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희망하지 않는 죄

오피니언·칼럼
칼럼

1. 기어서라도 가야 하는 인생

박동식 교수

한때 인기 개그맨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이동우 씨가 있습니다. 어느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동안의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더군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런데 설상가상이라 했던가요. 그의 아내도 갑자기 뇌종양에 걸려 한쪽 청력을 잃었다 합니다. 의사는 '일하지 말라' 했다는데 남편이 저렇게 있으니 어떻게 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사는 게 그런 것 같다. 기어서라도 간다'는 말을 하더군요. 딸 하나 있는 가정인데 살아가는 모습이 눈물겹습니다. 인생은 어떻게든 살아야 합니다. '기어서라도' 말이지요. 기어서라도 가다 보면 희망의 샘물을 만날 것입니다.

정호승 시인이 탄광에서 일하는 광원을 취재했습니다. '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땅 위의 직업을 갖는 거"라 했다 합니다.1) 땅 밑에서 일하니 땅 위의 그 어떤 일이든 부럽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루빨리 여건만 되면 어둠만이 있는 땅밑에서 나와 밝은 햇살 아래 일할 수 있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땅 위에서 일하는 분들도 땅 밑에서 일하는 분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우리는 각자 어떤 형편에서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희망이라도 있을까요? 코로나 19 이후 거리를 보면, 마치 은하철도 999가 생명체가 거의 살지 않는 어느 행성에 도착한 그런 분위기 같아 보입니다. 썰렁합니다. 이런 시간이 길어집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삶은 정말로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 각자는 코로나 19 이후에 더 나은 삶을 희망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더 나은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사회는, 국가는, 세계는, 더 큰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요?

2. 그것이 비록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 할지라도

코로나19의 시간을 보내며 어떠신지요? 우리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다가도, 현실을 보는 순간 그 단어가 얼마나 추상적인지를, 얼마나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지를, 문득 알아차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을까요? 설령 품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품은 소망과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병헌이 주연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2005) 마지막 나레이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꿈이 있는데 이루어질 수 없다니요. 아니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아 버리다니요. 꿈은 이루어질 것을 믿고 나갈 때, 아니 완전히 이루어질지는 백 퍼센트 확신하지 못하더라도, 그 꿈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 되는데, 꿈 그 자체가 이미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인생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러나 먼저 그리 단정 짓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할 실마리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달콤한 인생> 영화 곳곳에 나오는 유키 구라모토(Yuhki Kuramoto)의 <로망스(Romance)>를 들으며 호접몽에라도 빠져보면 어떨까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때로는 객관적 데이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상상과 예기치 못하는 순간에 그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불현듯 올 수 있기 때문이죠.

3. 기울어짐이 만들어내는 변화

20세기에 그랬었습니다. 옷의 지퍼를 올릴 때, 그 지퍼가 자신의 길로 가지 않고 옆의 옷 한 자락을 잡아먹어, 올라가도 내려가도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세기가 지난 21세기에도 이 난제는 여전합니다. 이건 왜 못 고칠까요? 변해야 할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어야 할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있으면, 그것이 넓게는 인생이든 사회든 또는 좁게는 성격이든 인간관계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든, 어색하지 싶습니다. 어색하면 바꾸면 되는데,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면 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 않은가 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이 앞으로 더 좋아지기를 소망합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쁜 날이 되기를 누가 바랄까요? 오늘보다 나쁜 삶을 바란다면 그것이 어찌 인생이겠습니까? 그러니 떠나온 인생은 돌아가면 안 되지요. 출애굽 했으면 애굽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광야 생활이 힘들다고 애굽의 가마솥을 그리워하면 안 되지요. 그것은 역사의 퇴보요, 공동체의 죽음이요,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아야 할 때는 미래의 희망과 연결될 때뿐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역사 속 인물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그들과 맺으신 언약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때뿐이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도 예루살렘이 회복되기를 기도하며 과거 하나님이 맺으신 약속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느1:8-9). 하나님께 과거의 언약을 기억하셔서 내일의 희망을 주시라는 것이 느헤미야의 기도일 것입니다.

영화 <신과 함께>에서 건진 문장이 있습니다. "지나간 슬픔에 새로운 눈물을 낭비하지 말라."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흘릴 눈물이 많을 터이기에 과거의 슬픔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비록 또 다른 슬픔에 눈물 흘릴지라도 그 눈물 뒤에 희망이 꽃 필 것을 기대해 봅니다. 그러니 내일에 대한 희망을 어떻게든 찾아야 합니다. 오늘이 주어지고 내일이 올 것을 믿는 것은 우리가 살았던 과거의 삶의 방식을 바꾸라고 주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일 나는 어제의 무엇을 바꿀까를 고민해 봅시다. 그런데 그 고민의 답이 오늘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를 돌이켜 보며 오늘을 새롭게 살 때 내일의 삶은 변할 것입니다. 그게 단순하지만 인생이지 않겠습니까?

짝수가 대칭, 평등, 균형, 조화, 평화를 상징한다면, 홀수는 비대칭, 불평등, 불균형, 부조화, 비평화를 상징합니다. 2:1이나 3:2나 4:3처럼 합해서 홀수인 것은 무엇인가 늘 모자라거나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짝수는 일견 평온한 듯하지만, 역사의 진보는 늘 홀수가 감당했던 것 같습니다(물론 그것이 퇴보로 결론 날 수도 있겠지요). 철학자 헤겔이 말하는 "정립"이 의미상 짝수에 해당한다면 "반정립"은 홀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며, 니체가 말하는 그리스도 비극에서 질서를 중요시하는 "아폴론적 요소"가 짝수에 해당한다면, 역동적 변화를 시도하는 "디오니소스적 요소"는 홀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변화는 '반정립'과 '디오니소스적 요소'에 의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시대가 오지 않아 답답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은 시간이 필요한 듯합니다. 역사는 그런 면에서 눈곱 만큼씩만 진보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아침에 바라는 세상이 온다는 생각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허무해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늘 희망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4. 희망을 품고 만들어 가는 사람들

정호승 시인의 「선암사 낙엽들은 해우소로 간다」2)라는 시는 '희망을 품는 사람을 사랑하라' 합니다.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왜 낮은 데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시월의 붉은 달이 지고
창밖에 따스한 불빛이 그리운 날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져 썩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한 잎 낙엽으로 썩어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라
해마다 선암사 낙엽들은 해우소로 간다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은 희망을 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그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썩어 새 생명을 품을 수 있는 사람에게 희망은 있습니다. 아름다운 나뭇잎에서 낙엽이 되어 썩어지는 전 과정을 아는 자만이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희망은 관념도 아니며 환상도 아니지요. 현실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이가 희망을 품으며 희망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희망을 품은 이들이 함께 만나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허물어진 것을 보았지만 절망(despair)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성벽을 중수(repair) 하였지요(느3). 누가 혼자서 성벽을 보수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성벽의 부분 부분들을 보수한 것을 보게 됩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영웅 같은 어느 특정인의 등장도 중요하겠지만, 같은 뜻을 품은 이들이 서로 도와주며 만들어 가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 장난 좀 하면, 희망은 despair를 repair로 바꾸는 과정에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인가를 조립하는 것을 잘하지 못합니다. 어릴 때 많이 해 보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는 핑계를 대 봅니다. 아내가 산 물건을 조립해야 하는데 난감합니다. 레고 놀이를 좋아하는 아들이 설명서를 보고는 시작합니다. 아빠가 되어서 못하겠다고 물러설 수도 없지요. 그런데 하나씩 설명서대로 맞추어 가니 재미있네요. 딸이 또 합류했습니다. 함께 도와주며 완성하니 전 과정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어느 한 부분만 알아서는 전 과정을 알 수 없습니다. 중간중간 힘든 부분들을 극복하는 과정도 중요하더군요. 늘 완성품만을 사용해왔지 조립하기는 처음이라 뿌듯한 마음도 들고 아이들과 함께했기에 추억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하네요. 인생은 이렇게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희망 또한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일 겁니다.

희망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은 아마도 장애물이 있을 때 돌파구를 찾는 사람들일 겁니다. 음식으로 치면 고추장 같은 존재들이라고나 할까요. 밥맛 없을 때 고추장 약간 찍어 먹어도 입맛이 돌아옵니다. 더운 여름 고향 집 들마루에 앉아 저녁이면 입이 큰 그릇에 보리밥, 생나물, 된장찌개 넣고 고추장으로 비벼 먹던 그 밥이 맛있었습니다. 그 맛을 아들이 또한 좋아합니다. 아들은 고추장보다는 된장/쌈장을 더 좋아하지만 같은 계열 아니겠습니까. 먹을 만한 반찬이 없으면 된장을 꺼내 먹습니다. 두부도 그냥 먹지 않고 언제나 된장과 함께 비벼 먹습니다. 거의 모든 식사에 된장을 옆에 끼고 한동안 살더군요. 기가 차서 농담 삼아 '피자에도 발라 먹어 보지' 했더니 그건 아니랍니다. 그런데 드디어 핫도그를 해 먹던 빵을 가져오더니 거기에 된장을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입 베어 물고는 "음~ 음~" 소리를 냅니다. 맛있다는 이야기지요. 멀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피자에도 된장 바를 날이 올 것입니다. '된장 피자'!!! 어떤가요?

이런 것 보면 어쩌면 우리 조선인의 피부 속에는 붉은 피 대신 피보다도 더 붉은 고추장이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대대손손 이렇게도 신기한 명약이 거의 모든 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지 않은가요. 대한민국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고추장 전이의 역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활력을 얻기 위해 된장이나 고추장 같은 활력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우리 삶 중간중간 고추장, 된장 같은 활력소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희망을 품고 희망을 만들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5. 중심을 잡고 걸어가는 이들

몇 년 전 일입니다.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집 앞 맥도날드가 문을 닫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영업 중지" 사인만을 붙여 놓은 채 맥도날드가 길을 잃은 지 한두 달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들러 커피 마시며 책 보던 곳인데 폐가(?)로 변하니 저도 덩달아 길을 잃었었죠. 길 건너 커피 빈(Coffee Bean)이 있긴 하지만 맥도날드보다 약간 비싼 것도 있고 공간이 좁은 탓에 좀 오래 앉아 있으면 눈치도 보이기도 해서 자주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도 길을 잃었죠. 그러던 어느 날 그 공간이 더워 밖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봤습니다. 의외로 통로 길이라 시원하다 못해 쌀쌀하더군요. 더운 LA에 자연 바람이 부는 시원한 곳은 그야말로 선물이지요. 책 읽기에 딱 좋았습니다. 잃은 길을 다시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길은 어디에나 있네요. 다만 두 눈 들어 찾아보지 않았을 뿐이지요.'

어느 공항에서 갈아타야 하는데 그러려면 공항 밖으로 나가 도로를 건너 조금 가야 한다더군요. 혼자 찾아갈 자신이 없어 하는 사이 어느 미국 여자가 간다기에 따라붙었습니다. 그랬더니 저 보고 '앞 못 보는 사람이 앞 못 보는 사람을 인도하는 격'이라며 그 표현을 아는지 묻습니다. 우리도 그런 표현 쓴다고 했지요. 그렇게 걷고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앞 못 보는 사람이 앞 못 보는 사람을 인도한 격이 아니네요. 비록 모르더라도 비록 보지 못하더라도 걷고 찾는 자에게 길은 반드시 있는 법이지요. 길은 그냥 지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야 생기는 것 같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굽이 돌아가는 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3)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주저앉지 마십시오/돌아서지 마십시오/삶은 가는 것입니다/그래도 가는 것입니다/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이 아니어도 걷기에 힘겨운 꼬불꼬불한 길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기에 그 길 걸어가면 되겠지요.

길은 길 아닌 곳에 있을 때 그리운 법입니다. 그런데 길 아닌 곳에서 길만 그리워할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도 길을 만들어 걸어갈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일생에 한 번쯤은 광야나 사막에 홀로 서 있어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때 사막은 실제 사막일 수 있고 자신의 삶을 사막화하는 정신의 사막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막을 걸어가다 보면 "삶의 절대적 조건"으로 간주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아야 하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합니다.4)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는 어쩌면 한 번도 걸어가 보지 못한 길 아닌 길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무작정 서 있기만 할 수는 없지요. 그동안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삶의 철학이나 조건들이 절대적이었는지를 질문하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절대적으로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없어도 무방한 것들은 없는지를 일상의 길 아닌 곳에서 질문하고 길을 만들어 걸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길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중심일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리다가, 멈추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래서 중심을 다시 잡는 나뭇가지들이 멋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을 잡는 것이 무엇일까? 결국 뿌리이겠죠. 흔들리되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중심을 우리 스스로 잡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나약한 인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는 창조주요, 섭리자요, 성화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우리의 뿌리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이 우직하게 중심을 잡고 서 있는 '동상'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진 바람에도 묵묵히 견딜 것 같은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요? 그런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인생이 철저하게 돈으로 굴러가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어느 정도의 사회적 위치에 올라 서 있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일까요? 사람 사는 세상에는 비교의식이라는 것이 물질적 성공을 부추기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물질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 뒤처지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여기에는 정치적 신념에 있어서 진보적 사람이든 보수적 사람이든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돈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사회적 높고 낮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미쳐서 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일 것이며 동상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니 우리가 그런 동상 같은 사람이 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중심을 잡고서 말이죠.

6. 오늘 하루도 삼위일체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여름이 되면 LA, 전기가 부족한지 종종 전기가 나가곤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시에서 계획적으로 전기공급을 일정 시간 중단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어둠 속에 있다 보면 빛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것이 고맙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부재해 봐야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부재의 불편함을 느껴 보면 일상의 편리함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알 수 있지요. 마찬가지로 희망은 희망이 부재할 경우 희망하게 됩니다.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희망은 커지지요.

성경은 우리에게 내일을 희망하라고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창조부터 종말까지는 희망의 역사일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지금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며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할 그 마지막을 희망하라고 어쩌면 '명령'합니다. 그러니 희망하지 않는 것은 "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칼 바르트는 '교만, 기만, 태만'을 죄의 삼 종 세트로 보았습니다. 이것을 희망과도 연관 짓는다면, 희망하기를 게을리하는 것도, 더 나아가 희망하지 않는 것은 죄일 겁니다.

위르겐 몰트만도 자신의 『희망의 신학』에서 "절망의 죄"를 언급하며, 요한 크리소스톰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를 멸망에 빠뜨리는 것은 죄라기보다는 차라리 절망이다." 이것은 "절망하는 죄"를 의미합니다. 곧 절망하는 것이 죄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희망을 "'존재하지 않는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존재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존재할 수 있는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 했습니다.5) "존재하지 않는 곳"과 "아직은 존재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존재할 수 있는 곳"은 엄연히 차이가 있지요. 지금 비록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둘 사이에 차이가 없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언젠가는 존재할 것을 믿고 소망한다는 점에서는 엄청난 큰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여전히 역사를 이끌어가시는데, 우리가 살아갈 희망없이 살아간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희망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죄일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희망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도 심지어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도 희망을 주셨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물이지만 희망할 수 없는 시간에도 내일의 희망을 품으며 살아간 이들이기에 특별한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희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매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우리는 별로 한 것 없이 한 해를 보낸 것 같아 씁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새해에는 가슴 뛰는 일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많지요. 그것이 어디 한 해의 마지막 날에만 해당되겠습니까. 돌아본다는 것, 한 해의 마지막 날, 한 달의 마지막 날, 일주일의 마지막 날, 하루의 마지막 시간, 돌아보면 모든 출발은 한 호흡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호흡 한 번 가다듬고 희망을 노래합시다.

조국 떠나 힘든 이민 생활이라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기에 더욱이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삶의 소망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요? 희망 자체이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치 하루의 태양은 어떤 일이 있어도 떠오르는 것처럼, 꽃은 어떤 일이 있어도 피는 것처럼, 계절은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오는 것처럼, 희망은 선택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품어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어떤 일이 있어도 말이죠.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1 정호승, 『위안』(열림원, 2003), 50.
2 정호승, 『여행』(창비, 2013), 101.
3 박노해, 『사람만이 희망이다』(느린걸음, 2018), 102.
4 정호승, 『위안』, 33-34.
5 위르겐 몰트만, 이신건옮김, 『희망의 신학』(대한기독교서회, 2002), 30,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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