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학살, 日국가권력 강화 위해 군관민 함께 저지른 민족 제노사이드

제94주기 관동대학살 희생자를 위한 추도기도회 및 강연회 열려
제94주기 관동대학살 희생자를 위한 추도기도회 및 강연회를 마치고 기념 촬영. ©기장 총회 제공

[기독일보 박용국 기자] 기장 총회(총회장 권오륜 목사)가 재일동포선교주일(9월 첫째주)을 맞이해, 총회 교회와사회위원회가 ‘1923간토한일재일시민연대’와 함께 ‘제94주기 관동대학살 희생자를 위한 추도기도회 및 강연회’를 지난 25일 오후 기독교회관에서 개최했다. 행사는 NCCK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했다.

행사는 오충공 감독의 “1923 제노사이드, 93년의 침묵”이란 제목의 오프닝으로 시작했으며, 학살희생자 추모예배에서는 윤광호 목사가 추모가를 전하고 김경호 목사(기장총회 교회와사회위원장)가 “정직한 새 영을 넣어주소서”란 주제로 설교했다. 이어 “일본 내 관동대지진 때의 학살사건 진상규명운동의 현황”(일본 센슈대 타나카마사타카 교수) “관동대학살에 대한 기독교인의 대응”(성균관대 박사과정 김강산 선생) 등 한일연구자의 특별강연이 진행됐으며, 김지태 목사(기장총회 관동(関東)소위원회 위원)가 성명서를 낭독했다.

특별히 아라가와 추도비(동경) 사이타마 강대흥 추도비, 칸논지 마고메 추도비(치바) 특별탁본 전시도 이뤄졌다. 치바 마고메 공원에는 ‘관동대진재희생동포위령비’가 있고, 그 추도비 뒤 편에는 학살사건에 대한 재일한인동포들의 입장과 추모의 마음이 담겨 있다. 또 일본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봉선화 모임”은 뜻있는 시민들의 정성을 모아 2009년 도쿄의 대표적 학살터였던 아라카와에 추도비를 세우기도 했다. 추도비 뒷면에 일본 군대와 경찰, 그리고 유언비어를 믿은 민중에 의해 한국 조선인들이 학살됐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제94주기 관동대학살 희생자를 위한 강연회. ©기장 총회 제공

한편 ‘관동조선인학살사건‘은 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대지진의 극심한 피해가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최고 권력에 의해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대와 경찰, 민간 자경단에 의해 6천여 명의 한국(조선)인이 이유도 모른 채 학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일본은 당시 천황제를 반대하는 정치세력과 노동자의 단체행동, 부락민들의 계급해방운동, 쌀 파동으로 인한 민중폭동,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서 겪은 3.1만세운동 등 대내외적으로 천황권력이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간토대진으로 인한 재난을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핵심권력층은 재일한국(조선)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퍼뜨렸고, 언론과 군대의 송신망을 통해 적극 유포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내용은 조선인을 단순한 폭도로 만드는 것을 넘어서 내란범죄를 덮어 씌웠고, 일본 노동자들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인 줄 알면서도 자신들이 임금투쟁을 하는 동안 값싼 임금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조선인을 몰아내기 위해 조선인학살에 참여하게 됐다.

심지어 또한 지진의 직접적 피해나 조선인들과 별다른 마찰이 없었던 지역에서도 일본정부로부터 내려 온 공문에 ‘조선인들이 출몰하여 피해를 주고 있으니 마을을 지키라’는 공문을 받고 자경단을 조직하여 수용소로 이동하는 조선인들을 학살하거나 경찰서로 피신한 조선인들까지 끌어내어 현장에서 참혹한 학살을 자행했다. 관동조선인학살사건은 재난상황에서 일본 국가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관민이 함께 저지른 민족 제노사이드였다.

제94주기 관동대학살 희생자를 위해 추모하는 참석자들. ©기장 총회 제공

1923년 12월 16일에 열린 제국 의회 중의원 본 회의에서 의원들이 조선인 학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자, 총리인 야마모토 곤노효우에는 “정부는 일어난 상황에 대하여 현재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답변하며 학살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책임을 회피했다. 지금까지도 일본의 행정, 입법, 사법부 모두 당시의 사건에 대해 공식적 답변을 회피하거나 거부해 왔으며, 최근 현 일본 아베총리 역시 조선인 학살사건에 유감을 표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사단을 파견하여 간토 학살현장을 찾아다니며 생존자들의 증언들을 모아보니 ‘학살희생자가 6,661명이 되었다’고 발표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국가차원의 진상조사를 한 일이 없다. 일본 정부에 진상조사를 요구한 일도 없다.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보살핌도 전혀 없었다. 일본에 산재한 추도비를 찾아가 조문한 일도 없다.

이에 민간조사단 활동이 시작됐고, 관동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운동이 일어났다. 더불어 기장 총회는 ‘1923 관동조선인학살 진상규명 대책 소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으며, 유족찾기사업과 추도사업, 연대활동 등을 벌여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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