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생명·가정: 기독교가 지켜야할 핵심가치

오피니언·칼럼
기고
류현모 교수

미국 작가인 윌리엄 린드는 “미국에서 서양의 전통적 유대-기독교 문화가 무너지고 있다. 이 문화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사회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그것을 버리고 있기 때문에 무너지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의 뿌리는 무엇이며 그 주도세력은 도대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서구사회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치, 윤리, 그리고 기준을 버리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대학, 미디어, 연예사업의 엘리트들 중 문화적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들은 문화적 상대주의, 세속주의, 성적인 자유를 밀어붙이는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신-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근원은 1930년대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그람시와 헝가리의 죄르지 루카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1차 세계대전동안 마르크스 이론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하자 큰 실망에 빠졌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19세기 중반에 ‘공산당 선언’을 통해 전 유럽에 널리 전파되었고, 그 이론이 1917년 러시아에서는 공산혁명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각국의 프롤레타리아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1차 세계대전 동안 자기 나라에서 공산혁명을 일으키기 보다는 조국을 위해 싸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람시와 루카치는 세상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성, 결혼, 가정의 가치를 지키는 기독교 문화에 빠져 있을 때에는 결코 혁명을 위한 봉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이 부르주아들의 문화주도권 (cultural hegemony)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대의를 위해서는 기독교 문화를 파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선택한 표적은 성(性)이었다.

성은 옛날부터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이며 죄악에 빠지기 쉬운 부분이다. 기독교의 성은 결혼의 제도를 통해 맺어진 남편과 아내 사이에만 있어야 하는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로 설정한다. 이런 기독교의 성윤리는 성관계에 호기심을 가진 청소년들에게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부분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 성문화에 대한 도전은 신-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프랑스의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이 주도한 68혁명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선전문에서 보이듯 ‘금지함을 금지하라’, ‘구속없는 삶을 즐겨라’, ‘혁명을 생각할 때 섹스가 떠오른다’ 등 기존 정치와 도덕 관습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이었다. 이 운동은 너무나 극단으로 흘러 즉시 진압되었고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쟁 반전운동, 히피문화가 혼합된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모인 젊은이들을 통해 성윤리의 파괴가 급격히 전파되었다. 그 결과는 낙태, 이혼율, 편부모 가정, 미혼모와 혼외자의 증가로 나타났다. 결국 성적인 타락은 생명의 파괴인 낙태, 가정의 파괴인 이혼, 그리고 그 파괴된 가정의 자녀들은 성적방황과 정체성상실로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가정은 교회와 국가를 형성하는 사회의 기본단위다. 그러므로 성적인 타락은 반드시 가정과 교회와 국가의 파괴로 연결된다. 세계 공산화를 노리는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부르주아의 문화주도권을 파괴해야 공산당이 지도하는 공산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우리나라 현 정권이 추진하는 입법의 내용들을 보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판결에 따르는 관련법 제정’, 동거하는 커플에게도 부부로서의 권리를 인정하라는 ‘생활동반자법 입안 시도’, ‘동성혼 합법화 입안 시도’ 등 그람시가 말한 문화주도권 장악을 위해 전력질주하고 있다.

현재 국회에서 입안이 시도되고 있는 “차별금지법”은 기존의 규범을 지키려는 주류문화의 모든 발언에 재갈을 물리고, 모든 행위에 족쇄를 채우기 위한 것이다. 이 법이 통과되면 동성애 뿐 아니라 다른 도착적 행위를 추구하는 소수자의 잘못을 지적할 수 없다. 학교에서는 이런 성적취향에 대해 정상적인 것으로 교육해야 한다. 이들이 차별 당했다고 느끼고 고소하면 고소당한 사람은 자신이 차별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을 경우 형사상, 민사상 책임을 져야하고, 징벌적손해배상의 무거운 벌금을 물어야 한다. 소수가 다수의 성윤리를 마음대로 제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 런던 빈민가에서 의사로 봉사하는 작가 데오도르 달림플은 주장한다. “혼인과 사회적 의무에서 해방된 성관계가 어떤 것인지 보고 싶다면 사회 최하층민의 삶의 혼돈을 보라. 거기에는 복부타격으로 이루어지는 낙태가 있다. 피임이나 성교육을 받기도 전에 아기들을 벌써 낳아버린 아이가 있다. 해산을 전후해 아기의 아버지로부터 버려지는 여자들이 있다. 보편적 성의 자유라는 동전의 뒷면엔 비정한 질투심이 있다. 이혼과 재혼에 의해 생긴 양부모의 지위가 아이들에 대한 대규모의 성적∙육체적 학대로 이어진다. 성에 있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이 흐려진다.” 달림플은 이에 덧붙인다. “이런 현상은 지도층으로부터 흘러내려온 이념들에서 기원하기에 분명히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 이들 포스트모던 지도층들이 행하는 것은 그들의 이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념의 순수함이 그것이 초래할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정말 이기적인 것이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이념의 결과를 생각하지도 않고 책임지지도 않는 집단의 겉만 번지르르한 차별금지법에 대해 우리의 명확한 의견을 드러낼 때이다.

묵상: 차별금지법이 표방하는 이념의 겉모습과 그로인한 파괴적인 결과를 생각해 보자.

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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