은 기독교의 도덕적인 모범, 즉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 인류의 행복을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높이 찬양한다. 다만 그들은 전통적인 기독교가 믿는 바들을 모두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좋아하고 믿고 싶어 하는 것들만 추려내어 새로운 기독교를 만든 것이다. 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것은 새로운 종교 교과서라 불릴만하다. 정통 역사적인 기독교에 대한 이들의 새로운 접근과 해석은 기독교의 윤리화와 자연신학화라는 결과물을 낳았고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비판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리츨 신학은 존재론에서 윤리로의 물러남”이라고 평가 절하했고, 신정통주의의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마저 자유주의 신학의 탈신화화(脫神話化, Demythification))에 대해 “내가 탈신화화와 관련한 움직임에 썰렁한 태도를 보인 것은 내가 보기에 그 탈신화가 너무나 유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며 조롱했다. (계속)

최더함(Th. D, 역사신학, 바로선개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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