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신학칼럼] 성경은 정말 여자를 무시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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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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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1. 맞습니다.

성경 속에는 여자를 남자와 차별하는 듯한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롯(창 19장)은 성경에서 의인(벧후 2:7)이라고 평가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보다 자신이 모르는 다른 남자(천사)를 더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딸들보다 그들이 더 귀해서라기보다 롯의 경우처럼 아버지조차 딸들을 차별했을 만큼 여자를 천히 대하는 것이 당시 사회의 일상적 풍경이었다고 봅니다. 남존여비의 유교사상이 있었던 우리 조선시대가 그랬던 것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물론 성경이 말하고 싶은 전부는 아닙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 하실리가 전혀 없습니다.

2. 힘과 폭력이 지배하는 보편적 인간 사회

성경 속 사회가 남녀를 차별한다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남녀를 차별하신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남존여비 문제는 하나님이 그렇게 규정하신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 사회가 얼마나 힘과 폭력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왔는지를 성경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기는 하나 하나님은 친히 모든 것을 직설적으로 말씀(직통계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 기자들을 통해 우주, 역사, 풍습, 사회, 인간관계, 메타포(은유), 알레고리 등을 총동원하여 계시를 하십니다. 성경에 마귀나 귀신의 음성이나 다양한 흉칙한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성경은 세상이 얼마나 부패하고 폭력적이며 반(反)신앙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자신의 아버지 다윗에 대해 노골적이고 공격적으로 반역을 꾀한 것이나, 예루살렘 성읍을 제외한 유대 모든 성읍을 점령했던 앗수르 황제 산헤립이 자신의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게 살해당한 것은 인간의 폭력성에는 그 한계가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참조 왕하 19: 36-37).

3. 유대 사회의 남존여비 사상

심지어 훌륭한 신앙의 인물들인 아브라함이나 야곱, 다윗 등도 축첩을 하였으니 하나님의 율례를 받은 신앙의 인물들조차 악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사회적 풍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성경은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유대 사회는 여자나 아이들을 정상적 보편적 사람으로 취급하지 아니하고 남자 성인에 비해 (조금은 부족하고 덜된) 마치 반인(半人)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 여자들이 찬양대에 설 수 없었던 것이나 인구 계수시 남자 성인들만 대상이 된 것도 그런 이유이지요. 이런 습성은 예수님 당시에도 계속 되어 아이나 여자들은 온전치 못한 존재로 취급 받아 증인(證人)조차 될 수가 없었습니다.

4.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예수님께서 12제자 중에 여자를 두지 않으신 것도 그런 사회 분위기를 보여줍니다(남자를 중시하는 풍조가 예수님 맘에 들어서가 아닌, 불필요한 항의나 분란이나 충돌을 막고 제자들을 양육하시려는 주님의 뜻이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예수님은 결코 아이들이나 여자들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천국은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이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므로 예수님은 아이들도 소중한 존재임을 분명히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을 제자들이 아닌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이 되게 하신 것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줄행랑을 친 상황 속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여러 여자들이 신앙과 의리를 지키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 것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남녀를 차별하나 예수님은 결코 남녀를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성경에 나타난 남녀 차별은 인간 사회의 문제일 뿐 하나님은 남녀를 분별은 하시되 차별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특정 구절만을 확대하여 잘못 적용하면 전혀 엉뚱한 해석이 될 수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점진적 구속 계시의 영역 안에서 성경은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아야 참 된 해석에 이를 수 있는 책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해석(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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