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수 목사 “北 감옥에서의 949일, 자유의 소중함 깨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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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북한선교대회 영락포럼’서 특강
임현수 목사가 북한선교대회 영락포럼에서 간증하고 있다. ©영락교회 영상 캡쳐

임현수 목사가 7일 영락교회(담임 김운성 목사)가 주최한 ‘2020 북한선교대회 영락포럼 특강’에서 자신의 북한선교 경험담을 나누었다.

임 목사는 “어머님이 중학교 때 해주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고, 이북 출신이셨다”며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북한에 관심이 있었다. CCC에 있던 시절 북한선교헌신의밤이 있었다. 1972년도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 북한을 위해 기도하기로 함경남도 함흥을 두고 기도했다”고 했다.

이어 “북한선교를 목적으로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며 “1995년에 북한에서 연락이 왔다. 그 당시 큰 홍수가 있었고, 도움 요청으로 북한을 위해 기도한지 26년 만에 응답과 같이 90년대 중반부터 북한으로 가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북한에 처음으로 가서 보았던 모습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며 “평안북도 구장군(탄광지대)에 가게 되었고, 탁아소, 육아원, 학교 등 집집마다 방문을 했는데 너무 비참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직접 보게 됐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그 당시 먹을게 없어서 풀죽으로 연명을 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 “나의 동족인데 무관심할 수 없었다”며 “이후 150번(20년)을 북한으로 가게 됐다. 생존권이 항상 소유권보다 우선이다. 예수님께서도 원수라도 생존의 문제는 도우라고 하셨다. 북한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쌀은 당원들이 다 먹기 때문에 강냉이와 라면을 지원했다. 에피소드가 있다면 라면 두 개로 남한을 저주하던 북한군인이 남한을 동경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고 했다.

임 목사는 “고아들이 제일 불쌍했다”며 “2013년쯤엔 모든 고아원에 고아들이 2,500~3,000명이 있었다. 황주, 사리원, 해주, 원산, 청진, 함흥, 종성까지 10,350명을 교회가 입양해서 먹이고 입히는 사역을 했다. 북한은 17살이 되면 군대를 간다. 성인이 되어 자신을 누가 도와줬는지를 다 알게 된다”고 했다.

이어 “북한의 가장 시급했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농촌을 지원했다”며 “척박한 땅이라 쌀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예상했던 양은 1톤었다. 그런데 5톤이나 수확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후 땅 살리는 운동과 자연농업을 가르쳤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미래를 보고 평양 낙낭이라는 구역에 ‘평양영어교원강습소’를 만들었다. 전국에 있는 영어선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며 “틈새 전략으로 말씀을 전했다. 10년간 2,000명을 가르칠 수 있었다. 북한에는 학원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요청대로 선생들을 가르쳤다. 제일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했다.

또 “비즈니스 선교를 함경도를 중심으로 시작했다. 주유소를 하나 세우게 되면 영주권이 나와서 해외합작투자라 왕래가 가능했다”며 “이 가운데 우리의 목표가 굶어 죽는 사람 100만 명을 살리는 것이었고, 그 당시 살렸다고 자부한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이시다”며 “마음을 먹고 지원선교를 시작해 보니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로부터 지원을 받는 등 날마다 기적을 체험했다”고 고백했다.

임 목사는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북한에서 김일성에 대적하는 것에서는 용서가 없다”며 “이를 북한에서는 ‘최고존엄 모독 죄’라고 한다. 미국 택사스 댈러스에서 40개 단체가 모인 곳에서 설교를 했다. 북한의 실상에 관한 설교를 했고, 어떤 분이 인터넷에 설교영상을 올린 것이 북한 해커들에 의해 걸렸고, 적공군(적군와해공작군)이라는 북한 직속부대 귀에 들어가게 됐다. 이 사실을 모른 채 북한을 방문했다가 잡혀 취조를 받았다”고 했다.

이어 “북한 재판에서 첫째 최고존엄 모독 죄, 둘째 많은 사업이 수령과 인민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해서 ‘특대형 국가전복음모 죄’, 셋째 탈북자를 많이 도왔다며 ‘탈북반동들을 도운 죄’, 넷째 ‘유엔 북한대사 전도 죄’ 등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로마시민권이 바울을 살린 것처럼 내가 캐나다 시민이었기 때문에 종신형으로 바뀌면서 북한감옥생활을 2년 7개월간 하게 됐다”며 “만약에 한국인이었다면 사형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온 많은 목회자들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돌아가셨다”고 덧붙였다.

그는 “949일을 억류된 채 보내면서 자유가 없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며 “(감옥생활을) 겪고 보니 지금의 자유의 소중함에 감사하다. 그래서 매일 3천보 이상을 걷는다. 우리나라 헌법에 ‘자유민주’라는 말이 나오는데 ‘자유’라는 말이 절대 빠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감옥에서 억울한 마음에 기도를 했다”며 “예수님의 고난 받는 모습이 떠오르면서 내가 받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를 억눌렀던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리고 꿈을 꿨는데 예수님의 손 안에 금두꺼비 같은 나의 모습을 보았다. (이 과정이) 정금같이 나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어 “3년 가까이 있었던 북한감옥생활은 나에게 있어서 완벽한 수도원과 같았다”며 “가장 성령 충만해서 말씀을 많이 묵상하며 예배 드렸던 곳이 감옥이었다. 요즘 교회들이 의식화, 형식화 되는 것은 타락 현상이며, 하나님과 뜨거운 교제가 많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힘든 상황에서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며 “저를 좋지 않게 보던 많은 이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되면서 놀라운 원리를 발견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다(히4:12)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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