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칼럼] 3.1운동과 한국교회: 개혁신학적 성찰(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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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박사 ©기독일보 DB

2.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의 역할

1) 기독교 지도자들의 민족구원 신앙

3.1 운동은 실제적으로 기독교가 주도한 운동이었다. 33인 중, 16명이 목사였고, 태화관에서 불교도인 한용훈의 만세 삼창을 끝으로 33인 모두 연행되었지만,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은 경신학교 출신의 정재용이었다. 전국에서 이 운동이 일어날 때, 집결지는 교회나 기독교학교였고, 앞장 선 사람들도 기독교학교 교사거나 기독교학교 학생들이었다. 3.1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 민족 대표는 민족적 양심과 종교적 신앙심을 연결시켰다. 오산학교 교장 이승훈 장로, 서울 수표교교회 신석구 목사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승훈 장로는 기독교 천도교의 합동 거사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거사 후에 체포되어 심문받을 때 일본 재판장 앞에서 3.1운동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였고 민족적 자존심이 일본의 수모를 견딜 수 없다고 참가 동기를 피력하였다: "나는 일한 병합 이래 언론 출판 교육 등의 자유를 피탈당하였으므로 한일 병합에 대하여 불만의 감회를 가지고 있었다. 금번 천제가 행복을 내려주는 시기에 조우하여 천하일반의 사람이 같이 생을 하도록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감리교에서 순교자로 추앙받는 서울 수표교교회 담임 신석구 목사는 3.1운동 참여 요청을 받았을 때 나는 하나님의 종이니 이 큰 일을 하나님과 의논하고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3일을 작정하고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의 음성을 들었다: "4천년 전하여 나려오던 영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라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그래서 신석구는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감지하여 독립운동은 목회자로서 해야할 목회의 일부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조선은 조선민족으로 통치하려고 생각하였다. 조선은 일본이 약탈하기 때문에 일본은 조선의 원수라고 하지만 우리들은 신에게 몸을 바치고 있으니까 그 원수를 갚겠다고 하지 않고 신의 마음으로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다." 재판장이 "한일 합병 전의 조선은 대단한 악정(惡政)으로 인민은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으나 합병한 후로부터는 자유와 행복을 누렸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라는 교만한 질문을 하였을 때, 신석구는 "병합한 후 조선은 식민지로 되어, 조선 사람은 열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데 조선인민에게 행복이 올 리가 없다"고 반박하였다.

3.1운동은 당시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던 해외 선교사들에게는 비밀로 부쳐졌다. 나중에 3.1운동을 해외에 적극 알리는 역할을 했던 스코필드 선교사에게만 며칠 전에야 통보됐다. 그만큼 철저하게 서로를 믿고 움직였다.

2) 미국, 캐나다 등 서양 선교사들의 인도주의적 역할: 일제의 교회 및 참가자들 탄압에 대한 해외 고발 보도

(1) 3.1거사(擧事)에 배제되어 선교사들도 터져 나온 독립운동에 놀람

3.1독립선언서는 민족자결의 원칙에 입각해 있다. 하지만 3.1운동 지도부는 그 당시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의 흐름을 알지 못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이루어 질 때 미국정부 또한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의 선봉이었고 미정부 (필리핀 식민지화, 당시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Taft, 루스벨트가 재선 거부로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됨)는 일본의 내각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 Katsura Taro)와 그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Taft-Katsura agreement)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통치와 일본의 조선 통치를 암묵적으로 상호 동의하는 제국주의 정책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는 아무리 윌슨 대통령이 평화에 기반한 사상을 가졌다한들 미국 전반의 제국주의 기조의 정책은 변하지 않는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준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1905년)이 상징하는 바는 당시 미국 정권의 제국주의 정책이 교회의 선교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추정할 수 있다.

민중신학자들은 제국주의정책 하의 교회는 정부로부터 지속적으로 정교분리(정치와 교회의 분리)의 원칙을 강요당할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흐름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및 당시 기독교계 내의 개인주의적 회심을 강조한 신학과 맞닿아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정통개신교의 견해에 의하면 평상시에서도 종교와 정치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카이퍼의 영역주권 원리(principle of sphere sovereignty)에 따라서 서로 간섭하거나 혼동이 있어서는 안된다. 구약성경에서도 종교와 정치는 구분되었다. 단 예언자들은 종교적 직임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3자로서 제사와 정치의 윤리적 부패와 하나님 말씀으로부터의 이탈에 관하여 비판할 수 있었다. 민중신학의 초창기 한국교회의 보수적 경향과 신앙적 부흥에 대한 비정치화 해석은 한국교회의 초창기 영적 각성운동이 마치 제국주의적 정교분리정책에 의하여 만들어진 선교사들의 인위적인 선교정책의 산물로 해석하는 왜곡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1904년과 1907년의 원산 및 평양영적 각성운동에 일어난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를 부정하는 것으로 왜곡될 수 있다. 동일한 제국주의적 상황 속에서 한국보다 먼저 선교받은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에서 한국교회에서와 같은 영적 각성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3.1운동 준비과정에서 외국 선교사들은 외국인으로서 일제 총독부와 마찰을 가지지 않으려 배제되었으나 막상 만세 및 시위운동이 펼쳐지고 난 후 이들 선교사들의 역할이란 너무나 컸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3.1운동을 일제와의 갈등과 선교사업에 올무가 되지 않도록 선교사들에게 전혀 사전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막상 3.1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선교사들은 놀랐다고 한다: "일본이 3.1운동을 선교사와 관련시키려 하나 우리가 아는 한에 있어서는 선교사들은 이 운동에 처음부터 관여한 바도 없고 또 자세히 아는 바도 없었다. 3.1운동이 터짐으로 일본 제국만 놀란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도 깜짝 놀랐다... 어느 장로교 선교회의 보고서는 '이 운동이 그들에게 청천 벽력과 같이 왔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피하고 표면적으로는 정교분리정책을 표방했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비참여" 원칙과 "정신적 차원에의 고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내면적으로는 건전한 민족주의 육성과 항일 민족독립운동을 위하여 큰 역할을 해주었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3.1운동으로 인해 외국인 선교사들은 교회담임 목사들과 선교부 직원들이 대거 투옥되고 교인들이 뒤따라가는 등 교회 운영에 차질이 생겨지는 것을 보고 당황하면서 우려를 표명하였다. 선교사들은 무력으로 약소국 조선(朝鮮)의 국권을 강탈한 일본의 무단(武斷)정치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고 일본 군국주의가 무력으로 추구하는 동아시아연대(1938년에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으로 2차세계대전 개전을 정당화)의 이상이 기독교 가치와 일치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2) 선교사들은 일제의 잔혹한 독립운동 탄압을 세계에 알리고 조선 독립의 정당함을 알림

지난해 2018년 3.1절 99주년 기념으로 3월 1일 오전 11시부터 약 2시간 동안 연속 방영된 KBS1TV 3.1절 특집다큐 2부작 <이방인과 3.1운동>은 3.1운동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의 역할을 조명하였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했던 외국인들의 기본 원칙으로 인하여 선교사들과 3.1 운동의 연관성은 좀처럼 알려지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과 운명을 함께 했던 이들이 남긴 각종 기록과 자료에서 놀랍게도 3.1운동과 일제 저항의 흔적이 하나 둘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3.1 운동! 삽시간에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번져 나간 배경에 조선 정착 후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있었다. 미선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학교를 기반으로 한 지역의 만세 운동을 주도한 사실이 드러났다. 선교사들은 위대한 평화와 인권, 자유 독립의 운동으로 전 세계에 충격을 던졌던 3.1운동을 국경을 넘어 국내외에 일제의 부당함을 알리고, 조선 독립을 염원했던, 전 세계에 숨어 있는 저항의 기록을 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3.1만세운동 8일 후 1919년 3월 9일 일본 총독부 내부국장이었던 우사미가 주선하여 일본 감리교선교사 스미스(Frank H. Smith)집에서 총독부 고위관리들과 선교사들과의 회담이 있었다. 감리교 선교사로는 노블(W. A. Noble)과 하디(Robert A. Hardie), 장로교 선교사로는 게일(J. S. Gale), 에비선(O. R. Evison), 샤록(A. M. Sharrock), 밀러(Hugh Miller), 베른하젤(C. F. Bernheisel) 등이 참가하였다.

우사미는 일본측의 입장을 대변했는데 한국의 독립과 인도주의는 좋으나 독립은 한국인을 분열로 이끌터니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선교사들은 이의를 제기하면서 한국인의 입장에서 대변하였다.

게일(J. S. Gale)은 조선 독립 허용을 지지하였다: "한국인들은 정신적인 공포 속에 살고 있다...한국사람들은 다른 민족이기 때문에...그들 자신의 민족적 로선으로 발전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노블(W. A. Noble)은 일본이 만족할만한 프로그램을 제시못했다고 말했다: "한국사람들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일본 정부와 분리라고 느끼고 있다."

하디(Robert A. Hardie)는 한국인의 성인됨을 피력하였다: "한국인들은 이제 어른이 되었다...그들은 그들의 민족적 로선에 따라 그들 자신의 운명을 실현할 기회를 원하고 있다."

에비슨(O. R. Evison)은 스코틀랜드와 영국 사이의 서로 보완을 예를 들면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지지하였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존경되기를 원하고 있으며 자기들의 언어가 보존되기를 바라고 있다...그들은 자치정부가 시작되기를 원하고 있다."

베른하이젤(C. F. Bernheisel)은 한국민의 불안의 감정을 대변하였다: "불안의 감정은 학교 교실에도 만연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어느 때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에게 가해진 탄압에 대하여 불안을 가지고 있다."

선교사들은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을 설득해 달라는 조선 충독부의 요청을 세 가지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정교분리,' '한국인 신임 배반할 수 없음,' "비(非)교인들 간섭은 무익하다'고 하였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에게까지 비밀에 부치며 진행한 만세운동이었지만 3.1운동에 대한 암묵적 지지를 함으로써 한국교회가 민족교회로서 자주적인 애국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선교사들의 관심사는 독립과 같은 정치적 문제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조선총독부와 일제로부터 치외법권을 확보하여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고 인도주의에 호소하면서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포학과 고문, 비인도적 학대, 종교적 탄압, 대량 학살이 이 세상에서 어디서나 사라져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평양에 활동했던 익명의 선교사가 초기 3.1운동 관련 자료를 모아 10부로 구성된 '한국독립운동 발발'이라는 자료 보고서에는 한국독립운동의 개시부터 독립 운동의 전개 과정까지 상세하게 설명 돼 있다. 이 보고서의 9부에는 세브란스 병원 교수였던 스코필드 선교사가 현지를 답사하고 남긴 '수원 제암리의 대학살', '수촌 만행 보고서', '화수리의 살인 사건'과 더불어 1919년 6월 5일자 상하이 가제트에 실린 피터스(당시 일본 東山學院 교장)의 '한국에서 일본의 도덕적 실패-일본 정부와 국가의 책임'이라는 기고문도 편집돼 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계속 선교활동을 하는 한,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인을 보호할 목적으로, 결국 기독교인들의 만세 시위 가담을 되도록 말리려 했다. 또 한국인의 독립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시정 개선 혹은 한국인의 참정권 보장 정도에 그칠 것으로 생각했다. 선교사들은 본국정부의 외교정책을 따르면서, 한국의 정치 불간섭 또는 정치적 중립의 입장을 취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삼았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본의 무단통치에 의한 식민지 정책이 사람들을 기독교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보고했다.

선교사들은 3.1운동에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미쳤다.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샤록스(Alfred M. Sharrocks, 謝樂秀)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소식을 안창호, 이승만 등에게 전하였다. 시위자를 돕던 마펫(S. A. Moffett)은 일제의 만행이 훈족(the Huns)처럼 잔인하다고 비난하였다. 숭실학교의 선교사 모우리(E. M. Mowry)는 독립선언서를 영역하고 피신한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는 죄명으로 6개월간 투옥과 강제 노동을 당하였다. 스코필드(F. W. Scofield)는 3.1운동에 관련된 문서와 사진을 수집하여 선교부에 보고하였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1919년 6월 총회에서 일본의 야만적 탄압과 고문에 강경한 반대를 결의하였다. 언더우드(H. H. Underwood)는 제암리교회 방화 살인사건 현장을 찍은 사진과 함께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여 그 사진이 미국 하원 의회록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선교사들의 활동은 외국인으로서 3.1운동에 직접 시위자로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더 중요한 일을 해주었다. 그것은 3.1만세 시위운동을 촬영하고 기록하여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한 것이다.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가 세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아니한 상황에서 비로소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가 국제사회, 특히 미국과 서양사회에 보도된 것이다.

1919년 5월 '푸른 눈의 항일운동가'로 불렸던 미국 선교사 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 한국 이름 인돈·1891~1960)의 3·1운동에 대한 증언을 보도한 미국 애틀랜타의 지역 신문인 '애틀랜타 저널(The Atlanta Journal)' 기사가 처음으로 최근 공개됐다: "3월 1일 전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폭력이나 무질서는 없었다. 일본 정부가 이 봉기를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참가자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감옥은 한국인들로 차고 넘쳤다.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있었다.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이 총검에 짓밟혔으나 누구도 (폭력적) 저항을 하지 않았다." 기사 제목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Atlantian tells how Koreans are seeking liberty)'. 신문은 3·1운동을 '세계사(史)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봉기'라고 평가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3월 1일, 인구 30만 명의 수도 서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 행진했다. 폭력과 무질서는 커녕, 일본 정부가 군중을 해산하려고 할 때 저항조차 없었다. 그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었을 뿐이다. (중략) 잡혀온 한국인들로 감옥에 더 이상 자리가 없자, 군부는 기병대대(大隊, battalion)를 보내 수백 명의 한국인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하지만 여전히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더 강한 군사력을 투입했고,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은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총검에 쓰러져갔다." 린튼은 국제사회의 도움을 간절히 호소했다: "한국의 운명은 동맹국가에 달려 있다." "파리평화회의는 30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한민족의 민족 정체성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말살해온 일본 정부에 대항하는 한국 국민의 봉기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위의 글은 일제강점기 한국 현실과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려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쓴 글이다. 린튼은 전북 군산의 3·1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 국권 회복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21세에 한국으로 건너온 그는 3·1운동 당시 28세였다. 1940년 일제에 의해 쫓겨났다가 광복 이후인 194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성경학교를 운영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우리 정부는 201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린튼이 1956년 세운 한남대학교(구 대전대학)가 최근 교내 아카이브에서 이 기사를 발견했다. 린튼의 손자인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은 "할아버지는 일평생 한국을 사랑했던 분"이라며 "이 기사는 한국인들이 자유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놀라운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의 역할이란 '3.1운동과 일제의 탄압에 대한 실상을 외부에 알려 국제 여론을 조성한 것'과 '한국인들의 독립요구의 정당성에 공감하고, 피해자들을 적극 치료하고 위로하고 보호한 것', '일제 시정을 한국의 자유와 권익을 확대하도록 개선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 '목격한 것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 전수한 것' 등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한계란 '보호가 목적이긴 했지만 만세 시위 가담을 말린 것', '독립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시정 개선이나 한국인의 참정, 자치정도를 이상으로 본 것', '계속적 선교활동을 위해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일제에 적극 항거하지 못한 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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