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알려준 ‘체휼’(體恤, συμπαθε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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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욱 교수

[1] 지난 5월 18일, 카톡의 문자로 비보가 하나 전달됐다. 시카고 한인목회자 협의회 부회장이자 진리등대한인침례교회의 담임으로 사역 중이던 지인 목사님 한 분이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요양 중 끝내 숨을 거두셨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직장에 다니던 사모님이 확진되어 목사님과 아들에게 옮겼는데, 두 사람은 음성판정을 받았지만 목사님은 양성판정을 받아 병원에서 호흡곤란으로 고초를 겪으시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것이다.

[2] 홀로 남은 유족들과 성도들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는가? 무엇보다 사모님의 자책감이 크다고 한다. 자기 때문에 남편이 코로나에 희생되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방학 때마다 가서 교제하며 지내던 분이신지라 실감이 나질 않았다. 목사님의 소식에 비통해하던 내게 또 다른 슬픈 소식이 날라들었다. 세네갈에서 선교하던 친구 선교사님에게서 온 소식이었다. 충격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3] “지난 주 월요일부터 발열증상이 시작되더니 갈수록 고열로 고통이 커서 어제 코로나 검사를 했습니다. 이미 폐 쪽이 좀 불편해서 코나로 바이러스 병동에 입원을 해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 결과가 나오는데 코로나가 아니길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루 밤을 보냈는데 현지 병원생활이 너무 힘이 듭니다. 밤 2시 반까지 병원직원들이 큰 소리로 대화를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네요. 환자들이 잠을 자야 하는데…

[4] 열을 해열제로 잡는 것보다 자연적으로 잡아야 한다며 계속 놔두다 보니 결국 고열이 설사를 동반했습니다. 화장실 변기 뚜껑에 변들이 묻어있고 물도 나오지 않아 엉거주춤 서서 볼일을 보다가 갑자기 식은땀이 나고 어질어질해져서 간신히 뒤처리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몸이 앞으로 쑥 빨려나가는 것 같더니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쳐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깨어보니 복도바닥에 누워있더군요.

[5] 온 몸에 식은땀이 흘렀고요, 왼손 정맥에 연결된 주사제를 넣은 플라스틱 관이 바닥에 부딪치면서 피가 바닥에 뿜어져 나오고… 전화를 해도 직원이 오지도 않고… 한 20분을 차가운 바닥에서 누워 있다 힘들게 일어나 병실로 돌아오는데, 미치도록 고국이 그리워지더군요. 코로나 네거티브(음성)가 나오기를 꼭 기도해주세요.”

[6] 이틀 전 지인 목사님을 코로나 바이러스로 떠나보낸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문자의 내용으로 보나 좋지 않은 세네갈의 병원시설로 판단해보나, 왠지 모르게 이번에도 친구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나약한 마음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문자의 내용으로 봤을 때 틀림없이 양성반응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양성판정을 받고 말았다.

[7]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기도는 계속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9일 만에 낭보가 전해졌다. 두 번의 양성판정 끝에 두 번의 음성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날아갈 듯 기뻐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마치 죽음에서 살아나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고맙고 감사했다. 한 가정의 슬픔을 경험한 뒤 또 다른 가정의 슬픔까지 맛보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8] 코로나19와 싸워 승리한 그가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마치 전쟁에서 돌아온 영웅과도 같아보였다. 오늘 아침 그 친구 선교사님으로부터 다시 반가운 문자를 받았다. 코로나 완치 후 이달 15일에 세네갈에서 출국해 17일 한국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다. 그간 고국에 계신 부모님이나 형제들과 지인들이 얼마나 걱정하며 애태우고 기도했겠는가?

[9] 그런 아들과 형제와 친구가 살아서 돌아온다니 방문하는 자나 맞이하는 자에게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아침에 문자를 나누던 중 같은 바이러스로 천국에 먼저 가신 시카고 지인 목사님의 얘기를 전해주었다. 그 소식에 깊은 안타까움을 표시하더니만 계좌번호를 알아주면 적은 금액이라도 홀로 되신 사모님께 보내드리고 싶다고 했다.

[10] 처음엔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앞서 가신 목사님의 장례식에 관한 사진과 지역방송국의 보도영상을 보냈더니 시청 후에 너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며 송금하고 싶다고 재차 전해왔다. 세네갈에서 미국으로 직접 돈을 보낼 수 없는 고로 내 계좌번호로 돈을 보내면 내가 대신 사모님께 전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11] 그 방법밖엔 달리 길이 없어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송금 받은 금액에 얼마를 더해서 미국에 있는 큰 딸이 우편으로 사모님께 체크를 보내는 방식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눈물겹고 감동적인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본인도 남의 후원을 받아 생활하고 사역해야 하는 선교사의 입장이 아니던가. 그런데 비록 소액이라곤 하나 그것으로라도 혼자 되신 사모님께 위로를 드리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이 너무도 귀하고 진실 되게 느껴졌다.

[12] 짧게 문자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가슴 아프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친구 선교사님의 진심어린 마음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를 생각해봤다. 천국에 앞서 가신 시카고의 목사님과 똑같은 아픔과 두려움을 본인이 겪었기에 유족들에 대한 그의 마음은 남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다가, 전달 자체도 불편하고 어려웠기에 마음만으로 표시해도 괜찮았을 상황이다. 같은 문제로 아파보고 두려워해봤기에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이 생긴 것이다.

[13]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액수라도 그 사모님께 꼭 전해드리고자 하는 친구 선교사님의 진정어린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메어왔다. 순간 히브리서 4장 15절이 선명히 떠올랐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4] 이전의 한글개역은 ‘체휼(體恤)하다’라고 번역했었는데 개정하면서 ‘동정하다’로 수정을 했다. 그런데 ‘동정하다’라고 하면 우리 상황에선 별로 좋지 않은 표현이기에 “체휼하다”가 더 좋은 번역이라 할 수 있다.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다 보니 이해하기 쉽게 하느라 ‘동정하다’로 수정한 것 같은데, 오히려 적합지 않은 번역이 돼버리고 말았다. ‘체휼(體恤)하다’는 말은 ‘체험을 통해 긍휼히 여기다’란 뜻이다.

[15] 이 동사의 헬라어 원어는 ‘συμπαθεω’이다. 이것은 ‘συμ’(sym, ‘함께’)과 ‘πάσχω’(pasko, ‘고통당하다’)의 합성어로 ‘어떤 사람과 경험을 나누다’, ‘어떤 사람을 측은히 여기다’, ‘같은 것을 겪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시험 당하고 환난을 당하여 연약해 졌을 때에 ‘함께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심정을 가진 것’을 가리킨다. 이 헬라어 ‘συμπαθεω’에서 유래된 영어 단어가 ‘sympathize’란 단어이다.

[16]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동안 우리가 당해본 온갖 종류의 고난과 억울함과 상처 등을 몸소 다 겪으신 분이시다. 그렇기에 그분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없이 사람을 야박하고 몰인정하게 대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직접 고난을 경험해보셨기에 같은 심정으로 이해하고 아파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도 모든 것을 다 아신다.

[17] 하지만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체험적으로 아는 것(יָדַעְ, yadah)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고초와 아픔을 신적 지식으로는 아시겠지만 체험적으로는 알지 못하셨을 것이다. 친구 선교사가 코로나로 같은 고초를 겪지 않았다면 고인의 사모님에게 위로금을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인도 똑같이 당해봤기에 고인 가족의 아픔에 ‘συμπαθεω’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 고인의 아픔에 동참해보지 않은 나 같은 이의 백 마디 위로보다, 남편처럼 코로나와 사투를 벌인 경험이 있는 친구 선교사님의 애정 어린 위로가 사모님께 더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 친구 선교사님의 감동적인 반응을 통해서 주님께서 누구보다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위로자 되심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됨을 감사한다.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신성욱 #코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