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규 설교]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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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 - 삼상 8:4-11, 고후 4:13-5:1, 막 3:20-35
대한기독교서회 상무 박만규 목사

사무엘상 8장은 이스라엘백성이 이웃민족의 침입을 받지 않기 위해 왕과 집단방위체제로서 국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로 등의 입을 통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주변 국가들은 이미 왕정제도를 통해 고도의 발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블레셋은 5개의 도시로 나누어서 각각의 군주들에 의해 도시국가의 형태로 국가가 운영되고 있었고, 그 밖의 암몬, 에둠, 다마섹 등도 강대국인 앗수루, 바벨론 등을 모방에서 강력한 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20절에서 모델로 제시한 '다른 나라들'이란 이집트나 앗수르와 같은 그런 전통 강대국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로 이스라엘과 혈통 관계에 있던 모압, 암몬, 에돔과 같은 주변 나라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비슷한 여건을 가진 나라들이 체계화된 도시국가를 이룬 비결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이렇게 약소국가로 남아있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왕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한 것과, 가나안에 입성한 후에 그곳 원주민들과의 크고 작은 전쟁에 시달린 것도 이유가 되지만, 무엇보다 왕이 없이 지파(tribe) 차원의 부족 동맹체제로 나라가 운영되고 있는 것이 나라가 발전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저는 이스라엘이 처한 처지로 볼 때 이러한 백성들과 장로들의 요구는 너무도 당연한 요구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이스라엘은 사사들의 통치로 전쟁을 수행하고 평화를 유지하고는 했지만 사무엘 아들들이 정의로운 사사로서의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더더욱 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이러한 요청을 자기와 자신의 자녀 등의 불신으로 간주하여, 사사기능의 쇠퇴와 왕과 왕정으로 인해 파생되는 부작용과 왕권남용으로 오는 피해를 열거하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본래 사사의 역할은 공평과 정의를 위해 주어진 직책이었습니다. 그 아들들은 정의롭고 공평한 재판을 하지 않았으니 정의의 배반자 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러나 그 아들들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 살지 않고,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 뇌물을 받고서, 치우치게 재판을 하였다." (3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평화와 국가안보를 위한 집단방의체계로서의 왕 제도를 절감하고 사무엘에게 요구합니다. 그리고 왕제도의 장점 못지않게 단점과 부작용이 있음을 사무엘을 통해 알게 됩니다. 왕의 제도란 왕으로 인해 야기되는 병역, 조세, 인권 등 여러 가지 피해 사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계속해서 왕의 제도를 요구합니다.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전쟁과 안정이 계속 반복되었던 사사시대와는 달리 영구한 국가 안보를 위해 두 가지의 이유를 들어서 왕의 제도를 요구 합니다. 첫째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늙으셨고, 아드님들은 어른께서 걸어오신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5절) 지금 이후부터는 부정직한 사사로는 백성들의 안보를 답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체제의 개혁이 아니라 새로운 체재의 필요성이 요청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유는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5절) 이 두 번째 요구가 왕의 필요성을 실제 이유입니다. " 우리도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그 왕이 우리를 이끌고 나가서, 전쟁에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20절) "이방나라들처럼" 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왕도 이웃나라와 같은 기능을 수행함을 말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이방나라의 왕이 국가공동체에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이스라엘 왕도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기본적인 의무일 것입니다. 군사적으로는 외적이 침입하면 이스라엘 왕도 적을 격퇴시키고 안보를 책임 질 의무가 임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인간의 왕을 허락합니다. 왕정제도를 반대했던 것은 경제적인 피해와 부조리도 있으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신앙과 신학의 문제로 하나님을 배격하는바 우상숭배를 배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계약 속에서 제사장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출19:9) 이런 점에서 이방나라의 왕들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나라들의 왕정제도를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방 속에서 신앙적인 유혹까지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즉위하면 이방나라의 여러 왕들이 여러 신을 섬기는 것처럼 야웨 하나님을 대신해서 여러 이방신들을 섬기는 죄, 즉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이방신들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과 완정이란 가시적인 인간 왕과 제도를 의지하여 불가시적인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저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에서 왕정으로의 전이는 불가피하지만 여기에 심각한 신학적 맹점이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본문은 두 전승 자료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3:22-30의 자료와 3:20-21, 21-35의 자료로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자료는 원래 벙어리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 이적설화에서 온 것으로, 마(12:22-32), 누가(11:14-23)에는 바리새인들의 비난 앞에 벙어리 귀신들린 사람의 이야기가 붙어있습니다. 마가는 이 부분을 없애고 바리새인들의 비난 부분 이하만을 싣고 있습니다. 이는 마가가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 이렇게 만들었음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기적을 보고 당황했습니다. 만약 예수가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눈속임 이었다면, 에스의 적대자등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눈속임으로 많은 무리를 미혹 했다면 체포할 수 있는 충분한 구실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적대자들은 예수의 기적에 대하여 어떠한 눈속임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는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의아해하지만 하나님에게서 연유된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마침내 그들은 예수의 기적이 바발세불에 의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활동전체가 기적 사건과 맞물려 잇습니다. 기적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의 선포가 그렇게 확산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의 짧은 공생애 동안 대중적으로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일시적이거나, 몇 차례의 전시용이 아니라 예수의 공생애 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무리들은 기적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복음서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치유와 축귀가 최소한 20회 가량이고, 그 외 다 기록되지 않은 것도 많아 보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병자, 가족, 친지 그리고 무리들 대부분은 절박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지붕을 뚫고 내려 보낸 중풍병자. 귀신들린 사람, 나병환자, 소경, 평생 혈루병을 앓다가 예수의 옷깃을 만진 여인 등 다양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이는 몰래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부분 공개적이고, 때로는 안식일에 치유기적을 일으키면서 종교지도자들과 심각한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복음서의 본문에서는 예수가 미쳤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 예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미쳤다는 것은 귀신들렸다는 증거였고, 예수가 귀신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알세불에 들렸다,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낸다.(22절) 그는 악한 귀신이 들렸다(30절)는 말과 병행되는 것으로, 이때 예수의 가족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비난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누군가 예수님께 그 사실을 전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막3:32)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막3:33-35 )

예수님께서 왜 이렇듯 매정하게 말씀하시는 것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불효자요 동생과 누이도 못 알아보는 무정한 형제라서 그러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당신의 진정한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1:15)라는 예수의 선포에 순종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는 예수가 하나님께 순복하심과 제자들이 예수의 부르심에 순복함(1:16-20)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부르심에 철저한 순종을 말씀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의 적대자들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이 떠난 뒤에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이동하며 추천서를 제시함으로서 교회로부터 부양받을 것을 요구했고, 머무는 동안 교회의 부양을 받아 활동하던 이동 선교사였습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도를 자칭하면서 고린도에 당도했으나, 고린도는 이미 바울이 복음의 터를 닦아놓은 장소였고, 바울은 비옥 고린도를 떠나있었지만 편지로서 사도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고린도교인에게 미치는 바울의 중요하고도 강한 영향력에 시기, 질투, 경쟁심을 가지고 바울을 인격적으로 사도로서의 합법성과 능력과 관련하여 권위를 깍아내리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1) 바울이 고린도에 있지 않고 떠나서 편지를 보내는 일에 대해 그가 말에 능하지 못하고 직접 대하면 별로 잘난 것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멀리서 편지를 쓴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바울의 편지에서 사도적 권위가 강하게 우러나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던 것입니다. 2) 또한 바울이 그들과는 다르게 교회로부터 부양권을 받지 않는 사실에도 경쟁의식을 느끼고 오히려 바울이 분양권을 포기한 것은 참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예루살렘을 위한 모금운동에 대해서도 바울이 교묘한 방법으로 고린도인들에게서 뜯어가는 것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4)이들은 유대적 출신과 신령한 능력이나 체험을 자랑하고, 추천서를 가지고와서 그들의 사도성을 제시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이러한 상황을 접하고 "하나님은 나의 진실을 아신다"고 침묵하고 대결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를 다하여 철저히 대결합니다. 이전까지는 자신에 대하여 자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생명을 건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전력을 다했던 것은 이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복음을 씨앗을 뿌려놓은 복음의 터에 엉뚱한 사람들이 와서 갖은 모략과 음모로 바울의 수고를 허사로 만들뿐 아니라 고린도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그들의 말에 현옥되어 그들을 참사도로 여기고 바울의 사도됨을 의심하는 고린도인등이 참으로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부끄러운 줄 알지만,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자랑에 대결하여 그들보다 못지않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그들이 사도 바울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자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후 2:14-7:4에서 사도직의 본분에 대해 말합니다. 사도는 그리스도 향기이다.(2:4-17) 즉 사도가 어느 곳에서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일 을 하든지 드러내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3:1-4) 그리고 사도활동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그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이 일은 영의 역사이기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표현하고 모세의 직분과 사도의 직분을 문자와 영의 대조를 통해 대비시킵니다.(3:5-18)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의 일은 하나님의 영의 역사이다.(4:1-7) 그래서 사도직을 수행하는 일로 답답한 일도 많고 핍박을 당하기도하고 죽을 고비를 겪지만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며(4:8-15),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4:16-5:10) 사도로서 사도의 일을 하게끔 강권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입니다. 즉 예수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그 소식을 사도는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4:16-18)

"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5:1)

거짓 복음전도자들의 도전에 대해 사도직의 본분을 말하고 있는 바울의 심정이 오롯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예수님을 부르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얼마나 마음이 퍽퍽했을 까 생각해봅니다.

어느 사회든지 혈연이 주요하지 않은 사회는 없겠으나, 우리사회는 형연 지연 학연 이라는 카르텔을 강하게 형성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는 기적을 통해 죽은 사람을 살리셨지만, 우리사회의 학연은 죽은 사람도 살리고 산사람도 죽게 한다고 합니다. 특히 '의리'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이는 사전적 용어로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이겠으나 끼리끼리 서로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는 상호간의 부정까지도 눈감아주는 건달세계의 용어로 전락한듯하여 씁쓸하기만 합니다.

어머니 동생 누이로 상징되는 혈연, 출신 학교에 따라 연결된 인연인 학연, 출신 지역에 따라 연결된 인연인 지연에 기대어 사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엄정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우리의 귓가를 때립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막3:33-35 )

구약에서는 왕정제도의 도입이 역사발전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성서는 가시적인 인간 왕과 제도를 의지하여 불가시적인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하고 신앙을 저버릴 것을 염려했습니다. 오늘 우리사회는 우리의 왕 노릇하는 것이 많지만, 그중에서 자본이, 편리가 왕 노릇합니다. 부자로 사는 것보다 바르게 사는 것이, 편리하게 사는 것보다 올 곧게 사는 것이 소중함을 함께 누리며 사는 세상이기를 소망해봅니다.

온갖 모략과 음모로 바울을 무너트리려 했던 적대자들에게 참된 사도직의 본분을 말하고 있는 바울사도의 말씀을 다시 읽으며 우리가 새로워지기를 다짐해 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4:16-18)

"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5:1)

* 설교는 지난 2018년 6월 10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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