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의 민족자결주의만 3.1운동의 '주(主)'된 기폭제는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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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대 이상규 교수 3.1운동 원인으로, 당시 민족주의 사상과 민족자결주의..."배타성 아닌 상호작용으로 봐야"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는 도봉구 광명교회에서 11일 오전 10시부터 ‘민족의 고난과 한국 교회’를 주제로 발표회를 진행했다. 1부 예배로 광명교회 장금석 목사가 에스더 9:22을 놓고 설교를 전했다. 뒤이어 2부 주제 발표로 김영한 전 숭실대 초대기독대학원장, 이상규 백석대 석좌 교수가 나섰다.

김영한 전 숭실대 초대기독대학원장 교수는 3.1운동과 한국교회 개혁 신학적 성찰을 놓고 발제했다. 그는 “당시 한국 교회가 3.1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건, 구원을 민족의 구원으로 확장해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이화학당 등 기독사학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며 “교회는 3.1운동에 있어,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한국교회는, 민족의 고난에 동참했기에 부흥한 것”이라 덧붙였다.

그는 “에스더는 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다짐을 했다”며 “느헤미야, 모세, 다니엘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그는 “3.1 독립운동은 성경적 근거를 지녔다”고 했다. 다만 그는 “선교사들은 정교 분리 원칙을 근거로, 3.1운동의 교회 참여를 암묵적으로 반대했다”고 밝히면서, “당시 한국교회는 이를 거부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3.1운동을 계기로, 개인구원에 매몰된 신앙”에서 벗어나, “땅의 시민권 곧 민족의 구원으로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당대 기독교는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내걸고 행동했다”며 “국민이 주인이 되고, 인간의 기본권을 중시하는 것”이라 역설했다. 때문에 그는 “3.1운동은 일본에 대한 적대적 정죄보다, 양심과 평화에 호소했다”고 전했다. 그는 동경대 와다 하루키 명예 교수를 인용해, “3.1운동의 평화적 운동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는 기독교적, 예수의 원수 사랑에서 기원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영한 교수는 3.1운동이 인류보편주의를 추구했다고 말하면서, 교회가 인류 공동선을 위해 타 종교와 협력할 수 있음도 강조했다. 그는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의 ‘세계윤리구상’의 한 대목을 빌렸다.

“세계 윤리 없이는 생존도 불가능하다. 종교 간 평화 없이는 세계의 평화는 불가능하다. 종교 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 간의 평화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그는 종교간 대화를 놓고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즉 그는 “예수만이 유일한 구세주 때문에, 타 종교에 열린 태도를 취할 수 있다”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면, 사회적 공동선을 위해 타 종교와 협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3.1운동에서 천도교와 연합해, 민족 해방을 위해 노력했다”며 “이런 사상은 이미 3.1운동에 충분히 녹아 있었다”고 그는 역설했다.

전 숭실대 초대기독대학원장 김영한 박사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끝으로 그는 “한국교회는 3.1운동 전후로, 해외 선교부로부터 자립을 꾀했다”며 “3.1운동 참여에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고 했다. 또 그는 “노회, 총회를 조직해 서구 민주주의도 또한 배울 수 있는 훈련장 이었다”고 밝혔다. 나아가 그는 “남대문 상동교회 교인이었던 이회영은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했다”며 “시가 600억 원에 해당하는 재산을 팔아, 만주에 무관 학교를 세웠다”고 설명했다. “이 모든 게 기독교 복음이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그는 덧붙였다.

이어 백석대 이상규 석좌 교수는 ‘3·1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발제했다. 이 교수는 “3.1운동을 촉발시킨 계기”에 대해 논지를 전개하며, “크게 외인론(外因論)과 내인론(內因論)으로 나눌 수 있다”고 밝혔다.

그에 의하면, 외인론은 1차 대전 승전국인 미국의 민족자결주의 선포가 3.1운동을 촉발시킨 계기라는 주장이다. 반면 내인론은 일제의 심각한 탄압과 폭정이 만세운동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내인론자들은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의 민족적 역량을 격하시키는 것”을 이유로 외인론을 부정하고 있다.

이에 이 교수는 “역사적 사건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연쇄적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국제적 정세도 무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그는 “둘의 입장을 배타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상호보완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라 강조했다.

먼저 그는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을 기폭 시킨 주요한 원인이라는 외인론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민족이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민족자결주의 내용을 말하면서, “이는 1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식민지에만 해당되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과 함께 1차 대전 전승국 이었다”며 “일본 식민지인 조선은 해당사항이 아니”라고 밝혔다. 더구나 그는 “윌슨의 민족 자결론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발상이라기”보다 “패전국의 국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적 차원”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3.1운동이 거족적 독립의지의 결실이라는 내인론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는 서울대 신용하 교수 주장을 빌려 “한말의 민족주의 사상은 매우 강고(强固)해, 1905년 이후 소년층에 까지 침투했다”며 “애국 계몽 운동가들은 이를 1910-15년까지 국권회복 사상으로 배양시켜, 3.1운동의 강력한 동인(動因)이 됐다”고 진술했다.

계속해서 그는 신용하 교수를 빌려 “윌슨의 민족 자결론은 한말의 국권회복운동이 전개해온 독립운동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며 “신한청년단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돼, 국내 독립운동 세력의 의지를 고취시키는 기회로 보았다”고 전했다. 따라서 이 교수는 “민족 자결론은 3.1운동에 영향 끼친 원인이기"보다 "축적된 민족주체역량이 국제정세 변동에 편승해, 능동적 기회로서 민족 자결론을 포착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백석대 이상규 석좌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하여 그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에 영향을 끼친 것은 맞지만, 주된 요인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민족자결주의만이 아닌, 국권피탈 이후 일제 폭정에 대해 누적된 불만이 상호 연쇄적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때문에 그는 “3.1운동은 외인론과 내인론은 상호작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며 “역사 사건의 원인이나 전개과정은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편 그는 “3.1운동은 상해 임정 수립, 만주 지역 중심의 무장독립 투쟁, 국내 민족운동, 동아시아 독립 해방운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학계 주장을 전하며, “그 외 다른 영향이 간과됐다”고 밝혔다. 먼저 그는 “3.1운동의 결과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증강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전까지 여성은 대문을 나설 때조차 주저했던 존재였다”며 “3.1운동 때 여성들이 만세 시위에 가담한 일은 전통적 여성상을 파괴한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3.1운동 이후에도, 그는 “1919년 9월 김마리아, 황애시덕, 신의경, 이정숙 등이 주역이 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가 조직됐다”며 “이듬해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조직된 부인회와 통합돼, 11월 대한애국부인회로 발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이후 1920년 4월 여자교육협회, 1923년 6월 조선여자기독절제회, 8월 조선여자 기독교청년연합회, 10월 YMCA 창립 등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 교수는 “3.1운동에서 여성들의 시위 준비, 만세시위, 투옥과 감옥에서의 저항은 여성의 사회활동 인식을 변화시켰다”며 “여성들의 사회활동 진작 시키는 계기였다”고 강조했다.

이 외에도 그는 “3.1운동의 결과로 취학율이 급격히 증가됐다”며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실력양성론이 대두됐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민족자강을 이루기 위해 국제 정세의 변화를 헤아릴 수 있는, 안목을 배양해야 한다는 각성의 결과”라고 진단했다. 그에 의하면, 1919년 기독교계 학교는 676개교, 학생 총수는 24,764명이었다. 1923년에는 1,361개교, 79,269명으로 증가했다. 무려 300% 폭증한 수치다. 따라서 그는 “3.1운동 이후, 교육이 중산층 이상의 소수 엘리트 중심”에서 “하층으로 확산돼 교육의 대중화가 이뤄졌다”고 진단했다.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이어 질의 응답시간이 이어졌다. “천도교, 기독교는 종교적 지향점이 달랐음에도, 3.1운동 당시 같이 협력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한 질문이 던져졌다.

백석대 이상규 석좌 교수는 “기독교나 천도교는 교리가 원천 달랐지만, 민족 독립이라는 한 가지 목표는 일치했다”고 강조했다. 결국 그는 “인류 평화라는 공동선을 위해 교회는 천도교와 협력할 수 있었다”며 당시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신석규 목사의 말을 빌렸다. 신석규 목사는 당시 천도교와의 협력을 주저했지만, 새벽기도 때 “하나님께서 민족의 독립 기회를 주셨는데, 적극 참여하라”는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 이를 계기로 신석규 목사는 3.1운동에 천도교와 협력해서 참여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상규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종교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공동선 증진을 위해서는 타 종교와 협력할 수는 있다”고 역설했다.

전 숭실대 초대기독대학원장 김영한 박사도 부연했다. 그는 “복음주의자가 사회 문제를 외면한다면, 이는 역사적 개혁신학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그는 “개혁 신학 전통은 순교와 피를 통해, 기독교로서 정체성을 가진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 그는 NCCK를 비판하며 “이들은 1970년대 유신정권에 대해 비판적 어조를 취했다”며 “그러나 지금은 문재인 정부의 어용 단체가 됐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며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문제”라고 밝혔다. 가령 그는 “북한의 현재 상황이 그렇다”며 “신앙의 자유를 위해, 자유민주체제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영국 메리 혁명도 정부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청교도들의 저항권 행사”라며 “당시 존 낙스는 종교의 자유를 위한 기독교 혁명론을 주창했다”고 제시했다. 아울러 그는 “3.1운동을 통해 교회는 대한제국이 아닌, 국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을 지향했다”고 강조했다. 때문에 그는 “교회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 현 정부의 차별금지법(NAP)저지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교회는 여·야당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며 “하나님 말씀에 입각해, 이에 어긋나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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